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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red][특별기고][/font]순례길에서 부친 수경 스님의 편지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9.05.1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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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체투지, 세상에 대한 감사 기도”

 
지난 3월 28일 공주 신원사 중악단서 북 묘향산 상악단까지 오체투지 순례길에 다시 나선 수경 스님과 순례단. 교만을 비운 만큼 상생의 의지를 새로 채울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지리산 노고단 하악단에서 공주 신원사 중악단, 평양 묘양산 상악단까지 가장 낮은 자세로 교만과 아상, 독선을 내려놓으며 사람과 생명 그리고 평화의 길을 찾아 오체투지 순례 중인 서울 화계사 주지 수경 스님이 본지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지난 5월 16일 서울로 들어서는 남태령 고개에 다다른 수경 스님의 100여일 간의 마음 비움과 나눔을 담은 글을 본지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허공’이라 하지만 하늘과 땅 사이입니다.
온 생명이 거기에 깃들어 삽니다.
대지의 품에 안겨 보니,
아스팔트 틈새 작은 풀이 우뚝한 나무처럼 보입니다.
몸을 세워 허공을 보니,
키 큰 나무도 풀싹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
함부로 할 말이 못 됩니다.

중생!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생명의 무리.
하늘과 땅의 은덕으로 살아갑니다.
하늘과 땅의 조화속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생, 온 생명, 만물.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입니다.
기는 놈, 걷는 놈, 나는 놈.
모두가 하나입니다.
더 나은 존재도, 모자란 존재도 없습니다.
한 티끌이 우주라 했습니다.
홍진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 그대로 화엄입니다.
이리하여 나의 오체투지는
온몸 온마음으로 화엄을 읽고 베껴 쓰는 일입니다.

하늘이 숨을 내 쉽니다.
대지가 하늘의 숨을 받아 마십니다.
바람이 붑니다.
햇살이 반짝입니다.
구름이 일고 비가 내립니다.
그 묘용 속에 내가 살아갑니다.
이리하여 나의 오체투지는
세상에 대한 감사의 기도입니다.

함께 길을 가는 도반 여러분. 세상이 이렇게 모질고 독한데 무슨 감사냐는 억하심정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자본주의가 득세한 이 세상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자양분으로 굴러갑니다. 한국 사회의 현 상황은 더욱 그렇습니다.

정치권력은 대량소비를 전제한 거대기업과 불로소득에 기초한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포식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경쟁’이라고 말하며 ‘탐욕’을 부추깁니다. 사람다운 삶, 함께 하는 삶을 위한 ‘공분’은, 나도 악착같이 벌어서 저들처럼 떵떵거리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뒤집힙니다. 국민 모두를 부자 만들어 주겠다는, 품위라고는 찾아볼 데 없는 말에 넘어 갈 수밖에 없는 ‘어리석음’을 우리 스스로 준비한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필연입니다.

민주주의 역행은 사람의 길 버린 탓

물론 ‘나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는 것은 다수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합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업’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누구 탓 말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면서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도반 여러분. 제가 보건대 지금 우리 사회는 분노가 부족해서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 정권과 4·19, 장면 정부와 5·16, 박정희와 부마항쟁 그리고 10·26, 전두환과 5·18, 6·10…. 이렇게 우리는 분노의 악순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소위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돈, 돈, 돈을 외치면서 우리 스스로 사람다운 삶을 내팽겨 쳤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분노해야 사람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체투지 속엔 폭력 설 자리 없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코살라국의 비루다카 왕이 부처님의 모국인 카필라를 치기 위해 진군을 할 때였습니다. 부처님은 그 전쟁을 막기 위해 군사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좌선을 했습니다. 그늘을 드리우는 무성한 나무를 마다하고 땡볕이 내리쬐는 말라죽은 나무 아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비루다카 왕이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잎 무성한 나무를 두고 이런 곳에 앉아 계십니까.”
“석가족을 위해서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비루다카 왕은 군사를 되돌립니다. 군사를 일으켜 출정을 할 때 출가 사문을 만나면 회군을 하는 것이 당시 인도 사회의 전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부처님은 샤카족의 멸망을 막지 못했습니다. 비루다카 왕을 종의 자식이라고 모욕한 샤카족의 교만이 화근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예견하셨습니다. 말라죽은 나무는 모국 카필라의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도 인과의 도리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부처님은 침묵으로써 자신의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샤카족의 멸망을 예견하셨지만,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로써 말라죽은 나무 아래서 좌선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오체투지도 이와 같습니다.
무력한 개인이 폭력적 국가 권력에 맞서 이길 재간은 없습니다. 상식과 이성, 논리를 아랑곳 않는 것이 폭력의 속성입니다. 입법부와 사법부마저 대통령 일인의 절대 권력에 휘둘리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집단적 저항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에서 보듯이, 수많은 사람의 눈물과 죽음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은 사람의 길이 아닙니다.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평화의 길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과 생명과 평화의 길을 찾아 가는 것으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무장한 야만적 문명의 자장에 휩쓸리지 않고자 합니다. 이 기회에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아무리 선량한 사람도 자연에 대해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목숨을 부지한다는 자체가 다른 목숨에 빚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허물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현 정부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그것이 한때의 허물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4년 후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올 대통령이 또 실패한 대통령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입니다. 현 정부의 불도저식 정책 추진의 에너지가 부디 선한 기운으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곧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부가 어떤 사람의 가난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능력과 행운의 일부라도 나누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이 모두가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체투지를 합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더 이상 낮아질 데가 없을 때, 높고 낮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상대적 가치는 미망의 경계일 뿐입니다. 일찍이 선불교의 큰 어른이신 임제 스님은 일체의 차별이 무너진 경지를 체득한 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했습니다. 어느 자리에도 놓이지 않는 참사람이라는 말이겠지요. 그야말로 자유인입니다. 그런 경지의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한 사람이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궁극의 행복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없이 모자라는 자신을 비춰보고 또 비춰보며 오체투지를 하는 것입니다. ‘무위진인’ 이 한 마디에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 다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능엄경에 이르기를 “스스로 제도하지 못하고서 먼저 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 보살의 발심이요, 스스로 원만히 깨닫고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여래가 세상에 응하는 방식(自未得度 先度人者 菩薩發心 自覺已圓 能覺他者 如來應世)”이라 했습니다. 어찌 함부로 보살의 발심을 운위하겠습니까만, 남을 제도하기에는 한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잘 알기에 기어서라도 우리 모두가 자신을 바로 보는 성찰의 장을 열고자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출가한 중을 비구(比丘)라 하는데, 그 뜻을 한자로 새기면 ‘걸사(乞士)’입니다. ‘거렁뱅이’를 자처한 사람이 바로 중입니다. 중은 얻어먹는 행위로 세상과 만납니다.(중이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종교의 성직자들이 다 그렇겠지요.) 중의 이러한 행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탁발입니다. 탁발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절집의 말이 ‘화연(化緣)’입니다. 인연맺기라는 말이지요. 부처님이 보신 진리, 다시 말해 세계의 본질과 사물의 존재방식인 공(空)과 연기(緣起)를 깨닫는 인연을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체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나는 나 아닌 것들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로 바꾸어 봅시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라는 말입니다.

오체투지를 하면서 도회지의 찻길을 지날수록 ‘화연’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의 느린 행보는 차량의 정체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한시가 바쁜 사람들의 ‘시간을 탁발’하는 셈입니다. 참으로 미안하고 난감한 일입니다. 그런 한편으론 이 순간의 불편이 속도와 경쟁의 무모함을 성찰하는 작은 계기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간절합니다. 이것 또한 욕심이겠지요. 이런 마음조차도 다 내려놓아야지 하면서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체투지는 저 스스로에게 내리는 장군죽비입니다.

탁발은 ‘무소유’의 적극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요즘 절집은 너무 많이 가졌습니다. 저 자신도 무소유란 말 앞에서는 떳떳할 자신이 없습니다. 조사해 본 바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부동산 부자 가운데서 조계종을 빼 놓을 수 없을 겁니다. 조상 잘 만난 덕분이지요. 그런데 조상의 은덕을 써 먹는 방식을 보면 ‘무소유’의 정신과는 아득히 멉니다. 국립공원 내의 사찰 관람료 징수가 좋은 예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절집이라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소유가 불가피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문제는 소유 방식입니다. 사찰 소유의 재산은 배타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선 안 됩니다.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소유’여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무소유 정신의 발현입니다. 물려받은 재산이든 재가 불제자들의 시주물이든 세상을 살리는 일에 쓰여야 합니다. 사람과 생명과 평화의 길에 쓰여야 합니다. 그것이 무소유입니다.

시주물은 생명-평화의 길에 쓰여야

도반 여러분. 요즘 우리네 살림살이는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현 정부 들어서 초등학교조차도 무한 경쟁의 장으로 내몰리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학력이 신장된다 칩시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십수년 간 적어도 초등학교에서는 성적으로 줄을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공부 못하는 아이야, 나는 열등생이야 하고 스스로 낙인찍지는 않았습니다.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조차 살벌한 경쟁을 요구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을까요. 어차피 1등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2등과 꼴찌가 없으면 1등도 없습니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성인과 범인이 함께 사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양새가 어떻습니까.

약자에 대한 배려가 가진 자의 의무가 되지 못할 때, 선한 사람들의 양보와 희생이 미덕이 아니라 손해 보는 짓이 되고 말 때, 한국 사회의 미래는 야만 그 자체일 것입니다.
물이 낮은 데로 흐르듯, 바위와 벼랑에 막히면 돌아 흐르듯 우리는 그렇게 오체투지를 할 것입니다. 순리와 상식이 통하는 그런 세상을 위해, 폭력적 국가 권력과 냉혈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나를 바로 세우는 자성의 거름으로 삼을 것입니다.

땅이 씨앗을 가리지 않고 싹을 틔우듯이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공생의 터전으로 바꾸면 관용과 배려, 양보와 감사가 손을 맞잡을 것입니다. 오체투지를 하는 우리들의 마음자리엔 이미 폭력적 국가 권력이나 약자의 눈물을 탐하는 기득권자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사람과 생명과 평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수경 스님 서울 화계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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