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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과거 아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논설위원]손혁재 경기대 정치교육원장

데자뷰(deja vu)라는 말이 있다. 기시감(旣視感)이라고 옮겨지는 데자뷰는 프랑스어로 ‘이미 본’이라는 뜻인데 지금 마주치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을 말한다. 최근의 촛불집회를 대하는 경찰과 검찰의 태도를 보면 6월 항쟁 이전의 상황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루탄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빼면 20년 전과 똑같다. 끔찍한 국가폭력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우려되기도 한다.

어청수 경찰청장이 1980년대식의 강경진압을 해볼까도 생각해봤다고 발언했을 때 이미 국가폭력은 예정되어 있었다. 촛불시민을 향해 물대포를 직접 쏘아대고, 소화기 분말을 분사하며, 빈 소화기를 시민들에게 던지는 것은 이미 국가폭력이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서 비폭력을 외치며 드러누운 시민들을 짓밟고, 방패로 내리찍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는 것은 명백한 국가폭력이다. 국가의 폭력에 참다못한 신부들이, 수녀들이, 스님들이, 목사들이, 교무들이 국가의 참회와 시민들의 비폭력을 요구한 것을 사법처리하겠다고 을러대는 것도 국가폭력이다. 이처럼 국가폭력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6월 항쟁 2년 전인  1985년, 야당의 김득수 의원이 대정부질의에서 전두환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제5공화국이 전투경찰과 최루탄 없이는 단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폭력공화국’이라고 발언한 것이다. 이재형 국회의장은 이 발언을 속기록에서 삭제시켜 버렸다. 대한민국을 폭력공화국이라고 발언한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를 부정하는 발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김 의원의 발언이 국체를 부정한 발언인가. 그렇지 않다. 김 의원은 군부독재정권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저지르던 국가폭력을 비판한 것이다. 물론 1950년대에도, 1987년 이후 민주화 이행과정에서도 국가폭력은 행해졌다. 그러나 1961년부터 1987년까지 군부독재정권 때에는 국가폭력이 특히 심했다. 역사의식 없는 국회의장의 폭력적 결정에 의해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만 김 의원의 비판은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이 있던 국회의원에게도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12대 국회가 개원한 뒤 첫 번째 대정부질의에서 야당의 신기하 의원이 ‘광주사태’(당시의 용어)에 대해 질의를 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났던 처절한 비극이 5년 만에 공개적으로 거론되었던 것이다. 이때까지 한국정치는 국가폭력을 저지르면서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려는 집단과 국가폭력에 희생을 치러가면서까지 있었던 일을 밝히려는 세력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당시 광주 출신의 신기하 의원이 광주 문제를 다룰 것이라는 판단을 한 공안기관들은 그 전날까지 상당한 압박을 가했다.

또 야당의 유성환 의원은 국회발언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풀려나기도 했다. 문제가 된 이른바 ‘국시’ 발언의 요지는 “왜 대한민국의 국시가 반공이냐, 대한민국의 국시는 민주주의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받다 목숨을 잃었고, 연세대 이한열 군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 같은 희생을 바탕으로 6월 항쟁이 민주주의를 살려냈고 국가폭력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국가폭력은 불행하게도 2008년 봄에 완벽하게 되살아났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며 비민주적 후보자와 정당을 선택했던 업보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의 108배를 올려야 한다.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지 않는 대통령이 탄생하도록 제대로 주인 노릇을 못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네 번째 절을 올립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경찰의 몽둥이와 방패로 국민이 맞는 폭력적 공권력이 되도록 국민 주권을 방치한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다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모두 부자 만들어 준다는 말에 속아서 온갖 탈법을 저지른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허물을 참회하며 아흔여섯 번째 절을 올립니다.”

손혁재 경기대 정치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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