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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서 달을 보다]벽송선원장 한산 월암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수행 않고 돈점에만 치우치면 구두선”

경남 함양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벽송사는 예로부터 선교겸수 대 종장 108명이 배출됐다 하여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 일컬어졌다. 행화(行化)란 수행(修行)과 교화(敎化)를 두루 행했다는 말이다. 무자화두로 무명을 타파한 벽송 지엄 선사가 창건한 벽송사는 그야말로 조선불교의 선맥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도량이다. 벽송 지엄 이후 부용 영관, 청허 휴정, 부휴 선수, 청매 인오, 환성 지안 등 기라성 같은 대선사가 줄지어 나와 인천의 사표로 우뚝 섰으니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 칭할만하다.

이토록 유서 깊은 벽송사에 지난 2006년 봄 부터 한산 월암(閑山 月庵) 스님이 주석하며 벽송사 선풍을 다시 휘날리고 있다. 월암 스님은 1973년 도문 스님을 은사로 동진 출가해 중국 북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제방선원서 수행에 매진했다. 스님이 펴낸 『간화정로』와 『돈오선』은 선 수행에 따른 역사와 실천 체계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어 수행인들의 지침서로 활용되고 있다.

『돈오선』 첫 장을 열어 본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놀랐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논쟁이 일고 있는 ‘돈점’의 시원을 명확하게 드러내 놓았기 때문이다. 『잡아함경』과 ‘남전 니까야’에서 인용한 각각의 내용은 이렇다. “고성제를 마땅히 알고 이해해야 하며, 집성제를 마땅히 알고 끊어야 하며, 멸성제를 마땅히 알고 깨달아야 하며, 도성제를 마땅히 알고 닦아야 한다.”

10대 출가해 35년 수행

중국 유학서 선학 정립

대·소돈오 구분 하지만

깨달음 같고 功能 달라 

“고를 보면 또한 집멸도를 보게 되고, 집을 보면 역시 고멸도를 보게되며, 멸을 보면 동시에 고집도를 보게되고, 도를 보면 고집멸을 함께 본다.”
사성제를 봄에 있어 ‘북전 아함경’은 점현관을 말하고 있으며 ‘남전 니까야’는 돈현관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월암 스님에게 확연히 다른 ‘돈점 사상’이 어떻게 회통할 수 있는지를 물을 참이다. 우선 원시 돈점사상과 연관 있는 부파불교 교설의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과 심정부정설(心性不淨說)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었다. 과연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

“성선설과 성악설이 공존하듯, 심성설의 두 견해도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두 심성설이 돈점사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따져봐야 합니다. 마음의 바탕은 본래 청정하다는 심정본정설을 주장하고 있는 대중부 등은 돈현관을 말하고, 심성부정설을 주장한 설일체유부 등에서는 점현관을 말합니다. 심성본정설 핵심은 간단합니다. 중생의 심성은 본래 청정하다, 다만 무시이래로 객진번뇌에 의해 오염됐을 뿐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점차로 번뇌를 소멸해 본래 청정심과 상응한 심성본정의 상태를 회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심성부정설은 정반대 견해를 내놓습니다. 심성은 본래 청정하지 않다며 청정심과 오염심을 말합니다. 오염심은 중생이 본래 갖고 있는 마음이며, 청정심은 수행 후 얻는 부처의 마음이다. 따라서 부처의 마음으로 오염심을 멸하고 난 후 청정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심성본정설의 돈현관에서 해탈이란 본래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면 된다는 것이고, 심성부정설의 점현관에서는 불법의 가르침으로 삼독심을 대치해, 점차 오염심을 제거한 후 청정심을 얻어야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돈현관은 멸을 보아 도를 얻는다는 ‘견멸득도(見滅得道)’를 말합니다. 멸성제를 현관하는 것으로 나머지 이고(離苦), 단집(斷集), 수도(修道)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고집멸도 중 어느 하나(一支)를 확연히 알면 나머지 3지도 동시에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여기엔 차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점현관은 고를 보아 도를 얻는다는 ‘견고득도(見苦得道)’를 말하며 차제법을 씁니다. 견고득도 이후 차제로 집멸도를 현관하며 알아가야 하기에 돈(頓)이 아니라 점(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원시·부파불교에서 말하는 돈점관을 어떻게 가름해야 하는 것인가. 적어도 대승불교권에서의 돈점수증론을 이해하기 앞서 이 점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지금의 돈오돈수, 돈오점수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돈과 점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점을 타파하고 돈과 점을 함께 닦는 역점역돈(亦漸亦頓)으로 가름하면 됩니다. 공(空)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아니고 점’이라 가르치고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점이 아니고 돈’이라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를 관통하는 것은 돈점관을 융회해 ‘점차로 닦아 단박에 깨우친다’는 점수돈오(漸修頓悟)입니다. 대승불교 수증론 중심도 역시 점수돈오입니다.”

쉽게 말하면 근기에 따라 돈과 점을 가르치고 수행한다는 것이리라. 『대비바사론』에서도 번뇌를 끊는 수행에 이도(利刀)와 둔도(鈍刀)를 사용하지 않는가! 물건을 끊을 때 한 번에 끊어 버리는 예리한 칼인 이도와 여러 번에 걸쳐 끊을 수 있는 무딘 칼 둔도가 있다. 혜안 종사는 수행인의 근기에 따라 이도와 둔도를 쥐어주는 것이다.

이제 중국 초기불교 돈점논쟁의 핵심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대돈오와 소돈오에 대한 견해를 들어 볼 차례다. ‘돈오’하면 그만이라 하는데 어떤 분별이 있기에 큰 깨달음, 작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인가. 10지 중 칠지인 원행지서 돈오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돈오이고, 구경각에서만 돈오할 수 있다 하는 주장이 대돈오다.

“칠지돈오냐 불지돈오냐 하는 것은 경지론적 관점입니다. 양자 모두 돈오 이전에 점수가 필요하다는데는 의견이 일치합니다. 구마라집을 스승으로 모시며 반야현지를 터득한 도생법사가 10지 돈오를 주장했는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도생법사도 돈오 이전의 점수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들어 보인 참목의 비유를 보세요. ‘나무를 처음 베기 시작할 때 조금씩 점차로 베지만, 최후에는 한 번에 완전히 벤다.’ 보살이 점차로 수행해 금강정위에 이르러 마지막 일념에 단박에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점수와 돈오가 오묘하게 결합돼 있지요. 점수돈오인 겁니다. 물론 훗날 남종 돈오선과는 다른 의미가 있지만 그의 돈오성불론은 대승의 점수돈오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소돈오, 대돈오 하는 것은 경지 관점에서 말할 뿐이지 같은 깨달음이라 보아야 한다는 견해다. 단, 깨달음에 둘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공능(功能)의 차이가 있다 한다. “공능을 설명한다면 어린 아이와 성인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도 사람이고 어른도 사람입니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아이와 어른이 발휘하는 지혜와 능력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소돈오 주장에서도 7지 이후 3위를 진수(進修)하라 하는 겁니다. 이 때 진수는 무수지수(無修之修)입니다. 닦을 것이 남아 있어 닦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깨달음 본질을 놓고 말할 때 깨달음은 같다. 그러니 소돈오가 깨달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만 놓고 말하면 시비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어떻게 회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 남았다. 돈오돈수, 돈오점수도 돈오 이전의 점수 즉, ‘점수돈오’를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니까 점수돈오 후,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깨친 다음에 무엇을 닦을 게 있기에 ‘돈수’고 ‘점수’라 하는 것일까?

“돈가 입장은 돈오하면 바로 돈수를 해 마쳐야 하는 것이지 더 닦아야 할 점수가 있다면 이것은 진정한 돈오가 아니라고 합니다. 점가는 설사 돈오했어도 이는 이(理)의 분상이고 아직 사(事)의 분상에서는 습기를 제거해야 하는 보임이 필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이 때 보임(保任)은 닦기는 하지만 닦음이 없는 닦음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놓고 말하면 견성이 곧 성불이라 하면 돈오돈수고, 견성 후 보임해야 한다 하면 돈오점수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좀 전에 말한 소·대돈오와 유사한 맥락을 보이고 있다. 칠지돈오와 돈오점수, 십지돈오와 돈오돈수의 설명이 비슷하다.“전문적인 교학 접근에 앞서 이렇게 보면 알기 쉽습니다. 근기가 약한 사람은 점차 닦아 단박 깨달을 수 있으니 점수돈오입니다. 상근기 보살은 단박에 깨달아 단박에 닦을 수 있으니 돈오돈수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에 대해 단박에 깨달았다 해도 점차 닦음을 가자(假資)할 수도 있기에 돈오점수입니다. 이는 각 근기에 따라 설명하고 가르치고 수행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혜능 선사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법에는 돈점이 없으나 근기에는 돈점이 있다.’ 돈오돈수도 알고 보면 그들의 과거생을 미루어 볼 때 이미 과거 다겁생을 두고 오랜 세월 점수한 훈습이 쌓여있기 때문에 금생에 이르러 한 번 듣고 즉시 깨달아 일시에 증득해 마친 것입니다. 이미 먼저 닦고 나중에 깨닫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월암 스님의 이어진 설명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 점차로 수행해 구경에 무상실상(無相實相)을 일시에 깨달을 수 있다(점수돈오). 어떤 사람은 중도실상을 단박에 깨달아 단박에 무주묘행(無住妙行)을 갖춘다(돈오돈수). 어떤 사람은 진여본성을 깨달아 이것에 의거해 간단없이 무생인(無生忍)을 닦을 수 있다(돈오점수). 그렇다면 왜 돈점 논쟁은 감정으로까지 치달았던 것일까. 물론 각자 정통성 확보에 연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점수돈오 확연명철 해야

돈오돈수·점수 핵심 파악

근기 따라 돈점 있으니

삼종 수증론 회통 가능

“보조 시대에는 교와 선이 반목하며 무위무사에 빠지고, 선종 내부에서조차 깨달음에 경도돼 닦음을 방기하며 일신 안위 속에서 겉으로만 수연자재하는 부류들이 많았을 겁니다. 그러니 보조 선사는 그들을 향해 명철한 깨달음을 얻은 뒤 그 깨달음마저 버리고 보현행원의 자타겸재를 독려하려 했기에 돈오점수를 말한 것이라 봅니다. 성철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들이 수행 자체에 철두철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설프게 알은 암증선사들이 도인 흉내 내며 조문의 돈법을 어지럽히니 돈오돈수를 강조했다 봅니다. 당시 불교를 정법으로 안내하려 했던 선각의 마음만은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학상에서의 돈점논쟁 접근은 놔두고라도 실참수행에서 만큼은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두 문을 어떻게 제대로 세워 놓을 수 있을까!.“두 문 모두 취하고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돈오는 점수에 대한 방편문이며, 점수는 돈오에 대한 대치 방편설이라 보아야 합니다. 둘 다 공존하며 상생하는 겁니다. 점수돈오까지 말하면 삼종수증론은 서로 어우러져야 합니다. 점수를 통해 돈오해야 하고(점수돈오), 일단 돈오하면 돈수이며(돈오돈수), 돈오 후 점수 즉, 깨달음을 실체화 하지 않고 이제는 닦음이 없는 닦음의 방편수행으로 중생회향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세 문은 모두 세울 수 있고 융회할 수 있습니다.”

월암 스님은 수행초발심자를 위해 또 하나 당부했다. 불성이 있다 해서 지금의 마음 뒤에 또 다른 마음이 있어 그 마음을 찾아야 한다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불성도 각자의 심성에 있다는 것이다. 번뇌도 공인 줄 알면 번뇌가 곧 보리라는 것도 알 것이란 얘기다. 번뇌 따로 보리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월암 스님의 일갈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천목 중봉은 마음을 깨달은 뒤 더 실천수행할 것이 있느냐는 물음에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미리 닦을 게 있냐 없냐하며 미혹에 빠질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돈오하고 나서야 더 닦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수행도 하지 않고 깨달은 뒤 닦을 게 있느니 없느니 시비하는 것은 구두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월암 스님은

1973년 경주 중생사서 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중국 유학서 선학을 연구하고 선종 조정을 참배했다. 중국과 한국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 한 스님은 벽송선원장으로 주석하며 선교겸수, 선농일치, 불이선 운동을 전개하며 간화선풍 진작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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