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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김호성 교수, 박재현 교수 주장 반박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8.09.27 12:47
  • 댓글 0

“인도불교 성악설은 어불성설”

박재현 서울불교대학원대학 교수가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주최로 지난 9월 19일 열린 간화선 세미나에서 “인도불교는 성악설”이라고 주장한 가운데 김호성〈사진〉 동국대 교수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조계종 교육원이 주최한 제7차 조계종 간화선 세미나에서 박재현 교수는 “화두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중에 “인도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다. 자료집을 보니 월암스님과 전재강 교수님의 훌륭한 논평이 게재되어 있었다. 다른 이야기는 이미 두 분께서 충분히 하셨고, 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다. 다만 나는 인도철학과 불교를 함께 공부하는 입장이므로, 인도적 사유전통에 대한 박교수의 오해만을 바로잡고자 한다. 세미나 현장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비례(非禮)에 대한 이해를 구하면서, 박교수의 재고를 바란다.

문제의 부분은 제7차 간화선 세미나의 자료집 2∼3쪽에 걸쳐서 제시되는 세 문단이다. 그 첫 번째 문단은 다음과 같다 : “인도적 사유전통에서 인간은 오직 윤회전생하는 무명(無明)중생일 뿐이다. 억겁의 윤회과정에서 어떤 방법으로 해탈하고 열반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갈라지지만, 인간이 본래 미혹한 무명의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참담한 존재론적 상황을 중국어법으로 표현하면 성악(性惡)이다. 악을 단순히 윤리도덕적 가치개념에 한정하지 않고 범위를 좀 넓게 잡아 인간 심성의 선천적 문제상황을 가리키는 정도로 확대해서 해석한다면, 불교를 포함하는 인도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악’의 개념 확대 해석은 오류

그러나, 박교수가 ‘악’이라는 개념을 확대해석하려고 하는 시도를 긍정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왜냐하면, 인도적 사유전통에서 인간은 윤회전생하는 무명중생이기 전에 스스로 해탈을 구현하는 존재이다. 스스로 해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한편으로는 무명을 가진 존재라고 보아서 윤회를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해탈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양면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관점 중에서 어느 것을 더 근본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해탈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를 보다 근본으로 말한다.

인도적 사유전통의 기본적 텍스트로 말해지는 ‘우파니샤드’만 보자. “나는 브라만이다.”, “그것(브라만 - 인용자)은 바로 너다”, 이런 말들이 수도 없이 나온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변주되고 있다.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인간관이 불교에서는 “나는 부처다”라는 인간관으로 변용된다고 나는 본다. 그러니까, 박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본래 미혹한 무명의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미혹한 무명의 상태는 본래 브라만과 같은 존재에서, 혹은 붓다와 같은 존재로부터 일탈한 이상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명이니 악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속(性)의 차원이 아니라 겉(相)의 차원에서일 뿐이다.

무명 강조는 ‘성선설’ 위한 것

그러한 입장을 극단적으로 내세운 사람이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베단타 철학을 완성한 샹카라이다. 인간과 신은 동일성만 있지 차이성이 없다고, 그러한 동일성을 알기만 하면 그것이 곧 해탈이다. 또 그러한 해탈은 당연히 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박교수가 1쪽에서 “고대 인도인들에게 세상은 마야이고 꿈이었으며, 벗어나거나 뿌리쳐야 할 미망이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샹카라가 무명에 대해서 한 말이다. 바로 그러한 언급은 성악설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성선설을 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물론 베단타 학파라고 해도 샹카라같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라마누자는 한정적(限定的)불이일원론을 주장했는데, 그는 인간과 신 사이에는 동일성도 있는 반면에 차별성도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인간의 이중구조를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라마누자까지만 하더라도, 박교수가 생각하는 성악설이라 보기는 어렵게 된다. 가장 극단적으로 인간과 신 사이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이원론의 베단타를 주장한 마드바 같은 사람이 있지만, 이 설은 인도에서 가장 늦게 출현하고 가장 세력이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니, “내가 부처다”라고 생각하고, 붓다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 불교를 포함하지 않더라도, 인도의 인간관이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여래장과 불성사상 자체가 인도에서부터 설해지던 사상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어지는 두 문단에서 살아남을 문장은 하나도 없게 된다. 전면적인 재인식과 수정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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