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정 기자의 칙칙폭폭 인도순례]2. 깨달음의 울림
[안소정 기자의 칙칙폭폭 인도순례]2. 깨달음의 울림
  • 법보신문
  • 승인 2008.02.2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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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눈에서 붓다의 지혜를 보다

플랫폼 주변에 자리를 깔고 수백 명이 누워 있다. 거지인가 싶지만 아니다. 기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선남선녀들이다.

그들은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밤낮을 마냥 그렇게 기차를 기다린다. 열차에 올라서자마자 승무원이 방긋 웃으며 반긴다.

낯선 이에게 어쩜 저리도 발랄하게 웃을 수 있는지, 여행객들은 자연스레 그 웃음에 전염된다.

마하 파리니르반(대열반) 열차에는 여행자 10명당 3명의 승무원이 따라붙는다. 식사와 차, 후식, 화장실 문을 열고 닫는 담당까지 열차 밖 풍광과는 사뭇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맨 먼저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고 구석구석 이리저리 살핀다. 4인실을 2인이 쓰도록 개조해 특실로 재탄생된 공간이다. 침대에 깔린 하얀 시트 위에 얼른 누워 다리를 쭉 뻗어본다. 창밖도 내다보고 취재수첩을 열어 끼적거려도 본다. 기차는 천천히 델리를 빠져나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마시는 인도식 차 짜이와 쿠키, 인도 정식 탈리(Thali) 만찬이 이어진다. 기차가 속력을 내는 동안 기분은 점점 근사해진다.

<사진설명> 호기심 가득한 인도의 아이들.

오늘은 밤이 새도록 열차가 달린다. 델리에서 가야까지 평균 시속 80㎞로 990㎞를,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총 13시간 이동한다. 우리는 그저 흔들리는 기차에 의지해 편히 누워 잠들기만을 바라면 될 뿐이다. 먹을 물이 없어 자신의 오줌 한 방울도 아껴 마셔가며 가시밭길을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오직 신심 하나로 걷고 또 걸었던 혜초 스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 무슨 호화로운 영화인가 싶다.

“붓담 사라남 갓차미(Buddham saranam gacchami)~”

성지순례의 새벽은 늘 빨리 찾아온다. 빨리어 예불 소리가 열차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 곤한 잠의 끝자락과 아쉬운 이별을 한다. 가야에 도착한 것이다. ‘제가 이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나 이제 부처님이라는 귀의처로 나아갑니다.’라는 예불문은 붓다에 조금 더 가까이 왔음을 알려주는 듯하다.

<사진설명> 수자타 여인의 집터 앞. 이곳은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와 “텐 루피”를 외쳐댔다.

멀리 수자타 마을이 보인다. 6년 동안의 처절한 고행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아님을 알게 된 싯다르타. 붓다가 되기 전 몸을 씻었다는 나란자나 강을 버스를 타고 건넌다. 우기 때와 달리 물은 깊지 않아 보인다. 붓다에게 우유를 섞은 미음 공양을 올린 수자타 여인의 집터 앞. 역사적인 공양이 이루어진 곳이다. 최근까지도 시체를 내다버리는 장소였던 이곳은 천민들이 모여 살고 있고 도적떼가 들끓는 위험지역이다.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아이들이 달려든다. 배고픔을 달래려고 “텐 루피(한화 250원)”를 외쳐대는 아이들.

카메라를 들이대자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요렇게 조렇게 표정을 지어 보인다. 까만 발이 흙과 동물의 배설물로 더욱 까맣게 보이지만 눈동자만큼은 청아하다.

렌즈 속의 아이들은 너무나 순수하고 맑다. 배고픔도 잊고 환히 웃어주는 아이들을 보니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한다. 아이들은 사진을 찍고 난 뒤에도 어미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뒤를 졸졸 따른다. 내가 걸으면 아이들도 걷고 내가 뛰면 아이들도 뛴다. 깔깔대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사진설명> 부다가야의 개들은 누워있는 곳이 곧 집이다.
인간이 아닌 개로 태어났다면 부다가야에서 태어난 개가 부러울 것 같다.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개들의 천국이다. 벌러덩 누우면 그 곳이 집이 된다. 배고파 어슬렁거리다 운 좋게 쓰레기통에서 음식물을 발견하면 밥그릇이 된다. 그러다 다시 졸리면 길 한복판에 또 ‘벌러덩’이다. 그렇다고 누가 발로 걷어차지도, 자동차 경적을 울려대지도 않는다. 심지어 사람이 개를 피해 돌아서 다닐 정도다. 네다리와 몸통뿐 아니라 얼굴마저 누워버린 개들. 그 모습과 상황들.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마하보디 대탑으로 가는 길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진설명> 기원전 3세기에 인도 통일을 이룬 아쇼카 대왕이 붓다의 깨달음을 기념해 세운 52m의 마하보디 대탑. 대탑 주변에는 붓다 스스로 이뤄낸 최상의 지혜와 해탈의 즐거움을 만끽했던 49일 동안의 흔적들이 존재한다.
이곳은 붓다의 깨달음이 있었던 곳,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곳, 붓다가 가부좌를 틀고 깨달음을 완성한 길상(吉祥)의 자리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 통일을 이룬 아쇼카 대왕이 붓다의 깨달음을 기념해 세운 52m의 마하보디 대탑 앞이다. 탑 앞에는 금강보좌가 있고 그 바로 뒤에 보리수가 자라고 있다. 그 당시의 보리수는 아니지만 깨달음의 환희로움은 삼천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이 자리에서 나의 육체가 소멸되어도 좋다. 모든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며 선정에 든 붓다. 악마의 유혹과 모진 비바람이 물러가고 드디어 깨달음을 완성한 붓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대탑 주변에는 붓다 스스로 이뤄낸 최상의 지혜와 해탈의 즐거움을 만끽했던 49일 동안의 흔적들이 존재한다. 보리수 아래에서 12연기를 관찰하고 연기의 진리를 완벽하게 정리했던 곳. 깨달음에 큰 도움을 준 나무에 고마움을 표했던 자리. 보리수 북쪽 담장 곁에서 경행선정(經行禪定)에 들었을 때 18개의 연꽃대좌가 발밑에서 피어올랐던 흔적. 범천과 제석천으로부터 공양물을 받을 때 붓다의 몸에서 오색광명이 발했던 곳. ‘브라만은 출생으로 되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의 행동으로 되는 것’이라는 위대한 선언을 남기신 장소. 무찰린다 연못에서 선정에 들었던 공간. 사르나트에서 수행 중인 다섯 도반을 첫 설법 대상으로 떠올린 장소. 곳곳에 붓다가 숨 쉬고 있는 듯하다.

보리수 아래 앉아 그때의 장면들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살포시 눈을 떠보니 보리수 잎사귀 몇 장이 바닥에 뒹굴고 있다. 두 손으로 그 잎들을 조심스레 집어 가방 속에 든『숫타니파타』사이에 끼워 넣는다.

금세 어둑어둑 날이 저물어가고 마하보디 대탑에서의 시간이 꿈처럼 바람처럼 지나가버렸다. 대탑을 등 뒤로하고 나오는 길목에 채소와 담배, 기념품, 과일 등을 파는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삶의 터널을 가득 채우고 있다. 노점상을 들여다보니 홀로 앉아 끼니를 때우는 한 노인이 보인다. 그 역사적인 깨달음의 자리 가까이에서 짜빠티(밀전병)를 입에 넣고 무표정하게 식사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붓다의 깨달음의 의미에 대해 깊이 침잠하게 된다.

<사진설명> 붓다가 경행선정에 들었을 때 피어올랐다는 18개의 연꽃대좌.
그곳에서 우리네 인간의 삶을 본다. 그렇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란 이 세상을 버리고 가는 길이 아니라 이 세상 속으로 가는 길이다. 울고 웃는 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뿌리를 투시하는 것이다. 출가를 통해 세상을 등지고 아무리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 해도 결국은 세상으로 가는 길과 만난다. 이 세상을 아무리 떠나려 해도 하늘과 땅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여의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또한 그 출가의 뜻은, 이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는 세상이다. 이곳 깨달음의 자리 또한 삶속에 있다. 구름 위가 아니라 이 세상이다.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바람도 있는 이 세상이다. 성자와 사기꾼, 도적떼와 어린이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그 세상 앞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나를 보고 바람이 말을 붙인다. 붓다의 얼굴을 스쳐지나온 바람이다. 한참 바람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 붓다여. 붓다여. 하늘에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안소정 기자 as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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