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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 보며 짓던 미소 그립습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10.03.13 15:07
  • 댓글 0

‘곁에서 본 법정 스님’ 맑고향기롭게 본부장 윤청광

 
2006년 법정 스님과 윤청광 본부장이 대나무 숲 앞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나의 전재산을 스님께 시주할테니 받아주세요.”
“나는 받을 수 없으니 다른 분한테 기증하십시오.”
한국 2대 요정 중 하나였던 서울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 여사가 『무소유』라는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감동, 싯가 “천억 원을 홋가한다”는 성북동의 땅과 건물을 생면부지의 스님께 “조건 없이 시주할테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해서 “받으세요” “못받겠다”하는 희한한 실랑이가 무려 10년 간 계속되었고 결국 스님의 무소유 고집에 김영한 여사가 굴복, 전 재산을 송광사에 기증함으로써 스님은 스님대로 ‘무소유’고집을 지키시고, 김 여사는 김 여사대로 요정을 절로 만드는 소원을 이루어 1997년 마침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상 전무후무할 이 전설같은 10년 실랑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참으로 법정 스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내가 법정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72년 늦가을이었다. 지금의 서울 종로 수송동에 동서문화원이라는 출판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송재운(宋在雲) 사장이 편집부장인 나에게 아래층 ‘다정다방’으로 내려가자는 것이었다. 당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던 ‘털보’ 서경수 교수가 법정 스님을 모시고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법정 스님의 수상집(隨想集) 출판에 관해 의논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처음 만나 뵙고 동서문화원에서 내드린 법정 스님의 최초의 책이 바로 『영혼의 모음』이라는 수상집이었다.
그 후 20년 세월이 흐른 1993년 당시, 나는 ‘책의 해’조직위원회의 기획·홍보 책임을 맡고 종로구 사간동에 있는 출판문화회관에 매일 출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바로 옆에 있는 법련사의 불일출판사 청학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법정 스님께서 만나자고 하신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이미 법정 스님은 『무소유』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스님’이었다. 그날 밤, 쓰러져가던 납작 기와집 법련사의 비좁은 방에는 법정 스님, 현호 스님, 청학 스님을 비롯해서 동화작가 정채봉, 출판인 김형균, 김자경 씨 등이 모여 앉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부르신 것일까. 모두들 궁금해 하고 있는데 법정 스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셨다.
“그동안 내가 시주의 은혜만 입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밥값은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을 맑히는 일을 무엇인가 해야겠으니, 여러분께서 힘을 보태주시오.”
까다롭고 엄격하고, 대쪽 같고 칼날 같아서 번거로운 일 싫어하시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께서 이날 밤 우리에게 내려주신 화두(話頭)는 여섯 글자 ‘맑고 향기롭게’였다.

무슨 운동을 어떻게 선정하고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벌여나갈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화두를 받은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랫동안 끙끙대며 만들어 진 것이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세 가지 목표 아래 아홉 가지 실천덕목을 설정해서 청학 스님을 통해 법정 스님께 제출,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구먼” 하시면서 스님이 인가하여 「맑고 향기롭게」살아가기 운동이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었다. 
“그러니까 맡아야지요.”

그로부터 며칠 후, 법련사 비좁은 방에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칠 단체의 명칭과 직책과 기구와 책임자를 청하는 자리에서 법정 스님이 느닷없이 “본부장은 윤 거사가 맡으시오.”하시는 게 아닌가! 솔직히 나는 그때 아찔했다.
“스님, 그건 절대로 안됩니다!”
“왜요?”
“저는 술 마시지요, 담배 피우지요, 그리고 그보다도 더 나쁜 짓 많이 하는 사람이라 맑고 향기롭지 못한 사람인데, 감히 제가 어찌 ‘맑고 향기롭게’의 본부장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안됩니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법정 스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맡아야 됩니다. 아시겠소?”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맑고 향기롭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고? 그러면 지금 당장부터라도 맑고 향기롭게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찍소리 한 마디 못한 채 오늘까지 17년 ‘엉터리 본부장’을 해 왔으니 이 어리석은 재가제자(在家弟子)는 어느 세월에 스님께 빚을 갚을까.

“나를 밤무대까지 뛰게 하다니….”

1994년 겨울이었다. 그해 처음으로 서울 순화동에 있는 중앙일보사의 ‘호암아트홀’을 빌려 제1회 ‘맑고 향기로운 음악회’를 열게 되었다. 이날 밤 음악회를 시작하기 전에 ‘맑고 향기롭게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는 순서가 있어서 부득이 법정 스님께서 무대에 올라가 장학생으로 선발된 중고등학생들에게 직접 장학증서를 수여해 주십사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한 말씀 하셨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스님?”
“늙은 중 밤무대까지 뛰게 하니 말입니다.”
“예에? 밤무대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밤무대에는 오르지 않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번만 용서하십시오.”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석천 거사도 , 해월 보살도 스님도 함께 웃었다.
법정 스님은 뜻밖에도 유머가 넘치는 스님이셨다.

겸손하고 또 겸손한 스님

흔히 법정 스님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엄격하고 까다롭고 무서운 스님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님은 당신 스스로에게는 냉혹하리만큼 엄격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대할 적에는 부드럽고, 겸손하고 포근하기 그지 없었다.
찾아온 참배객이 스님께 삼배(三拜)를 올리면 “절은 한번만 하면 됐습니다”하고 합장하며 일어서서 더 이상 못하게 만류하셨고, 손님이 떠날 때는 언제나 문 밖까지 나가셔서 극진히 배웅하셨다.

근 20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스님을 모시고 강원도 춘천에서부터 전주, 광주, 창원, 부산, 대구, 청주, 강화 등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법회를 열었는데, 그야말로 스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였다.

 
1996년 운문사에서 여름수련회를 마친 후 대중들과 함께 선 법정 스님과 윤청광 본부장.

한번은 내가 운전을 하고 내 차로 스님을 모시고 춘천법회에 가게 되었는데, 당시 내 차가 소형차라 자리가 비좁았다. 그래서 당연히 스님을 뒷자리에 모시려고 뒷문을 열어드렸는데 한사코 앞자리인 운전석 옆자리에 앉으시겠다는 것이었다.
“어이구 스님, 뒷자리에 편히 앉아서 가셔야지 춘천까지는 장거리입니다.”
“허허, 무슨 말이요? 오너가 운전하는 차는 앞자리가 상석이라는 것쯤 나도 아는데, 나를 왜 굳이 상석에 안 앉히고 말석에 앉히려고 그러십니까? 나도 상석에 좀 앉아서 갑시다.”

스님은 기어이 그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신 채 꼼짝도 앉으셨다.
법회를 위해 또 다른 지방도시에 가셨을 때였다. 공항에서 스님을 모시고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 지방 불자들이 영접을 나와 있었는데 스님을 극진히 모시기 위해 최고급 승용차인 벤츠를 대기시켜놓고 스님을 벤츠로 안내했다. 그 때 스님께서 나를 불렀다.
“우리 저 차 타지 말고 그 뒤에 있는 승합차 타고 갑시다.”
스님은 기어이 일행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셨다. 지극정성 잘 모시려 했던 신도님께 우리가 얼마나 죄송했던지 모를 지경이었다.

“전생에 다 해봤어.”

‘맑고 향기롭게’ 이사회가 있을 적이나 지방 법회 때에는 스님을 모시고 공양을 함께 들게 되는데 재가자들에게는 곡차도 마시게 허용하시고, 불고기나 생선회 먹는 것도 나무라지 않으셨다.
스님은 늘 말씀하셨다.
“여럿이 먹는 게 식사요 공양이지, 혼자 먹는 건 급유야, 급유! 기름 떨어진 자동차에 기름 넣는 급유라구.”
짠한 마음으로 재가자들끼리만 곡차를 마시고 생선회를 먹기가 죄송스러워서 빈말로라도 스님께 한마디 올리는 사람이 있는데, “스님, 약으로 아시고 곡차 한잔만 드시지요.” 하거나“약으로 아시고 회 한 점 드시지요.” 하면 스님께서는 웃으시면서 늘 같은 대답을 해주셨다.
“나는 전생에 많이 마셔 봤고, 전생에 고기도 회도 많이 먹어 봤으니까 전생에 못 잡수신 여러분들이나 많이 드시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불교 종단이 어려웠을 때 뜻있는 스님들이 법정 스님께 찾아와서 종단의 중책을 맡아 바로 세워 주십사 간청을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스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중 감투? 그거 전생에 다 써봤는데 쓸 만한 게 못되더라구. 못써보신 분들이나 쓰시라고 그러시오.”
평생토록 주지 감투 한 번도 안 쓰신 분이 바로 법정 스님이셨다.
당신께서는 술 한 방울 입에 대신 일이 없는 스님이지만, 해마다 이른 봄이면 손수 차를 운전하고 남쪽 땅 섬진강, 광양까지 매화꽃 맞이하러 가셨던 길에 매실주 직접 사서 소포로 보내주셨던 법정 스님.

연명치료 정중히 거절

요양 중이던 제주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당신은 이미 다 짐작하셨던 것일까. 스님께서는 연명을 위한 치료는 정중히, 그리고 결연하게 사양하셨다. 지극 정성 최선을 다 해준 의료진의 간곡한 권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연명을 위한 치료는 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극정성 보살펴준 의료진과 간병해 준 보살들.
수많은 불자들과 독자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제자들에게도 한 가지, 한가지, 분명히 이르셨다.
“…관을 짜지 말라, 승복이면 족하니 수의를 입히지 말라…장례의식을 치르지 말고 간소하게 다비하라…”
두 번째 문병 갔을 때 스님의 왼손을 꼭 쥐었더니 스님이 손에 힘을 주시며 “빨리 가고 싶다”고 하셨다. 송광사 불일암으로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줄 알고 “좀 더 회복되면 가셔야지요”했더니 스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시더니 가만히 고개를 흔드시며 힘겹게 말씀하셨다.
“빨리…죽고 싶다고…사람구실…못하니까…”
그래도 스님은 병마와 싸우는 분 같지 않게 평온하고 해맑은 얼굴이셨다.

다음, 다음날은 병세가 호전되었다. 분당 보살과 해월 보살이 주사기로 입안에 물을 넣어드리면 몇 차례 입안을 헹구기까지 하셨다. 회진하러온 의사가 스님께 여쭈었다.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불편하니까 내가 여기 누워있는거 아닙니까.”
스님은, 스님의 그 독특한 유머 감각까지 그대로 지니고 계셨다. 둘러 서있던 의료진도, 간병 보살님도 모두 웃었다. 의료진이 병실에서 나간 뒤 간병해오던 분당 보살님이 스님께 물었다.
“방금 다녀가신 의사 선생님, 누구신지 아시겠습니까 스님?”
스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분당 보살님이 다시 물었다.
“누구신데요?”
“염라대왕.”
스님은 지극정성으로 간병해 온 분당 보살님에게 감사의 표시를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 스님 얼굴에 살짝 장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며칠 전 피아니스트 노영심 씨가 송광사 불일암에서 꺾어온 홍매화 가지에 빠알간 꽃잎 하나가 막 피어나고 있어서 분당 보살님이 그 꽃을 스님께 보여 드렸다.
“스님, 꽃이 막 피어나고 있습니다.”
스님은 이제 막 피어나고 있는 빠알간 매화를 바라보시더니 천천히 팔을 들어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을 매화에 갖다 대시었다. ‘내가 불일암에 못가니, 매화 네가 여기까지 와 주었구나’ 하고 매화에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몇 달 아니 일 년 쯤은 더 견디어 주실지도 모른다. 애써 그렇게 기대하면서 병실을 나섰는데 그 모습이 살아계신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11일 오후 1시 51분, 노영심 씨와 나는 행지실 문밖에서 스님의 열반을 맞았다.
아! 아, 정말 스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기만 해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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