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광섭 교수의 불교와 시간]⑨불교의 시간관4 [끝]
[소광섭 교수의 불교와 시간]⑨불교의 시간관4 [끝]
  • 법보신문
  • 승인 2008.06.2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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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의 시간 이해는 불교이론 증명하는 과정
 
현대과학은 이제 시간의 주관성을 인정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넘어 주관과 객관마저 부정한다. 사진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영속성’.

 

뉴턴식 시간관은 부파불교에서 이미 극복
물리학 혁명 또 있을 땐 공사상 입증될 것


공(空) 사상과 시간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은 공(空)사상으로 알려져 있는바 ‘모든 법(존재 또는 현상)은 그 본체라 할 불변 영속의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이를 무자성(無自性)이라 함]’는 뜻이다. 이는 대상과 주관이 모두 개체로서는 공한 것이며, 인연에 따라 연기(緣起)로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 인식의 대상인 개체 사물에 명칭을 부여하고 개념[相]으로 파악함으로써 마치 실체가 있는 존재로 집착하게 되며, 이런 사유습관에서 시간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집착하게 된다고 반야계 대표경전 중 하나인 「팔천송반야(八千頌般若)」에서 말하고 있다.

“과거의 법에 대하여 ‘법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이며, 미래의 법에 대해서 ‘법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집착이며, 현재의 법에 대해서 ‘법은 지금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집착이다.”

과거·현재·미래로 분별하여 고정된 명상(名相)으로 나눌 수 있다고 시간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집착이란 것이다. 그래서 반야사상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법의 법성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없는 법성은 삼시(三時)를 넘어선 것이다.”

용수보살의 『중론』에서도 일체 법의 공을 엄밀하게 논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자성(自性)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인식대상으로 나타나 보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시간에 관련된 내용은 간접적으로 여러 장에 흩어져 있는데, 제19장 「시간의 고찰」은 직접적으로 시간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있다.

첫째로 시간상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나 공간상의 상중하의 구분은 상대적 관계성만을 말할 뿐 어떤 본질이나 자성(自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시간의 머무름이든 흘러감이든 인식될 수 없으며 따라서 시간의 상(相)을 말할 수 없다. 셋째로 사물과 현상을 바탕으로 시간이 있다고 파악하면, 일체 법이 공한 것인데 어떻게 시간이 실체로서 있을 수 있겠는가 이다.

『중론』 전체의 목표가 사물[法]의 실체성의 부정 즉 공사상의 주장에 있는 만큼 시간에 대해서도 역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적 시간론과 비교하면 뉴턴의 절대적 시간의 존재는 부파불교에서도 이미 부정되고 있고, 상대론적 시공간론은 부파불교의 ‘삼세실유설’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시공간 또는 우주가 상대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현상으로 있다고 보는 관점은 공사상과 어긋난다. 주관과 객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근·현대 과학의 철학적 틀이 대승불교의 공사상 또는 유식사상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리학은 앞으로 더 큰 혁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유식사상과 시간

불교의 핵심은 마음이다. 유식(唯識) 불교는 이 마음이 어떻게 이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를 깊이 연구한 불교의 인식론이며 심리학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5개의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을 통해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5식[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과 이들을 처리하여 저장(기억), 상상, 계산, 언어표현 등 지식활동을 하는 제 6식 즉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6개의 식(識)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알고 있는 마음의 세계이며, 이 세계는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 현상으로 바깥의 대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 현대과학의 자연관 및 인간관이라 할 수 있으며, 부파불교의 심리학과도 일치한다.

이 6식의 피상적 마음보다 더 깊은 심층심리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유식불교의 주장이다. 무착(無着, 310~390) 보살과 세친(世親, 320~400) 보살이 체계화한 유식사상은 6식보다 깊은 제7식(말나식)과 제8식(아뢰야식)이 일체유심조의 마음이라고 본다. 제7식은 이른바 ‘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자아의식으로써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꿈꾸고 있을 때나 최면상태 심지어 몸이 죽었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른바 ‘윤회’를 하는 식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는 개인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뢰야식은 융(C. G. Jung)이 제안한 ‘집단 무의식’과 유사한 점이 있는바 모든 중생들의 업이 일종의 종자로서 갈무리되어 있으며, 인연에 따라 현세화 된다. 이 아뢰야식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일체의 현상을 통섭하고 이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난다. 이 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에 의해 업식(業識)이 생기고, 이 업식에서 개체성을 띠는 전식(轉識)이 나타나 이것이 주관을 형성하는 망념된 마음[妄心]이 되며, 다시 인식대상[妄境界]을 만들어 마치 온갖 현상이 있는 것처럼 본다.

그러므로 유식사상에서는 현상 이전에 주관이 더 기본이고 주관이 허망한 대상들을 만들어 낸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의 꿈이란 것이다. 꿈속에 나타나는 것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만들어졌듯이 이 세상도 모두가 아뢰야식의 전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시간도, 과거·현재·미래의 구분도, 윤회, 인과관계 모두가 아뢰야식에서 나타나는 허상의 일부이며, 실재가 아니다.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서 “무한히 먼 겁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한 겁이다.”[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이란 구절은 시간이 곧 식(識)에서 비롯된 것이요, 따라서 객관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이나 객관적인 자연과학에서는 시간은 가장 엄격한 실재이다. 그럼에도 칸트의 철학에서는 시간은 우리의 직감의 내적 형식이며 범주의 도식이라 하여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고, 코페르니쿠스적 대선회라고 스스로 평가하였다. 구체적 내용은 아주 다르지만 시간이 주관에서 비롯됐다는 관점은 유식사상에 가까워진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앞으로 물리학과 뇌과학 및 심리학이 더욱 발달하면 대승불교의 유식사상과 그 시간관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소광섭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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