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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운하 순례’ 떠나는 수경 스님 심경 밝혀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8.02.04 12:18
  • 댓글 0

“대운하 건설보다 반생명 기운이 더 무서워”

“이 시대를 생명의 눈으로 성찰하는 계기 삼을 것”
부처님이시여!
길을 나섭니다. 길에서 나셔서, 길 위에서 가르침을 펴시다가, 길 위에서 가신 당신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왜 이리 두려운지요. 엄동에 한뎃잠을 자야 하는 일도 두렵고, 혹시라도 누군가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렵고, 길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의 길을 따라온 40년이 헛공부였는가 봅니다. 하지만 저는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는 일이 더 괴로워서, 우선 제가 살기 위해서 이 길을 나섭니다. 하여 이 길은, 납자로서 살아온 지난 시간을 반조하고, 당신과 당신의 또 다른 몸인 뭇생명들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모두들 힘들어합니다.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다들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거리에는 차들이 넘쳐나고, 자동차를 수출해서 버는 돈에 버금가는 음식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데도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요. 모두가 부자가 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타인을 가난뱅이로 만들기 위해 죽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못 할 짓이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험한 꼴을 보고도 못 본 척, 나는 절대 저런 꼴을 안 당할 거야, 하고 자위하면서 모두가 죽을 꾀를 내겠지요. ‘대량소비’라는 마술에 빠진, ‘돈’이라는 유일신의 광신도가 되어가는 시대의 초상입니다.

원로 대덕 스님들이시여!
세간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나서려 합니다. 저는 분명히 어른 스님네들로부터 세간과 출세간이 둘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예토가 없으면 정토도 없다고 배웠습니다. 부처님이 밝혀 놓으신 연기법에 비추어 봐도 옳은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 덕분에 간신히 수행자의 명색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 은혜를 갚고자 길을 나섭니다. 자비의 종자가 말라가고, 뭇생명이 죽음으로 내몰릴 현장으로 갑니다. 큰스님들께서 제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제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부디 새로운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법상에 앉아서 주옥같은 경전의 구절을 읊고, 선사들의 오도송이나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이 수행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과연 수행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미친 듯 돌아가고 있는데도 고고한 모습으로 눈 하나 깜짝 않는 것이 수행입니까? 깨달음은 또 무엇입니까? 해탈은 또 무엇입니까? 정토는 또 무엇입니까? 지금 이곳에서의 삶과 무관한 깨달음이나, 해탈, 정토가 있다면 좀 일러 주십시오. 있다면 그곳에서 저도 큰스님들을 흉내내어 사자후라는 것을 한 번 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세간이 없으면 출세간도 없다는 것을. 그것을 알기에 길을 나섭니다. 탐욕과 이기와 반생명의 광풍에 무너져 내리는 세간 위에 가식과 허위의 정토를 세우고 유유자적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지금 ‘한반도 대운하’ 건설보다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반생명의 기운이 더 무섭습니다. 탐욕을 부채질하는 경제논리와 개발의 광풍이, 그것을 무한 승인하는 침묵이 더 무섭습니다. 저는 단순히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반대하기 위해서, 그것을 만들겠다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서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싸울 힘도 없지만 이길 힘은 더더욱 없습니다. 다만 저는 수많은 생명이 사라질 것이 불 보듯 뻔한 현장을 그냥 지켜 볼 수 없기 때문에, 공업 중생으로서 참회의 기도라도 올리려는 것입니다. 공멸의 길인지 알면서도 한 순간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생명을 해치는 이 시대를 생명의 눈으로 성찰하는 계기로 삼고자 길을 나섭니다.

끝으로 나의 도반이신 신도님네들께 한 말씀 올립니다. 저는 늘 신도님들께 만생명을 위해, 진정 행복한 삶을 위해 기도하자고 말해 왔습니다. 기도란, 안 되는 것을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원의 성취 조건을 스스로 갖추는 것이 기도라고 말해 왔습니다. 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저는 늘 신도님들과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만생명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수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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