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지 말고 그 마음을 내어라 『금강경』
중생의 지극히 힘들고 괴로운 모든 업보를 내가 대신 받으리 『화엄경』 「보원행원품」
몇 일전 서강대에서 ‘즐거운 혁명과 주체형성’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있었다. 마침 ‘즐거운 과학기술의 달콤한 유혹’이라는 역설적 제목으로 발표에 나선 필자에게 청중으로부터 질문이 있었다. 사는 것이 즐겁냐는 것과 이어서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느냐다. 물론 사는 것은 즐겁다.
굳이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젊은이에게 세 가지를 들었다. 먼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할 것. 그 앎과 삶을 일치시킬 것.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 말고 매 순간의 과정에 몰입할 것. 내게 있어서 금강경 구절은 세 번째의 구체적 방법을 말해주고, 화엄경의 구절은 첫 번째 것에 대한 답이다. 두 번째의 앎과 삶의 일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체화(體化) 과정이 있어야 하기에 각 개인의 노력과 깨달음이라고 하는 주관적 체험이 필요하니 각자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금강경이 공(空) 도리를 설했다고 하면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없을 무(無)자를 강조하지만 내게 와 닿는 것은 날 생(生)자다. 마음을 펑펑 내는 것이니 얼마나 자유롭고 즐거운가. 오직 그 마음에 머물러 집착하여 갇히지만 말라는 말씀이다. 집착할수록 연기적 관계를 망각하고 자신이 낸 마음의 틀 속에 갇힌다. 종종 불교의 가르침을 욕망을 없애고 세속을 멀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경전 말씀은 욕망을 없애 돌덩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 관계에 바탕을 둔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언제고 얼마든지 내라는 것이다. 이 열린 마음 한 조각이 일어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이 설파한 연기적 실상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머물러 갇혀서 고통과 힘듦의 나날을 보낸다. 관계에 열린 마음으로 볼 때 너와 내가 서로 의존해서 단지 이름하여 너와 나일뿐, 서로 둘이 아님을 알게 되면 위의 보원행원품 구절이 자연스레 마음에 와 닿는다. 중생과 내가 둘이 아니니 내가 모든 중생의 괴로움을 대신 짊어지겠다는 지극한 저 한 구절, 참으로 절절하다.
나는 공부모임 중에 세상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든 악귀, 잡귀들은 더 이상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모두 다 내게 오라고 종종 큰소리친다. 이 업해 속의 뭇 중생이 지닌 지극한 괴로움을 어찌 혼자 다 짊어진다고 하는 것일까. 감히 감당할 수 있을까. 너무 오만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리 생각하면 그 순간에 악귀가 달라붙을 것이고, 그런 희생의 마음이면 인생은 즐거울 수 없다.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표현처럼 누구도 희생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지극한 힘듦도, 대신 짊어지겠다는 그 서원도 오직 이름하여 힘듦이고 서원이니 이미 불국토인 이 화택에서 인간의 몸을 받고 살아가는 과정 중에 해야 할 일은 주위의 소외되고 힘들어 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며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커다란 그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각자의 모습대로 일상의 사소한 삶의 과정에 감사하며 몰입할 때 우리의 삶은 항상 즐겁게 된다. 그래서 이를 강조한 위의 두 말씀이 언제나 내 마음에 소중하게 남아있다.
우희종(서울대 수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