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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칼럼] 봄나들이 단상

기자명 법보신문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완연한 봄이다. 생명의 계절이요, 희망의 계절이라는 봄이다. 중국 송나라 때 한 비구니 스님이 봄을 찾아 나선 것처럼 고즈넉한 산사로 향했다. 봄을 찾아 나선 비구니 스님은 하루 종일 구름 걸린 언덕과 넓은 들판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봄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뜰 가에 서있는 매화나무를 본 순간 봄은 이미 매화가지에 앉아 있음을 알았다. 비구니 스님은 여기서 한 소식해 시 한수를 지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녀도 / 봄을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다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 따라다녔네./ 허탕치고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네.
물론 이 시는 그냥 나들이를 나선 필자와는 다른 경지의 오도송이다. 무비 스님은 이 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 있는 봄을 모르고 멀리 찾아 헤매듯, 행복이라는 봄도, 성불이라는 봄도, 열반이라는 봄도 여기 이 순간의 자신을 버리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맨다.”

이 한마디에 알면 좋으련만 근기가 약하니 어쩔 수 없이 봄을 찾아 길을 나서고 만다. 때로는 들판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도, 때로는 들녘에 핀 야생화를 보고도 잠시나마 마음 한 자락 쉬어볼 수 있기에 떠나 보고 싶은 것이다.

장석주 시인은 ‘세상은 도서관’이라고도 했다. “세상은 도서관이며, 돌과 나뭇잎, 풀과 개울, 새와 동물들이 모두 이 도서관의 서가에 꼽힌 장서”란다. 참 멋진 말이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자연 속에서 지혜도 배울 수도 있으니 봄나들이가 그리 무용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김광섭 시인이 ‘봄’에서 말하듯 ‘나무에 새싹이 돋는 것을 어떻게 알고 새들은 먼 하늘에서 날아올까/ 물에 꽃봉우리 진 것을 어떻게 알고 나비는 저승에서 펄펄 날아올까’처럼 봄소식에 새도, 나비도 나는데 이 완연한 봄을 잠시나마 만끽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여유 없는 단편에 치우친 삶이리라.

산사에 도착하니 마음 하나만은 편안하기 이를 데 없다. 절 옆을 흐르는 계곡물 소리 맑기 그지없고, 만개한 벚꽃 또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데 꽃은 꽃대로, 물은 물대로 있으며 어우러져 있으니 지금 이대로가 ‘무애’인 듯싶다. 그래서 소동파 시인은 ‘산 색 또한 청정법신이 아니리오’했나 보다. 소동파는 한 선사와의 선문답에서 말문이 막힌 후 길을 가다 한 소식 얻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의 오도송이라 불리는 시는 이렇다.

흐르는 물소리 한없는 부처님 말씀이니/ 산 빛 또한 그대로 청정법신이 아니리오./ 어젯밤 다가 온 팔만사천 법문(소식)/ 뒷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어 보이리오.
산사서 만난 스님이 인사 차 물으신다. “절에 오니 어떠하냐?”고. “소동파 시 한수도 아직 담지 못했다”하니 스님은 “곳곳이 불상이요, 일마다 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 한다.

만물이 다 부처님이니 일체 일들도 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불공’이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를 들어서 머리로는 알 수 있지만 체득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만물을 ‘부처님’처럼 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뭇 생명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가는지 자문해 본다. 아마도 매화가지 보고 깨달은 비구니 스님, 흐르는 물소리도 법음이라 한 소동파, 그리고 세상은 도서관이라 한 시인은 생명에 대한 진솔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언제쯤 그들의 순수함을 담아볼 수 있을까!

경제난 속에 공안정국 버금가는 어수선한 사회서 하루를 살아야 하지만 잠시 내려놓는 여유를 가져봄 직하다. 긴 여행은 아니지만 봄나들이라도 떠나면 봄이 전하는 생명과 희망을 안아 볼 수 있으리라. 비구니 스님이나 소동파처럼 한 소식은 아니더라도 산사 풍경소리에 ‘청량’하나 얻어 돌아올 수 있다면 이 또한 멋진 일일 것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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