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지성] 21.비트겐슈타인-홍성기 아주대 교수
[불교와 지성] 21.비트겐슈타인-홍성기 아주대 교수
  • 법보신문
  • 승인 2009.11.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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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마음의 산물이자 연기론적 관계로 파악

그림이론으로 언어와 세계의 관계 설명
내재적·외재적 관계 용수 사상과 유사
“보일 수는 있어도 말할 수는 없다” 선언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흔히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공학을 공부하던 그는 우연히 럿셀과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원론』과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를 접하게 되면서, 케임브리지의 럿셀을 찾아가 논리·언어철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본 것이 아니라, 아무도 문제라고 보지 않는 것을 문제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1921년 『논리철학논고』를 럿셀의 서언과 함께 출간한 후,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생각에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시골 초등학교의 선생이 되었다. 그러나 『논고』의 원자주의와 언어의 역할에서 문제점을 발견한 비트겐슈타인은 1929년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철학에 복귀하였다. 그의 또 하나의 명저 『철학적 탐구』는 사후인 1953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평범한 일상언어로 쓰여졌으나 가장 난해한 철학서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흔히 말하듯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본 것이 아니라, 아무도 문제라고 보지 않는 것을 문제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진정 독창적인 철학자였다.

비트겐슈타인과 불교철학과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철학자는 문제를 마치 질병처럼 다룬다.”는 『탐구』의 한 구절(§255)을 들어 ‘분별망상을 병으로, 망상에서 벗어남을 약으로 간주’하는 불교적 태도와 유사함을 들고 있다.(Gudmunsen)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자신의 철학을 ‘이론’이 아니라 현상의 ‘기술(記述)’이라고 본 것도,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와 관련을 맺을 수 있기는 하다. 왜냐하면 석가께서는 득도 후에 연기를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우선 철학적 질문을 병이라고 보거나 철학함이 정당화 이전에 현상의 기술이라는 태도에 대하여 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문제의 핵심을 찌른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과 불교와의 연관성을 찾기 전에 우선 불교의 핵심교리인 연기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선행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불교사를 통해 비록 여러 종류의 연기가 주장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연기이해는 “무엇에 연(緣)하여 무엇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이미 연기를 전제하고 있다. 심지어 연기를 일종의 불교적 인과관계로 보는 경향조차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불교를 연기설로 설명하고, 다시 연기를 불교로 설명하는 순환적 정의를 피할 수가 없다. 바꿔 말해 불교철학에서 연기에 대한 이해는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 논사 용수가 『중론송』에서 논쟁 상대와의 대론을 통해 상대방의 주장을 논파하는 구조를 살펴보면, 항상 이중적 관계가 논파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용수는 어떤 개념쌍(예:원인/결과)이 ‘동일성(一)’과 ‘상이성(異)’의 이중적 관계에 놓인 것을 역이용하여, 상대방이 문제의 개념들의 동일성을 주장할 때는 상이성으로, 상이성을 주장할 때는 동일성으로 논파하며, 이런 논쟁의 결과가 ‘불일불이(不一不異)’ 등의 부정어법으로 나타난다. 중론송의 맥락을 살펴볼 때 바로 동일성과 상이성의 이중관계가 연기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그 어떤 임의의 대상들도 이러한 이중관계에 놓여 있으며, ‘세계일화(世界一花)’, ‘인드라의 그물’은 이런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연기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중생들이 세계를 ‘분할’하고 ‘조합’하는 분별지의 근본구조이나, 중생은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이중관계로서 연기는 그 모순적 구조로 인해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다만 인간이 연기구조를 통해 삼라만상을 구성한다는 점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가 ‘아공(我空)·법공(法空)’을 말할 수 있는 근본 이유도 바로 존재의 구조인 연기가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이 불교의 진리, 교리이다.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 규명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도 연기의 ‘동일함’과 ‘상이함’과 비교될 수 있는 이중관계가 초기에서 후기철학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의미는 변화하였지만,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즉 그가 ‘내재적(internal)’ 그리고 ‘외재적(external)’이라고 부른 관계가 그것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논고』에서 언어와 세계와의 관계를 이른바 ‘그림이론(picture theory)’을 통하여 서로 대응하는 사상(寫像)관계로 해석하였다. 그림이론에 의하면 교통사고 상황을 차와 사람의 모형을 통해 재현할 수 있듯이, 언어는 세계와 ‘공통으로 갖는 구조’를 통해 현실을 사상한다. 그러나 문제는 기존의 언어가 분명 세계와는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각형이 원의 왼쪽에 있다.”라는 문장의 구문론적 구조는 “■ ●”이라는 사실(fact)의 구조와 동일하지 않다. 즉 문장(언어)에는 ‘사각형(=a)’, ‘왼쪽에 있다(=R)’, ‘원(=b)’이라는 세계의 단어(대상)와 이들 간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사실(세계)에는 ‘■’, ‘●’이라는 두 개의 대상과 이들 간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문장구조를 재해석하였다.

복합기호 “aRb”가 “a가 b에 대하여 관계 R에 놓여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a’가 ‘b’에 어떤 특정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aRb”를 말한다. (『논고』, 3.1432)

즉 비트겐슈타인이 상정한 이상언어에서는 문장 안의 이름들이 특정한 관계에 놓이는 것(예:좌·우, 상·하)이 바로 기존언어의 관계술어 “R”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림이론을 위해 『논고』에서는 원자적 대상이 형이상학적 요청으로 상정되었지만, 원자주의에 대한 비판이 시도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는 더 이상 전제될 수가 없었다. 특히 그림 속의 대상 사이에서 관계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탐구』에서 ‘이 나무의 시각상이 복합적인가?’라는 질문이 철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47)과 동일하다. 즉 보기 나름이며 의식의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내 철학은 이론 아닌 현상의 기술”

나아가 그림 속의 대상들을 시간상의 절편(切片, time slice)으로 일회적 ‘개별자(token)’로 본다면, 이들 사이의 관계는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이 말은 그림 전체의 분할을 통해서 관계항과 관계가 동시에 생기며, 이들을 정의하려고 시도할 경우 반드시 순환에 빠진다. 반면에 이 대상들을 추상적 ‘보편자(type, 相)’로 본다면 이들 사이의 관계는 ‘이것 없이도 저것이 존재하고, 저것 없이도 이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독립적이 된다.

여기서 ‘어떤 전체를 인간의 의식이 분할함으로써 비로소 생기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내재적 관계’라고 볼 경우, 이 내재적 관계는 “보일 수는 있어도 말할 수는 없다.”는 『논고』(4.1212)의 유명한 구절의 의미가 이해된다. 다른 한편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된 대상들의 조합에서 생기는 독립적 관계’를 우리는 ‘외재적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내재적 관계의 의미는 비트겐슈타인의 초기와 후기에서 결정적으로 변화하였다. 독일의 구성주의 철학자 로렌즈(Lorenz)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은 그림과 내재적 관계를 ‘인식론적’으로 해석하였으나 『탐구』에서는 ‘존재론적’으로 사용하였다.” 즉 초기철학에서는 그림 속의 대상이 인식주체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후기에는 인식주체에 의해 비로소 구성된 것이다. 물론 그림도 현실에 속한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관계는 서로 독립적인 사물로 이루어졌다고 보이는 이 세계가 실은 인간의 마음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한 내재적 관계와 외재적 관계가『중론송』의 동일성과 상이성의 관계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중론송』의 제6장 「관염염자품(觀染染者品)」에서는 ‘결합의 가능성’이 논파되고 있다:

하나인 것이라면 결합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것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각이라면 실로 어떻게 결합할 수 있겠는가? (6.4) / 이처럼 각각인 것으로 성립하지 않기에 그대는 결합을 추구한다. 결합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대는 분리된 것을 원한다. (6.8)

여기서 우리는 결합이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처럼, 실은 전체의 분할이라는 내재적 측면과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된 대상간의 외재적 측면이 있음을, 비록 부정적 논증이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내재적, 외재적 관계론을 연기론과 연결시켜 그의 철학을 재구성하고, 나아가 인간이 자신과 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我空法空)를 아직 엄밀하게 재구성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작업은 용수의 중관철학에서 확인된 연기의 이중적 관계와 유식철학을 현대적으로 종합하는 이론적 관점과, 현대물리학 및 정신병리학의 여러 현상들을 연기에 의거하여 설명하는 응용적 관점에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


홍성기 교수는

1956년 서울에서 출생해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87년 독일 뮌헨대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석사를, 1993년 자르브뤽켄대학에서 『용수의 중론송의 논쟁구조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1년부터 아주대 특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용수의 논리』(우리출판사), 『불교와 분석철학』(우리출판사)과 미술평론집『시간과 경계』(AK Desig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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