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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외(格外)에서 노닐다 겁외(劫外)의 세계로

기자명 김민경

특집 - 9일 입적 중광 스님의 삶과 예술세계

26세 때 통도사 구하 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때 종회의원 역임…안거 10회 성만

“어린아이 심성으로 그림 그리고 기행 일삼아”




중광 스님의 말년 모습과 전시도록



화가, 시인, 행위예술가, 도예가 그리고 그 이전에 출가승려였던 중광 스님이 3월 9일 이승에서의 즐거운 놀이를 마치고 입적했다.

스님의 세속 나이는 67세였으며 출가 이후 41년만에 육신의 옷을 벗었다. 빈소는 서울중앙병원에 마련됐고 수많은 이들이 스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다녀갔다.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과 백담사 회주 오현 스님, 영화배우 신성일-엄앵란 씨 부부, 방송인 원종배 씨, 스님의 옛 도반들, 김종규 박물관협회 회장, 장충식 동국대 박물관장, 가수 이남이, 탤런트 고두심, 강부자 씨 등등 좀체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많은 이들이 빈소를 찾아 스님의 떠나심을 슬퍼했다.

스님의 법체는 13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서 같은 날 오전 10시 스님의 출가본사인 양산 통도사에서 다비됐다. 저자거리의 빈소와 천년고찰에서의 다비. 비승비속으로 점철된, 스님의 지난한 삶을 엿볼 수 있는 다비식이었다. 49재는 서울 양재동 구룡사에서 이어지며 1997년부터 스님이 몸을 의탁했던 강원도 백담사에서도 한 차례 치러진다.



스님으로서의 중광



제주도에서 출생한 스님은 26세 때인 1961년에 근현대사 속에서 큰 발자국을 남겼던 고승 구하(九河) 스님 아래로 출가했다. 전 조계종 종정 월하 스님과는 사형사제간이다.

스님은 출가 초기부터 엄격한 불가의 계율과 풍속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힘들어 했으나 안거를 10회 이상 성만하고 조계종 종회의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출가 수행승의 본분을 실천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간혹 격외(格外)의 기행을 보여 화제를 모았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49재에서의 가요부르기. 망자를 위한 법문에 나서 “망자가 제일 듣고 싶어하는 법문일 것”이라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제낀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화가의 길



스님은 1970년대 중반무렵 그림에 눈을 돌렸다. 붓글씨를 잘 썼던 스님은 조계사 뒤 한 불교미술인의 화실을 찾아가 한국화의 기초를 사사받았다. 이 시기에 스님은 수년간 중국과 한국, 일본의 선화를 집중 연구하고 필력을 다듬어 나갔다.

스님의 그림작업은 흔히 기초가 부실한 ‘즉흥성’으로 변별되었지만 그것은 스님이 자신의 화업정진 이력을 일부러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불러온 오해이다.

스님은 그 어떤 화가보다도 그림에 관한 한 끈질기고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을 가까이 알던 모든 이들의 뇌리에는 스님의 작업실을 가득 메운 파지와 한 번 붓을 들면 일주일, 보름씩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에 몰두하던 스님 모습이 남아있다.

조계사 뒤 화실을 다닐 당시에도 스님은 한꺼번에 5천장씩 한지를 사들여 쌓아놓고 자신만의 화풍을 개발해나갔다.

스님이 예술가로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시기는 1977년부터 였다. 그해 영국 왕립아시아학회 초대로 선화 특별전을 열었으며 각종 매체에 스님이 그린 달마도와 연꽃 그림들이 화제 속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1979년 스님의 작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두 권의 미술서적이 출간 되었다. 1980년에는 미국에까지 건너가 수많은 특강과 전시회를 가졌다.

스님은 1997년 제일제당과 안그라픽스에서 추린 ‘현대미술의 거장 12선’에 선정되었다. ‘걸레스님으로 더 알려진 한국의 화가이자 조각가, 시인, 행위예술가이며 동양적 사상과 철학을 어느 화파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 분방한 필치와 색채로 표현한다’는 것이 당시 주최측이 스님에 대해서 내린 대한 평가이자 설명이었다. 스님의 예술세계는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끌었지만 국내 평단에서는 다소 냉담한 반응을 얻었던 것도 사실이다.

비판론자들은 스님의 그림이 서툴고 저속하며 생활방식도 엉망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의 비판은 대부분 아티스트 아카데미즘에 기초해 있다고 오히려 역공을 받기 일쑤였지만 스님이 선보인 수많은 기행은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절대 모자람이 없었다.

스님은 청규를 어겼다는 이유로, 아니 전혀 지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1979년 조계종의 승적을 박탈당했다.



왜 ‘걸레’인가



중광 스님이 ‘걸레스님’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은 자작시 ‘나는 걸레’와 구상 시인의 시 ‘중광 스님’에서 묘사된, ‘겉도 안도 너덜 너덜/ 그 걸레로 이 세상 汚染을/ 모조리 훔치겠다니 기가 차다/…’에서 비롯됐다.

스스로를 걸레라 낮추고 행동마저 기이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스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다. 줄담배를 피우고 아무렇게나 꿰어찬 옷에 술과 여자문제까지, 도무지 거침이 없는 행적을 보였으므로 세간에서는 스님을 ‘그림 좀 그리는 파계승’으로만 여겼지만 어떤 이들은 그를 진정한 예술가, 종교인으로 추앙하고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행동이 이상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스님이 어린아이의 감성과 시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더럽고 추함을 모르잖아요, 희노애락을 여과없이 내보이는 것이 어린아이 아닙니까. 스님은 매우 보수적이고 예의바른 측면이 오히려 더 많았지요. 배울점이 많았던 분입니다”(방송인 원종배 씨)

“한번은 함께 문화재 조사길에 나섰는데 성실함과 집중력이 만만치 않았어요. 목표를 정했으면 시간을 아껴 최선을 다하라고 오히려 같이 길 나선 사람들을 다그치는 것을 보고 좀 놀랐죠. 그때도 물론 줄담배를 피웠지만 절대로 남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지요.”(동국대 박물관장 장충식 교수)

“천진한 분이었습니다. 그 천진함으로 기존 화단의 그림들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격외의 경지를 일구었지요. 절 집안에서 오래 살아서인지 동양적 색채를 운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박물관협회 김종규 회장)

스님은 그림 그리는 틈틈히 특강에 초청받고 잇따른 방송출연에, 영화배우(1986년 한국 우수영화로 선정된 ‘청송 가는 길’의 주연배우로 출연, 국제영화제에도 초대 받음)로 활동하며, 1990년대 초반까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스님의 왕성한 예술활동은 건강에 적신호가 반짝이면서 차츰 스러져 갔다.



격외(格外)에서 겁외(劫外)로



‘살아생전 가장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한국화가’로 기억 될 중광 스님의 그림세계는 이제 불교미술적 관점에서 정밀하게 재평가 받을 일만 남겨놓고 있다.

그림을 통해 스님이 보여주려 했던 세계는 스님의 기행에 가려 오히려 주목을 끌지 못한 측면이 많다. ‘외눈 달마’, ‘가갸거겨’시리즈에서 엿보이는, 때로는 무구하고 또 때로는 경계 밖의 경계, 백척간두 진일보의 경지를 표현한 그림들은 분명히 현대불교미술의 스펙트럼을 넓혀도 한참이나 넓혀 놓은 작업이었다.

후배 불교화가들로서는 중광이라는 걸출한 화상을 불길 일렁이는 아궁이에 던져 넣으면 그만 이겠지만 격외의 삶을 살다 마침내는 겁외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린 그는 불자들의 기억의 창고에서 오래 머무를 것이다.



김민경 기자
mkkim@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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