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지성] 8. 휘트먼-최희섭 전주대 교수
[불교와 지성] 8. 휘트먼-최희섭 전주대 교수
  • 법보신문
  • 승인 2009.04.1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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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로운 詩통해 불성 노래했던 위대한 시인
자연·하늘·고통  조정하는 주인은  나
“무오염과 고독 통해서 영성 발현” 주장
시 마다 불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 담아

1918년 롱 아일랜드서 탄생

휘트먼(Walt Whitman)은 1819년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892년에 사망한 미국시인으로 『풀잎』이라는 시집을 1855년에 처음 발표하고 이후 이 시집을 계속하여 수정 증보하여 발표했다. 가장 미국적인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휘트먼의 사상적 형성 배경은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휘트먼 스스로 밝힌 바가 없기 때문에 학자들에 따라 영국의 낭만주의나 유럽 철학자 칸트(Kant)에게서 그 원천을 찾는 경우도 있고, 에머슨(Emerson)과 쏘로우(Thoreau) 등의 초절주의자에게서 그 기반을 찾는 경우도 있으며 동양 사상에서 그 원류를 찾는 경우도 있다.
휘트먼은 자신의 창작 목적을 밝히는 산문에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문학이 그것이라고 강변한다.

또한 그는 시에서 동서고금의 여러 신들을 열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의 노래’에는 크로노스, 오시리스, 아이시스, 벨루스, 마니토, 멕시틀리, 브라마, 오딘, 붓다, 알라 등등의 여러 신들이 거명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작품 속에 신화와 전설을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까지 포함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가 동서고금의 여러 종교 및 사상을 포용하려 한 것은 불교의 통섭정신과 일맥상통한다. 휘트먼이 활동하던 시기에 미국에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사상이 상당히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특히 『풀잎』이 생성되고 있던 시기에, 뉴잉글랜드 지방에는 힌두교의 종교적 개념들이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으며 그 당시의 영미의 잡지들은 베단타 철학의 자료들을 많이 실었다. 이는 휘트먼이 동양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다. 휘트먼 자신이 동양사상을 전혀 모른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와 그의 성향을 볼 때, 동양 사상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접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는 『풀잎』을 발표할 때까지 잠시 교편을 잡은 것 이외에는 인쇄업에 종사하거나 신문이나 잡지 편집 및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일을 했다. 이 시집이 나온 후에도 그는 한동안 신문 편집을 계속하고, 자유 기고가로 활동했다. 그의 직업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그는 독서열이 매우 강했고, 상당히 많은 양의 독서를 했다. 1889년에 출간한 『여행한 길을 뒤돌아보기』에서 그는 고대 힌두교의 시편들을 읽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양 사상을 어느 정도는 흡수했을 것이다.

평생 동안 휘트먼을 연구한 김영호도 휘트먼이 유럽의 형이상학 철학 및 힌두교와 불교를 포함한 동양의 신비주의의 다양한 요소들에 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휘트먼이 실제로는 불교도가 아니었으나, 불교를 알고 존중했으며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절주의의 요소, 특히 휘트먼의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되는, 에머슨과 쏘로우의 글에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에머슨과 쏘로우의 글에 불교를 포함한 동양 사상이 녹아들어 있고, 휘트먼은 이들의 사도였으므로 그들의 글을 통해 불교를 배운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휘트먼은 1872년에 발표한 『자유로이 날고 있는 강한 새로써』에 붙인 서문에서 『풀잎』 초판이 출간되기 이전부터 자신이 작품을 쓰는 목적이 종교적인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종교는 모든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자연과 합치되는 종교이다. 그것은 교회로 대변되는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종교들과도 다른 새로운 것이다. 그는 동양의 종교가 맹목적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고 말하며 동양의 옛 신학은 일견 논리적이지 않고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논리적 사고에 익숙해 있는 서구인의 눈으로 볼 때 논리적이지 않은 것은 더불어 죽어 없어질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는 동양의 옛 신학이 곧 없어질 것이라고 하면서도 건전한 종교적 씨앗이 필요하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서구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기독교가 그 종교적 씨앗이 될 수 없다면, 그 씨앗은 동양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휘트먼은 『풀잎』 서문에서 “마치 여러 세대에 걸쳐 뒷걸음쳐 동양의 기록들로 가는 것이 필요하듯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 말을 다소 만족스럽지 못한 어투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이후에 필요한 것은 기독교의 변화가 아니라 동양 사상, 동양 종교의 합리적 수용 및 미국화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노력에서 불교를 포함한 동양 사상을 『풀잎』에 담았다.

에머슨과 쏘로우 정신적 스승

휘트먼은 육체적 삶을 노래하는 것보다는 영혼의 삶, 영혼의 궁극적 구원을 노래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소재, 주제로 삼고, 영혼을 노래하므로, 자신의 내면으로 탐구해 들어가는 방향을 취한다. 그것은 자신의 외부에 신이라는 절대자를 상정해 놓고 모든 것을 그 절대자에게로 지향하게 하는 기독교와는 양립할 수 없다. 불교는 있는 현상 그대로를 인정하며 자신의 내면에서 정체성을 찾는다. 그것을 불성이라고 하든, 아니면 서양 철학에서 이야기하듯 실재라고 하든 상관없다. 휘트먼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함으로써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불성을 탐구한 것이다.

휘트먼은 『풀잎』의 서문에서 “당신은 세상에 단 하나의 신만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무수한 신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주권을 의식함으로써만 선해지고 당당해질 수 있다…내가 여기서 주인이며 도처에서 하늘의 발작을 조종하는 지배자이며, 자연과 정열과 죽음, 그리고 모든 공포와 고통을 조종하는 자의 파편의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권”이나 “주인”, “지배자”는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영혼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이다. 시인은 또한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므로, 이 실체는 그 무수한 신들, 또는 그 신들 중의 어느 하나와 관련이 있다.

힌두·불교 등 동양의 지식 습득

이러한 휘트먼의 생각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지혜를 얻기 위해 끈질기고 섬세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인간은 심지어 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석가모니(고타마 싯달타)는 설파했다. 부처로 추앙되는 석가모니도 선각자인 한 인간이었으며, 해탈한 후에야 비로소 신보다 더 높은 존재인 부처가 되었다.

불교도들이 노력하는 바는 이 세상에서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는 무수한 부처가 있음을 긍정한다. 이는 불가에서 가장 많이 암송되는 경전 중의 하나인 『천수경』을 읽어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이 경전에서 열두 부처의 이름이 열거되고, 이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부처가 있다. 이러한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이 세상에 “무수한 신이 있을 수 있다”고 휘트먼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주권을 의식함으로써만 선해지고 당당해질 수 있다”라는 말도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신의 주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생물이 지니고 있는 자아를 가리킴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휘트먼은 모든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자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밝힌다. 이 자아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육체적 자아가 아니다.

모든 인간 및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본래적 자아이다. 이 말은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내지 요소인 불성이 있다는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대반열반경』의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법화경』에도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여래의 씨앗을 지니고 있으며, 이 생명의 가능성의 인자를 불성, 여래장이라고 한다고 하여 모든 생명체에 불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모든 인간과 사물이 지니고 있는, 신이 될 수 있는 속성, 그 씨앗을 불교에서는 통상 불성이라고 부른다. 휘트먼은 이 세상에 무수한 신이 있을 수 있고, 그 씨앗은 ‘주권’, ‘주인’, ‘지배자’라고 칭함으로써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개념을 표현했다. 부처와 보통 사람과의 차이점은 부처는 자신의 불성을 깨닫고 그것을 발현시킨 존재임에 반하여 보통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불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충분히 발현시키지 못한 존재이다.

휘트먼은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인간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의식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휘트먼은 불교의 수행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종교의 성숙함은 개인이라는 영역에서 찾아져야함이 분명하고, 어떤 조직이나 교회가 달성할 수 없는 결과”이고, “개인의 완전한 무오염(無汚染)과 고독에서만 종교의 영성(靈性)이 긍정적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성을 얻는 방법으로 명상, 경건한 황홀, 솟아오르는 비상을 제시한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성숙함을 찾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신성, 불성을 찾는 것이다.

다양한 신 인정하며 유일신 부정

휘트먼이 제시하는 수행 방법은 불교의 수행 방법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수행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자신이 남과 다르지 않고, 자신이 우주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록 휘트먼이 자신의 작품에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불교 사상을 표현한 것은 분명하다.
전주대 최희섭 교수


최희섭 교수는
고려대 영문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전주대 인문학과 교수,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고문, 한국번역학회 총무, 대한영어영문학회 편집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최 교수는 또 이에 앞서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 회장, 한국현대영미시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예이츠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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