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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가 강순형의 미륵사탑 사리구 깊이보기]3. 언제, 누가, 왜 차렸나

기자명 법보신문

왕을 ‘폐하’로 지칭…중국과 대등한 외교관 엿보여

 
얇은 금판 앞면에는 11줄에 99자를 새긴 속에 벽사용으로 붉은 칠을 집어넣은 사리봉안기. 왕궁에 태어난 부처님이 사리 8섬을 남겼다는 글과 백제왕후-정승 딸이 정재를 희사하여 절 세울 사리를 봉영했다는 구절이 보인다.


 3. 언제, 누가, 왜 차렸나

돌탑인 미륵사 서탑의 사리차림에는 한자로 글월漢文이 새겨진刻書·書刻 금종이金紙 명문판金板까지 갖추어져 놀라게 만들었다. 더구나, 작은(金板,15.5×10.5×0.1㎝) 금종이에 무려 193자(앞면-11줄에 9자씩의 99자, 뒷면-같은 11줄에 9자 중심의 94자)나 적혀, 언제·누가·왜, 절을 짓고 사리(탑)를 모셨는지 제대로 알려 주고 있다.

이는 그동안 나온 백제의, 부여 능사陵寺 돌사리감실 얼굴에 그냥 새긴 2줄 20자(567, 위덕왕14)와 부여 왕흥사王興寺 놋사리원통합 거죽에 그냥 새겨진 6줄 5자의 29자(577, 위덕왕24)뿐인 것과는 그야말로 다른 것이다.

 
붉은 칠을 넣지 않은 94자의 글이 새겨진 뒷면의 봉안문. 사리봉영 공덕으로 대왕폐하의 장수와 홍법, 선정 및 왕후의 복덕구종과 모두 성불도를 이루길 바라는 발원문을 새겼다. 

이 금종이쪽은 사리차림 남쪽의 위쪽에, 글자마다 붉은 칠朱漆을 넣은 앞면이 보이게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뒷면의 글씨에는 칠을 넣지 않아 궁금증 인다. 왼쪽서 나아가는, 깔끔端正·端整한 세로 해서체로 필력과 서각書刻 솜씨가 돋보이며 또렷하여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다.

 
부여 중부지방을 다스리는 덕솔벼슬이 사리봉영에 동참하여 금 1매를 시주했다는 내용 등이 새겨진 금판쪽.

(앞면)
竊以, 法王出世, 隨機赴

삼가, 부처님法王께서 이승에 나심이, 근기根機에 따라
感應物 現身 如水中月.
감응한 몸 나투시니, 마치 물 속의 달 같음이라.
是以 託生王宮, 示滅雙
곧, (석가모니)부처님은 왕궁에 태어나셔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시어
樹, 遺形八斛, 利益三千.
8섬이나 되는 사리를 내어 3천 대천세계를 이롭게 하시네.
遂使 光曜五色, 行
이 오색빛 나는 사리를 7번이나 오른쪽으로 돌며繞匝모시니
遍, 神通變化 不可思議.
그 신통변화와 불가사의함이여!
我 百濟王后 佐平沙
우리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 따님께선
積德女, 種善因 於曠劫
영겁 세월에 쌓은 공덕善因으로 이승에 좋은 과보를 받으사
受勝報 於今生, 撫育萬
만민을 어루만지심에,
民 棟梁三寶. 故 能謹捨
삼보의 동량이시라.
淨財 造立伽藍, 以己亥
하여,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사,

(뒷면)
年正月 卄九日, 奉迎舍利.
기해년(639) 1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도다.
願使 世世供養 劫劫無
바라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겁겁토록 다할
盡用, 此善根仰資, 大王
이 선근을 양식으로 하여
陛下, 年壽與山岳 齊固
대왕폐하의 목숨은 산악처럼 튼튼하고
寶曆共 天地同久, 上弘
치세는 하늘땅같이 영구하시사,
正法 下化蒼生. 又願 王
위로는 불법을 두루 펴시고 아래론 창생을 교화하소서.
后, 卽身心 同水鏡照, 法
또한 원하옵나니, 왕후의 신심은 비추는 거울水鏡같이
界而恒明, 身若金剛 等
법계를 항상 밝히시며, 금강과 허공같은 몸은
虛空 而不滅, 七世久遠
불멸하시어, 영원七世久遠토록
蒙福利, 凡是有心
함께 복 받으사, 모든 중생들
俱成佛道
불도를 다 이루게 하소서.

사리를 639(무왕40)년 1월 29일에 받들어 맞이하다

유행해 내려오던, 4자나 6글자 중심인 4·6병려체문을 지니므로 부드럽게韻文化 옮겨보았다. 한마디로,

「잘 쌓은 공덕으로, 이승에 더구나 왕궁 태어난 부처님이 남긴 신령神靈·神異한 사리를, 역시 오랜 공덕을 쌓아 태어난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 따님이 정재를 희사하여 절을 짓는 사리로 639(무왕40)년 1월 29일에 받들어 맞이하여(돌탑에 넣어) 모셨다.

이 공덕으로, 대왕폐하의 장수와 홍법·교화弘法敎化와 선정善政을 바라고 나아가, 왕후의 영원한 복덕구족福德具足으로 다함께 성불成佛을 이루자」는 내용인 것이다.
곧, 언제?=639. 1. 29에, 누가?=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 따님이, 무엇을?=사리를 모셔, 왜?=왕과 비의 장수와 복덕 그리고 홍법과 모두의 성불들을 위함이 또렷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다.

639해라는 연대는, 절을 이루기 위하여 탑을 세우는 때-이를 보통 「타찰打刹」하는 때라 한다.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인수仁壽 때(601-604)에 100탑을 세울 때 나타난 용어다-로 보아야한다. 나아가 이는, 탑을 완성한 때가 아니라, 세우기 위하여 탑자리의 사리홈에 사리를 모셔 넣는 때로 보는 것도 큰 무리가 없다 여긴다.

더불어, 금종이 밑에 놓여 어지러이 포개지고 흩어진 18점이나 되는, 좁고 길며 얇게 편 금조각(金片, 8×1.5㎝)들에 또한, 이 불사에 동참하여 공양한 상급 벼슬아치들도 새겨져線刻 있어 살펴진다.

 
명문의 앞면과 뒷면의 실측도.

곧, 「中部 德率支栗(?) 施金壹枚」-중부의 덕솔 벼슬인 지율이 금 1매 시주, 및 「中部 非(?)夫 及 父母妻子」-중부의 비피부와 부모처자, 그밖에 하부「下部」나 동포 시「同布 施」 들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백제는 행정(지역)을 상·중·하·전·후의 5부部(지방은 5방方)로 나누고 그 밑에 저마다 또 10군을 두며, 이들을 달솔達率이나 덕솔德率 벼슬아치가 다스렸다. 덕솔은 16등급 가운데 4급이고 달솔은 2급 벼슬. 사리 공양자로서는 처음 나오며, 이들까지도 함께 동참된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들 금조각과 함께, 좁고 얇은 은판을 굽혀붙여 꽃가지꼴로 오려만든 은꽃관치레銀花冠飾도 2점이 같이 나왔다. 달솔과 덕솔들을 비롯해 벼슬아치 모두가 은꽃관을 쓴다고 알려진데다, 꽃봉오리가 1단과 2단짜리 은꽃관이 공양되어 있어 또 다른 급수의 벼슬아치 동참도 알려주는 것!

시주자는 최고의 정승 가계-사택씨沙宅氏

명문의 「百濟王后 佐平 沙積德 女 種善」을 선화善化왕비와 관련하여, 왕후와 좌평의 사택적덕 녀를 따로 볼 것인지 나아가, 종선種善을 사택적덕 녀의 이름으로 볼 것인지는 나중회에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어쨌거나 좌평佐平 곧 최고직인 1품 정승벼슬을 한 높은 벼슬아치인 사택적덕의 가계家系가 시주자로 나와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아다시피, 사택沙乇·沙宅·砂宅·沙씨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많이 나오고 있는 사씨沙(宅)氏·연씨燕氏·해씨解氏·진씨眞氏·목씨木氏를 비롯한 8대성國中大姓八族 귀족 성씨의 하나다. 같은 4·6병려체문인, 이름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654, 의자왕 14,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듯, 초기부터 말까지 힘 부린 집안이 미륵사 서탑을 세우는 주 시주자인 것이다.

이로써, 절과 탑 그리고 사리를 통한, 왕실과 귀족 및 상급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동참·공양한 밑자리-배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미륵사는 『삼국유사』(「무왕」)에 나오듯, 백제 무왕(600-641)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의 결실이며, 미륵사탑은 학자들이 모두 7세기 전반기로 보고있어 「己亥年」은 639해 곧, 무왕40해가 된다.

 
백제의 벼슬아치들이 머리에 꽂았다는 은꽃의 관 장식도 사리공양구로 함께 나왔다.

천도설까지 있는 같은 곳·같은 때의, 무왕이 함께한 제석사와 왕궁사 경영이나 더구나 이때에, 왕비를 「(百濟)王后」라하고 임금도 황제격인 「大王陛下」라 새겨놓은 것은, 중국을 벗어나 꿀리지 않으려는 속내를 짚을 수 있으며 나아가, 중국처럼 통치자로서 인기와 민심 안정·정신적 통일과 규합·대의명분·자격 부여받음… 따위들의 정치적 힘의 확보 의도와 그 성공을 노리는 구심점으로 삼은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명문에 보이는 「善因·蒼生·撫育萬民」하는 것도 중국 인수仁壽(601-604)의 사리봉안글에 늘 나오는 낱말임에서도 그러하다. 더불어, 새겨진 글씨체와 사리그릇에서 621(무왕22)해부터 늘 당나라와 관계를 가진 영향이 보이고 있다. 639해는 현장법사(玄奘, 602-664)가 인도로 간지 10해나 지난 해이기도 하다.

한편 명문에 보이는, 글머리로 처음 나오는 「절이竊以∼」란 말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나타난 자료여서 눈길 끄는 것이다. 이사(李斯, ?∼BCE208)가 진시황에게 올린 「간축객서諫逐客書」란 이름난 상소에서 처음 보이듯, 윗분에게 드리는 말씀을 조심스레 꺼낼 때 써는 낱말이다. 절집에서는 소동파(蘇東坡, 1036-1101) 누이 소소매蘇小妹가 지었다는 「관음예문觀音禮文」의 예가 이름나 있다. 「가만히·곰곰이 생각건대」들로 옮기기 보담, 「간절히·절절切切히·節節이∼」가 낫겠고 그보담, 「삼가∼」가 완벽하리라.
 
강순형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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