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광섭 교수의 불교와 시간]②일상적 시간
[소광섭 교수의 불교와 시간]②일상적 시간
  • 법보신문
  • 승인 2008.03.0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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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보살 2천년 전에 뉴턴식 시간관 부정

뉴턴 이후 시간의 절대성 인식 보편화
과학 발전할수록 용수 시간관에 주목

첫 회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정밀하게 측정되며 전 지구뿐 아니라 인공위성이 날아다니는 공간에까지 표준시간이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는가를 말하였다. 구태여 이러한 현대 기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경험 또는 직관으로 보아도 시간은 우주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일정하게 흐를 것이라고 믿어진다. 내가 잠을 자든 운동을 하든 시간은 여여히 흐르며 즐겁든 괴롭든 시간은 무심하게 흐름을 알고 있다. 시간은 보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꼭 같이 흐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평한 자연의 법칙이며, 하나의 시간이 전 우주에 걸쳐 균일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과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뉴턴은 그의 명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이러한 우리들의 일상적 시간관을 다음과 같이 과학적 진술문으로 써놓았다. “수학적이며 진리적인 절대시간은 외부의 그 어떤 것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서 일정하게 흐른다.”

이 절대시간의 관점을 따르면 표준시간을 각국에서 만들더라도 어디까지나 이 절대시간에 맞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절대시간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우주적 표준시간’인 셈이다. 우리들이 평소에 느끼며 살아가는 시간은 이 우주적 표준시간이며, 그래서 모든 시계들은 어떻게든 이 절대시간에 맞춰있을 것이고, 그것은 너무 당연하여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 시계가 절대시간을 재고 있느냐고 누군가 물으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절대시간을 직접 재는 시계가 지금까지 만들어진 적도 없거니와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다는 이론조차 없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표준시간이 있고 국제조약으로 이들을 다시 전 지구적 표준시간에 맞춘다고 했는데 이렇게 우주적으로 확장해서 만든 표준시간이 곧 절대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절대시간을 재는 시계가 없다고 한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우리들이 갖고 있는 모든 시계들과 생로병사의 경험들로 볼 때 시간은 있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틀림없지 않는가? 그러면 이쯤에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문제를 하나 제시해 보겠다. “지금 내가 죽어 사라져도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과연 그럴까?”

“그야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지만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또 죽은 사람이 차고 있던 시계가 멈추는 것은 아니란 것으로 명백합니다.”(이곳까지 일단 맞는 것으로 치자. 다만 이것이 증명이 못 된다는 것은 화두로 남겨 두겠다)

여기까지가 예비 질문이고, 이제 본 질문을 제시하겠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물건이 사라진 텅 빈 경우에도 시간은 흐르는가?” 이 질문에 네라고 답하면, 그것이 바로 절대시간을 믿는 것이다.

현실의 확실한 경험에 바탕한 이러한 생각들에 반성을 촉구한 것은 서구의 라이프니츠 등 철학자와 인도의 성자로 공(空) 사상을 펼쳤던 용수보살(Nagarjuna, 150~250) 같은 분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tz, 1646~1716)는 시간의 ‘상대성’을, 용수보살은 시간의 ‘공성(空性)’을 주장하였다. 시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상대성과 공성을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절대’, ‘상대’, ‘공’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넘어가자. ‘절대적 시간’이란 다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그것 혼자 자체로 있는 시간이란 뜻이다. 특히 관찰자가 없이도 시간은 혼자 흘러가는 어떤 것이란 뜻이다. ‘상대적 시간’은 다른 것과의 관계, 특히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고 존재하는 시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의 심장이 한 번 뛰는데 걸리는 시간을 쉽게 1초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내 손목시계로 재면 1초에 한 번 뛸 것이다. 옆에 서 있는 친구의 심장 박동을 재면 역시 1초일 것이다. 만약 이 친구가 자동차를 타고 가면 그의 심장 박동 시간은 본인의 시계로 재면 당연히 1초일 것이고, 내 시계로 봐도 역시 1초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동차에 탄 시계는 천천히 간다든가 하는 것이 되어서 몇 만분의 일초만 틀려도 안 되는 현대사회에서 벌써 큰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본 경험으로 봐도 시계가 달리 갈 것 같지는 않다.

이 정도가 우리의 경험세계이다. 경험은 사실이므로 확실성이 보장되지만 그렇다고 경험한 것을 넘어서 보편적인 주장은 할 수 없다. 현재의 논의에서는 아주 빠른 경우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거의 광속으로 달리는 로켓에 탄 사람의 심장이 한 번 뛸 때 내 심장도 역시 한 번 뛰는 것으로 보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내가 볼 때 승객의 심장은 한 번 뛰는데 1분도 넘게 걸릴 수 있다. 로켓의 속도에 따라 얼마든지 더 느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절대적으로 일정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고 관찰자와의 운동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이래서 시간은 관찰자에 상대적이라 한다. 다시 말해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시간이 달리 흐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똑같은 시계라도 달리 흐르게 되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질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이다.

‘공’사상은 일체의 존재가 상대적 의존관계에서 이루어졌다는‘연기사상(緣起思想)과 밀접하며, ’혼자’, ‘그것 자체의 성질 (自性)’ 따위는 없다는 뜻이다. 즉 무자성(無自性)을 공이라고 한다. 사람도 없고 물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시간만 그것 자체로 흘러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현상은 있지만 시간 그 자체가 있다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란 것도 오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시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철학적 관점에서,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바탕하여 시간의 절대성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시간이 혼자서 흘러감을 확실히 보여준다. 더욱이 뉴턴의 이론은 천체현상과 지상의 모든 현상에서 너무나 정밀하게 시간의 절대성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단 한 건도 어긋남이 없었고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른바 과학적으로 증명이 끝난 일이었다.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상대성 철학은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용수보살의 공사상은 한갓 관념적 유희에 불과한 듯하였다. 용수보살님은 석가모니 이후 가장 크게 깨친 분이라는데 “결국 깨달았다는 것도 혼자 허깨비 보는 것 아닌가?” 하고 은근히 속으로 의혹을 해볼 수도 있었겠다.

놀라운 점은 근대과학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용수보살은 시간의 공성을 그의 명저 『중관론』에서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공’사상 (또는 연기사상)과 뉴턴의 과학이론이 이렇게 정면으로 대치되지만, 다행인지 서구과학이 동양에는 늦게 전파되어 ‘갈릴레오의 재판’이나 또는 정반대로 “불교는 비과학이다”라는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사상과 절대시간은 양립불가이므로 공사상을 믿는다면 절대시간이론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절대시간을 뒤엎고 상대시간을 들여오게 되었을까? 

소광섭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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