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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고요를 탐해 화두를 놓치지 말라

지견으로 열린 눈 깨달음 착각 안 돼
도리-분별로 알려말고 간단없는 의심 지속해야

 

화두 안 들릴 땐 놓고 참회 통해 재 발심
무작정 깨달음 서두르면 퇴굴심 생겨 위험천만

 
현산 스님은 불자들이 꼭 주의해야 할 하나로 화두를 깨치려는 의지는 굳건히 하되 서두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신심을 내어 한 1·2년 하다가 타성일편은 고사하고 의심 하나 이어가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불자가 너무 많다”며 “화두 하나 잡고 긴 여정을 떠나보면 언젠간 길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리산 화엄사는 인도에서 온 연기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당시 이 산은 백두산의 정기가 모여 이뤄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연기 스님은 대중들에게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했다”며 “이 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없으니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연기 스님 자신이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지독송해 왔고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화엄사(華嚴寺)라고 하는 게 좋겠다고 피력함에 따라 ‘지리산 화엄사’가 되었다고 한다.

연화장 세계가 펼쳐진 지리산 화엄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참배하고 싶은 전각이 각황전일 것이다. 각황전 왼쪽으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한 4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으로 오르는 108계단이 오솔길을 따라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다. 청량한 가을 정취에 잠시 취해서일까! 동헌 스님의 오도송이라 전해지는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지리산은 말이 없고(無言智異山)
칠불도 말이 없네.(無設亦七佛)
이것이 무엇이냐 물을 것도 없으니(無問是甚摩)
무심이라야 백운과 함께 하리라.(無心親白雲)

법계·십현 연기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을 담은 ‘화엄’도 ‘무심’이 아니면 그 행간 의미를 관통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연기법을 명확히 꿰뚫어야만 무심해 질 수 있는 것일까!

4사자삼층석탑 왼쪽으로 작은 문이 보인다. ‘성적문’(惺寂門)이다. 선가에서 그토록 강조하고 강조하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을 이르는 말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야 성성적적할 수 있다 하는데 그 시작은 ‘의심’에서 비롯된다. 어떤 의심일까? 분명 ‘여우같은 의심’은 아니라 했는데 화두를 참구하는데 있어 그 의심이란 무엇일까.
성적문 안 ‘견성당’에 주석하며 눈 푸른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는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에게 여쭤보았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의심이 안 날 수 있습니까?”
지수화풍 4대로 이뤄진 이 몸뚱이도 언젠가는 흩어지고 마는 것인데 그 전에 나를 제대로 보고 있느냐 하는 물음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의문으로 발심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두를 드는 순간 그러한 의문은 내려놓고 의심을 가져야 합니다. 1700공안을 ‘이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평생가도 깨달음은 요원합니다. ‘간화’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대혜 스님은 알음알이 즉, 지견(知見)으로 열린 눈을 깨달음이라 이름하고 안주하는 것을 경계했다.
“유무의 상대적 의식으로 알려 하거나, 도리로 알려 하거나, 의식으로 분별해서는 안 된다. 문자 가운데서 그 증거를 찾으려 해서도 안 되니 행주좌와(行住坐臥) 일상 가운데 화두를 들고 참구하라.”

사실, 이해하는 것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면벽수행은 뒤로하고 선어록만을 분석할 일이다. 간화(看話)란 ‘화두를 본다’는 말이다. 다만 ‘본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심하라는 말은 간절한 생각을 바탕으로 마음을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화두를 보라는 것이고, 의심하라는 것이고, 참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뭣고는 ‘회광반조’(廻光返照)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고 물으니 앞 이빨에 털이 났다(板齒生毛)하는데 이는 ‘어째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렇듯 어째서 털이 났다고 했을까? 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했다가 없다고 했을까? 왜 부처를 마른 똥막대기라 했을까? 이러한 의심을 말합니다. 이 의심의 강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소식도 달리 옵니다.”

성적(惺寂)이 선의 바른 길

‘큰 의심을 가져야 크게 깨닫고(大疑大悟),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닫고(小疑小悟),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無疑無悟) 했다.

“만 가지 의심이 마침내 하나로 모이면 의단(疑團)이 형성됩니다. 바로 그러한 의단이 끊이지 않고 올곧이 홀로 성성적적하게 자리 잡았을 때를 ‘의단독로’(疑團獨露)라 합니다. 의단독로에 이르러 성성적적한 가운데 화두삼매가 이뤄지면 분명 소식이 있습니다.”

현산 스님은 삼라만상이 한 조각 의단과 하나가 되어 오로지 화두, 의단 하나밖에 없는 상태를 타성일편이라 했다. 『선요』에서는 타성일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되고,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져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니 털끝만치도 틈이 없다.”
몸과 마음이 온통 의심 덩어리 하나뿐이므로 삼라만상이 하나가 되고 온 세계가 하나로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것이 있다. 현산 스님은 “성적이 화두의 정로(正路)”라 했다. 적적이란 일체 번뇌망상을 없앤 고요한 상태를 말하며, 성성은 의정이 한결같이 지속되어 화두가 생생하게 깨어있는 것을 말한다.

“수행 중 고요한 맛에 도취해 안주하려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고요함 하나 갖는 것만도 큰 성과라 여기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나 그 고요도 깨끗한 고요함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고요함 속에서도 화두 또한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망념이 일지 않고, 경계에도 끄달림이 없습니다. 고요함 속에 젖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무기(無記)입니다. 무기에 한 번 빠져버리면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무기 속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한없이 좋다고 느껴지니, 또 다시 그 무기 속에 빠져 보려 가부좌를 틀거든요. 성성하면서 적적하고, 적적하면서 성성해야 선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혼침과, 산란함, 무기는 선 수행인들이 극복해야 할 3대 병이다. 혼침과 산람함을 어느 정도 이겨냈다 해도 적적 속에서 화두를 놓치면 무기에 빠져 버리고 마는데 이는 일반 재가수행인 뿐 아니라 승가에서도 곧 잘 보이는 현상 중 하나라 한다. 그만큼 무기의 유혹은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심이 끊이지 않아 의단독로하고 성성적적 하는 경계라면 『선요』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치 물을 따라 흘러가는 배’(如順水流舟)와 같아 ‘전혀 손을 쓸 필요가 없는 바로 이 때가 힘을 얻는 시절’(全不犯手 只此便是得 力底時節也)일 것이다.
그러나 화두를 들고 있으면 온갖 번뇌망상이 밀려오고, 혹 잠시 잘 들렸다가도 이내 놓치고 마는 것이 범부의 일이다. 타성일편, 의단독로, 성성적적은 마치 신기루처럼 여겨지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게 우리 아닌가.
“밀려오는 번뇌망상을 애써 못 오게 하지 마세요. 하나 없애봐야 또 하나 밀려오는데 그 수많은 번뇌를 어찌 다 감당하려 합니까! 번뇌망상도 있으니 깨달음도 있습니다. 일어나는 번뇌망상은 내버려 두고, 일념으로 화두 드는 것에 집중해서 들고 있는 화두를 용광로로 만들어 버리세요. 불화산 같은 용광로에 눈 몇 점이 떨어진들 그 용광로가 식겠습니까?”

현산 스님은 번뇌망상 마저도 내버려 두려는 노력을 함에도 진전이 없을 때는 참회를 해보라고 권했다.
“참회는 업장을 녹이는데도 첩경이지만 새로운 힘을 비축하는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잘 들려지지 않는 화두를 억지로 들려 하면 자칫 상기가 되어 선병에 걸려들 수도 있습니다. 이 때는 화두를 잠시 내려놓고 자신이 돌아온 길을 다시 한 번 보고, 진정 내가 깨치려는 마음을 다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선법문에서 그토록 들었던 ‘간절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에는 간절 절(切)자 하나면 된다는 일성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하지만 우리는 한 귀로 듣고 흘렸을 뿐 정말 그 한마디에 내 모든 것을 바쳐본 적이 있는가!
“사막 한 가운데서 물을 찾듯 간절하게 들어보세요. 고양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쥐를 잡듯이, 굶주린 사람이 밥을 생각하듯이, 어린 아이가 엄마 생각하는 그러한 간절함으로 화두를 들라고 역대 선지식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화두를 깨치려는 염원이 충만해 있지 않은데 그 어느 선지식이 와서 부숴주겠습니까! ‘줄탁동시’도 알 안에서 깨려는 노력이 있어야 이뤄지는 것 아닙니까!”

크게 의심해야 크게 깨달아

현산 스님은 불자들이 꼭 주의해야 할 하나를 전해 주었다. 화두를 깨치려는 의지는 굳건히 하되 서두르지는 말라는 것이다. 신심을 내어 한 1·2년 하다가 타성일편은 고사하고 의심 하나 이어가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는 불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가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는 성적문(惺寂門). 성성적적(惺惺寂寂)의 말을 빌어 이름 붙여졌다.

“참선만 포기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불자임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두 드는 것은 고사하고 부처님께 예배 올리는 것도 싫어하고, 도반과 법담 나누는 것조차 귀찮아합니다. 정진하려는 마음을 싹 접어 버리는 이것을 퇴굴심(退屈心)이라 합니다.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낸 후 증오심이 생기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용맹정진 하시는 불자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한 철을 마치고 아직도 ‘왜 난 이 모양인가’ 하고 원통해 하며 새로운 분발심을 내야지, ‘왜 난 이 모양인가’ 하고는 ‘관둬버리자’하면 그 용맹정진은 약이 아니라 독입니다. 그러나 겁내지 마세요. 가슴 가득히 용기를 품으세요. 화두 하나 잡고 긴 여정을 떠나보세요. 길이 보일 겁니다.”

견성당 벽에 걸린 경허 스님의 선시 한 수가 보인다.
천지는 이렇게 넓은데(天地如是廣)
이리 산다는 것은 가소롭구나(此生可笑乎)
반평생 벌써 지나갔으니(半生已過了)
남은 해는 얼마나 될까(餘年復幾餘)
근심걱정에 늘 시달리고(憂愁長侵汨)
편안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幾時得安居)
취한 듯 깨지 못하니(如醉不覺悟)
공연히 주저만 하네.(空然得躊躇)
만공 스님은 “된장 맛이 짠 줄 안다면 모두 참선할 수 있다”했다. 경허 스님도 지금 주저 말고 과감하게 이 일대사에 뛰어 들어 보라고 경책하고 있다. 용맹심을 내어 볼 일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현산 스님은
1943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1961년 19살 때 화엄사 조실 도천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4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97년부터 화엄사 선등선원 선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후학양성에 진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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