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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교수 주장은 근본 외면한 몽상”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8.09.11 10:51
  • 댓글 0

특별기고-박희택 교수 신규탁 교수에 반론
전체적인 맥락 무시한 경전 읽기의 결과
법회 참석해야만 불자라는 건 ‘교조주의’

신규탁 연세대 교수가 9월 1일 월요포럼에서 “오계 받고 법회 꾸준히 참석해야 불자이며, 사찰에 소속되지 않은 재가단체는 사이비”라고 주장한 가운데 박희택<사진> 위덕대 교수가 이에 대한 반론문을 보내왔다. 서울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박 교수는 현재 위덕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를 비롯해 위덕대 사회복지대학원장, 진각복지연구교육센터장, 불교아카데미 원장 등을 맡고 있다. 편집자


‘중아함전유경’으로 말머리를 풀기로 한다. 부처님께서 말룽캬의 열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일일이 답하지 않으시고 독화살의 비유로 그를 한순간에 일깨우신 14무기(無記)의 가르침은, 모든 희론에 대한 대응법과 실제성의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신 것이다.
평소 열린 시각과 재가불교를 향해 따뜻한 관심을 보여오신 신규탁 교수님의 “재가불교철학을 위한 시도적 논의”는 희론이 아닐 뿐만 아니라, 경전에 근거하여 일관된 논지를 전개한 것이라 재가불교의 입장에서 무턱대고 비판할 일만도 아니다. 다만 실제성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어 이를 드러내고자 하며, 이러한 주고 받음의 소통을 통해 재가불교철학의 정립에 작은 이바지라도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신 교수님의 18쪽에 이르는 발표문을 구해 정독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재가불교운동의 제대로 된 발전을 원망(願望)하는 입장에서 발표문을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능엄경’이 이르는 “말은 되나 실제성이 없는(但有言說 都無實義)” 것이라면 필시 ‘허위’와 ‘환상’으로 불러 일으키게 되고, 이것은 곧 ‘왜곡’에 다름 아니다.

‘말은 되나 실제성이 없는’ 주장

우선, 신 교수님은 지나치게 훈고학적(訓詁學的)이다. 경전의 독송을 자귀에 경직되게 얽매여 할 때 훈고학에 머물고 만다. ‘화엄경’과 ‘대승기신론’ 등에 기초한 그의 재가불자론은 일견 전거(典據)가 튼튼한 이론개진으로 보이나, 그 밖에 어떠한 해석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직성은 경전과 이에 기초한 이론을 사구화(死句化)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며, 이같이 신수봉행하면 마치 조선조 성리학의 훈고학적 경직성이 초래한 수많은 병폐를 불교계 내부에서도 양산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불교의 유연성과 개방성에 현저히 반하는 것이다.
훈고학적 경전읽기와 이에 기초한 이론전개는 형식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형식주의는 한 틀을 벗어나는 것을 한사코 부정하면서 그 틀을 도그마시하게 되어 교조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모든 지나친 형식주의는 교조주의와 이웃이다. 칸트(I. Kant)가 말한 “형식이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고,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다”는 언설과 같이 신 교수님의 논지는 내용과 형식의 중도적 통일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둘째, 맥락(context)을 무시한 경전읽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이를테면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독단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맥락의 가치를 중시한 해석학이 대두된 것이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영향사(effective history)까지를 고려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리꾀르(P. Ricoeur)는 텍스트에 귀 기울이는 한편 텍스트에 투영된 전통에도 의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맥락주의와 보편주의는 상호보완적이다. 또한 맥락과 텍스트는 분리될 수 없으며, 부분은 전체에 의존하고 전체는 부분에 의존하는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이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훈고학적 경직성과 유사

그런데 신 교수님은 보살승단(대승교단)을 맥락적으로 보지 않음은 물론, 보편주의라는 명분 아래 맥락을 무시하고 그 의미를 정형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신 교수님은 대승불교를 단지 이념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맥락 속에서 재구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와 한국불교는 같을 수밖에 없다. 역사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시대와 그 공간의 불교가 되어가고 갈 수밖에 없는 역동적 변증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삼법인을 포함한 핵심교의를 공유하는 한 그것은 ‘불교’이다. 굳이 ‘불교적인 것’과 구분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불교적인 것’과 ‘불교’를 구분한 것은 세분화의 오류에 속한다. ‘한국적인 것’과 ‘한국’은 다른 것이나, ‘한국적인 것’을 배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다. ‘불교적인 것’ 중 ‘불교’ 그 자체라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섭수와 회통의 불교가 ‘불교적인 것’을 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불교는 사찰을 보더라도 어쩌면 ‘불교적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는 재래의 습속을 한결같이 수용하여 만다라회상을 이루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재가불자가 스님의 지도를 받지 않는 것은 ‘불교적인 것’이 될 수 있을지언정 ‘불교’는 아니다는 신 교수님의 단정은, 마치 해외에서 외국인들이 스님을 모시지 못 하고 스스로 결사하고 있는 것을 ‘불교’가 아니라고 내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 지나친 세분화는 분류가 가져오는 논리적 덕성이 아닌 기계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불교’와 ‘불교 아닌 것’은 분류될 수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대승교단에 속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삼법인이며, ‘불교적인 것’이 이 삼법인을 받든다면 이미 ‘불교’라 할 것이다.

넷째, 불자를 출가와 재가로 나누어 등급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 재가불자 누구라도 출가자를 받드는 마음은 바탕으로부터 간곡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승기신론’을 전거로 하여 재가자를 부정취라 하면서 2등급이라고 등급화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신 교수님 방식의 등급보다는 ‘대지도론’의 하품(자신의 구제를 위해 선법을 행하는 자)과 중품(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생각을 하는 자)과 상품(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 선법을 행하는 자)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제바라의 ‘대장부론’의 등급론도 유사하다. 제바라는 복덕을 지을 뿐 지혜와 자비가 없는 이를 장부라 하고, 복덕과 지혜가 있는 이를 선장부라 하며, 복덕과 자비와 지혜를 다 구족한 이를 대장부라 하였다. 티벳불교의 주요경전인 ‘보리도차제론’에도 하사도와 중사도와 상사도가 있다고 분류하고 있다. 이것도 수행의 정도에 따라 나눈 것이지 신분에 따른 것이 아니다.

불자 등급 나눈 것은 그야말로 ‘전도몽상’

이러한 등급은 자신의 신구의(身口意) 삼밀작용에 따른 것이지 결코 출가나 재가라는 불자형식에 따른 것은 아니다. 지눌 스님이 명쾌하게 말씀하셨듯이, 그 사람의 성품은 작용에 있는 것이다(性在作用). 그런데도 불자형식에 따라 등급을 말한 것은 본(本)은 보지 못 하고 말(末)로써 본을 말한 그야말로 전도이고 몽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유마경’과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직심과 심심과 보리심(; 대비심)이 관건이라고 본다. 불자가 직심[勇]과 심심[智]과 보리심[悲]으로 신행할 때, 비로소 육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유마경’이 보살의 정토를 말함에 있어 이 삼심을 말한 연후에 육바라밀을 언급하고 있음이 이를 말해 준다. 직심과 심심과 보리심이 없는 불자가 불공과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공덕을 지을 수 있기는커녕 악도에 빠지는 경우를 흔히 본다.

범불교도대회를 열어야 하는 이 땅 불교상황 속에서도 뉴라이트를 칭하는 일군의 불자들은 직심이 없이 상황을 오도하면서 중앙일간지 광고까지 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불도를 닦는다고 하면서 보살의 길과는 천 리 만 리 먼 삼독의 길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부지런히 가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묻게 된다. 이들이 하품의 길도 가지 못 함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신 교수님이 말하는 출가자인가 재가자인가로 구분되는 등급의 높낮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재가자라도 상품의 길을 갈 수 있으며, 출자가라도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형상을 우리는 적지 않게 보아왔다.

다섯째, 승보와 승단의 의미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신 교수님은 승보를 삼보 중의 하나를 일컫는 것으로, 승단은 승가에 준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승단의 범주에 들어가되 승보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 하는 경우, 승보의 범주에 들어가되 승단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 하는 경우, 승단의 범주에 들어가는 동시에 승보의 범주에 들어가는 경우 등으로 삼분하고 있다. 대체 이런 분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고자 한다. 더구나 두 번째 경우는 재가불자들도 깨닫는 한 승보로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출자가라야 정정취로서 성불할 수 있다는 신 교수님의 주장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깨달은 이를 승보로 하고, 승단과 관련해서는 재가불자는 속하지 못 한다는 뜻으로 분류하고 있다. 승보의 개념도 잘못되었고, 승단의 개념도 잘못되었다. 심각한 잘못이라고 보아진다.

승보의 개념도 승단의 개념도 잘못됐다

고대 인도에서 승가라 함은 세 가지 의미가 있었다. ‘공화국’의 의미와 함께 ‘길드적 상호부조적 공동체’의 의미를 차용한 ‘불교교단 또는 단체’를 말한다. 화합중(和合衆)으로서 공동체적 불교교단 또는 단체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출가자의 집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삼보 중 승보가 거룩한 화합중을 의미하지 스님만을 국한적으로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통한다. 그런데 승가를 편협하게 이해한 나머지 재가중(在家衆)과 대칭적으로 이해한 것은 유감이다. 승가는 자발적 가입, 가입 후 평등, 전체의사에 따른 운영 등을 그 성격으로 한다. 이 성격에 부합되면 승가이다.

재가자들은 출가자의 지도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출가자의 지도를 받지 않고 출석사찰에서 출가자가 주관하는 법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불자가 아니라는 독단을 형식주의와 교조주의로 거부하는 것이다. 대승교단의 보살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이를 말한다. 육바라밀은 자리와 이타의 동시실천임은 말할 것도 없다(‘보행왕정론’ 등 참조). 보살의 길을 전형적으로 일러주고 있는 ‘입보리행론’은 육바라밀의 실천에 관한 논이다. 재가불자들은 결코 루터식 ‘만인사제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리이타의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서 보살의 길을 가는 이를 신(身)출가자를 넘어선 심(心)출가자라 부르는 것이다.

스스로 왜곡돼 버린 ‘인지왜곡’ 아니길

이렇게 다섯 가지를 거칠게나마 문제제기해 놓는다. 그러면서도 신 교수님의 주장 중 재가불자들이 출석사찰이 있어야 하고, 법회에 부지런히 참석해야 하며, 계율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불자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여서가 아니라, 한국불교의 흥왕을 위해 불자라면 누구나 신해행증과 직결된 정진을 하여야 하기에 그러하다.
인지심리학에 ‘인지왜곡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벡(A. T. Beck)은 ‘자동적 사고(automatic thinking)’를, 엘리스(A. Ellis)는 ‘자기언어(self-talk)’을 인지왜곡의 특징으로 지적 하였다.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사고하거나 자기언어로써 스스로 왜곡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현상의 진실을 파악할 인지적 균형은 얇은 귀와 얇은 마음 때문에 이미 잃는 경향이 강하다. 혹여 신 교수님은 무엇에 마음과 귀가 얇아진 나머지 재가불자는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자동적 사고와 자기언어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디 인지왜곡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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