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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성에서 만난 허운대사] ④ 계족산 축성사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10.03.29 17:28
  • 댓글 0

타락한 성지를 청정도량으로 일구다

 
축성사 입구에 위치한 운이석과 진보정. 축성사는 허운 스님이 ‘불연(佛緣)이 사라지는 곳에 불법을 일으키고 운남성(雲南省)을 불국토로 만들어야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3년간 폐관정진 후 재건한 도량이다.

허운(虛雲, 1840~1959) 스님은 50세 초반, 해외 성지순례의 마지막인 미얀마에서 운남성으로 들어와 처음으로 계족산(鷄足山)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계족산이 불교 명산이라고 하여 순례를 왔는데, 계족산 승려들의 모습은 청정하지 못했다. 각 절의 승려들이 첩을 거느리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계족산 승려가 아닌 사람은 사찰 내에 머물 수도 없었다. 이때 스님께서는 ‘불연(佛緣)이 사라지는 곳에 불법을 일으키고 운남성(雲南省)을 불국토로 만들어야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계족산은 지장성지 안휘성(安徽省) 구화산, 보현성지 사천성(四川省) 아미산, 문수성지 산서성(山西省) 오대산, 관음성지 절강성(浙江省) 보타산과 함께 중국 5대 불교 명산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계족산은 대리시(大理市)에서 100km정도 떨어진 빈천현(賓川縣) 서북쪽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의 모양새가 닭의 발가락처럼 생겼다고 하여 계족(鷄足)이라고 한다. 계족산의 사찰들은 당나라 때부터 짓기 시작하여 송, 원, 명, 청시대를 거치면서 청나라 강희제 때는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사찰이 있었고, 승려만 해도 5000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중국의 불교 명산으로 볼 때 계족산은 결코 규모가 작은 산이 아니며 현대에도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폐허로 방치된 사지에 도량 건립

 
축성사 장경루. 이곳은 허운 스님이 법을 설하자 우담화 꽃이 핀 것을 상징해 만들어져 우화대라고 부른다.

10여년 후, 67세의 허운은 ‘계족산을 청정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제자 계진과 함께 계족산으로 들어와 석문(石門) 앞에 초막을 지었다. 초막을 짓기 시작한지 며칠 후 계족산 승려들이 몰려와 ‘계족산은 대대로 승려 자손들 땅인데, 이곳 자손이 아니라면 살 수 없다’며 초막을 불태웠다. 스님은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곤명(昆明) 서산(西山) 복흥사(福興寺)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3년간 폐관(閉關, 무문관) 수행했다.

폐관에서 나온 스님은 운남성 일대의 여러 곳에서 설법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법을 설했다. 대리시 제독인 장송림과 이복흥이 숭성사(崇聖寺)에서 스님의 『법화경』 강설을 듣고, 허운에게 귀의했다. 마침 이 두 관리의 도움으로 인해 허운은 계족산에 축성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

허운은 계족산 서쪽, 잡초만 무성한 후미진 곳에 움막을 지으면서 시작된 곳이 바로 축성사이다. 원래 이 터는 발우암(鉢盂庵)이 있었는데 명나라 이후 상서롭지 못한 이미지로 알려져 폐허가 된 곳이다. 허운이 불사할 당시 영상사(迎祥寺)라고 하다가 불사를 마친 후 축성사(祝聖寺)로 불리었다. 1952년과 1963년 2번에 걸쳐 중건했으나 문화혁명 때 파손되었고, 1980년 정부의 도움으로 축성사가 중건되었다. 허운은 당시 승려들과의 충돌을 염려해 구석진 곳에 세웠지만 현재는 계족산 중심지 역할을 한다.

작은 움막인 축성사에 많은 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점차 불사가 되어갔다. 또한 계족산 각 사찰의 승려들이 나쁜 습관을 버리고 계율을 회복하며 바른 법을 펼침으로서 청정한 불교 명산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축성사에 가기 위해 대리시에서 빈천현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정류장에 내리니 오전 11시이다. 아침 공양을 하지 않았던 터라 계족산행 버스를 기다리는 와중에 음식점에 들어갔다. 먹을 만한 음식이 없어 만두 몇 개를 달라고 했더니, 주인은 “저 만두에는 고기가 들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만두를 드세요”라고 하였다. 음식점 주인은 중국인들이 아침 식사용으로 먹는 ‘만두[만토우]’를 주었다.

이런 경험은 며칠 전에도 했던 터라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승려에게 고기가 들어있음을 말해주면서 먹지 말라는 뜻이다. 한국의 장사꾼이라면 어떨까? 중국인들의 승려에 대한 마음이 고맙고,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이런 중국인들이 있어 나는 중국을 좋아한다.
1시간 반을 기다려도 버스가 출발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시간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사람이 다 모여야 출발한다. 이 점을 알기 때문에 마냥 기다리다 결국 계족산 가는 몇 사람과 함께 택시를 타고 들어갔다.

빈천현에서도 계족산 입구까지 40km. 그러나 아직 도로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고생길이 훤하다. 또 계족산 입구에서 축성사까지 강원도 한계령 같은 고갯길로 한참 올라간다. 이렇게 한번 찾아가는 일도 험하고 힘든데, 100여 년 전에 스님은 어떻게 이런 험한 곳에 불사할 생각을 했을까?

당시 스님의 법력과 명성으로도 얼마든지 교통이 편리한 도심 사찰이나 고찰에 머물 수 있었건만 계족산을 청정도량으로 만들고자 고생을 자청한 분이다. 스님의 원력이 지옥중생을 구제코자 지옥에 머무는 지장보살 원력과 무엇이 다르랴! 스님을 향한 존경심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까지 따스해진다.

오후 2시가 넘어 축성사에 도착했다. 도량에 들어서니, 자료에서 읽었던 운이석(雲移石) 터와 진보정(鎭寶亭)이 있고, 그 아래 연못이 보인다. 허운이 당시 불사를 진행할 무렵, 절터에 큰 바위가 있었다. 풍수하는 사람이 보더니 ‘바위가 백호를 상징하고, 상서롭지 못해 절이 쇠퇴하는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으나 도량에 어울리지 않아 옮기기로 했다. 10여 명의 장정이 3일간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아 포기했다. 허운은 바위 주위에 흙을 파고 지렛대를 이용해 승려들과 함께 바위를 옮겼다. 대리시의 문인들과 사대부들이 축성사에 찾아와 돌 위에 시를 지었는데, 운이석(雲移石)이라고 한 것이다.

허운은 축성사 불사를 위해 운남성 곳곳을 다니면서 불사금을 마련했고, 미얀마, 태국, 싱가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법을 설하며 축성사 불사금을 구했다. 이 무렵 허운은 광서황제와 서태후로부터 ‘운남 계족산 발우봉 영상사 호국 축성선사’라는 용장을 받았으며 ‘불자흥법대사(佛子興法大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황제로부터 ‘불지흥법대사’ 시호

 
조사전에 모셔진 허운 스님.

객당(客堂)에 들어가 지객스님을 뵙고, 한국 스님인데 하루나 이틀 묵겠다고 하였다. 중국의 큰 사찰들은 객스님이나 재가자들이 묵을 수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 재가자들은 식사를 포함해 하루 10원~20원(한국돈 1600~3000원) 정도를 보시금으로 내야 한다. 이런 점은 중국 사찰들의 일괄적인 것이며 불교신자가 아닌 누구라도 머물 수 있다.

젊은 비구스님께서 방을 안내해주고, 그 무거운 가방을 손수 들어주었다. 중국 비구스님들은 내가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대체로 친절하다. 짬을 내어 지객스님께 ‘허운스님에 관한 자료나 사진을 달라’며 귀찮게 하는데도 수고로이 구해다 주었다. 고마운 분인데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이 사찰에는 비구스님이 20여 명 정도 상주한다.

오후에 조사당에 들어가니, 스님의 좌상이 당우 중간에 모셔져 있고 사방으로 스님에 관한 행적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롯이 이번에 스님 발자취를 찾아 중국에 왔음을 새삼 느낀다. 스님께 3배를 올리며 발원했다.

“앞으로 스님을 거울삼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절집 밥 축내지 않겠습니다.”
조사당을 나와 바로 옆에 위치한 사리탑으로 옮겨갔다. 스님의 사리는 여러 곳에 나누어 모셔져 있다. 허운사리탑 옆에 관림(寬霖) 노화상 사리탑이 있는데, 최근에 열반하였다고 한다. 중국이 공산혁명으로 인해 수행하는 승려가 없을 것 같지만, 훌륭한 수행자가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전사-흥운사 재건에도 힘써

 
허운 스님 사리탑.

조사당 옆 당우는 장경루이다. 스님께서 북경, 미얀마,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노구의 몸으로 직접 가져다 놓은 경전이 이곳에 있다고 하는데 볼 수는 없었다. 또한 바로 이곳이 스님께서 법을 설하자 우담화 꽃이 핀 것을 상징한 우화대(雨華臺)이다. 계족산 입구 석문(石門)에서 종소리가 울린 적이 없었는데, 허운이 계족산에 상주하면서부터 종소리가 울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런 신이한 일화는 글을 쓰면서 문자화하고 싶지 않지만, 스님의 성스런 덕과 법문이 미물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 일로서 나는 학자이지만, 당연히 받아들인다.

허운은 계족산의 나전사와 흥운사 재건불사에도 힘썼다. 다음날 축성사에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흥운사에 갔더니, 문화혁명으로 인해 파괴된 사찰을 복원불사하고 있었다. 또한 축성사 부근에 허운사(虛雲寺)라는 절이 있다. 예전에 만수암(萬壽庵)이라는 비구니 사찰인데, 중건하면서 허운사라고 개명하고 스님의 유물을 전시할 예정으로 보인다.

저녁 6시 공양을 마치고 도량에서 포행을 돌고 있는데, 티베트 승려를 포함한 재가자 6분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평균 60세가 넘은 분들이었고, 계족산을 포함해 중국의 4대 불교 명산을 순례하고 있는데, 계족산이 마지막이라고 한다. 1시간 전 축성사 스님들이 예불할 때, 티베트 재가자들이 대웅전 앞 땅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분들이었다. 티베트인들의 불심을 알고 있는지라 티베트 사람들을 보면 애잔한 연민심이 앞선다.

그들과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를 포함해 한국불교신자, 전 세계 사람들이 ‘Free Tibet!’을 외치니, 희망을 잃지 말라.”면서 ‘Free Tibet!’을 써주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영문을 알지 못했다. 다시 한자로 “自由 藏族(자유장족)”이라고 써주었더니, 엄지손가락까지 들어 보이며 모두 환하게 웃는다. 처음 써준 영문을 부적처럼 가지고 다닐 거라고 한다.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혹시 한족(漢族) 스님과 재가자들이 들을까 주위를 살폈다.

솔직히 티베트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중국은 절대 티베트에게 자유를 줄 리 없다. 중국은 티베트가 독립하도록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못된 패권주의를 어떻게 세계는 가만 두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찰에서 묵으면 비누와 칫솔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다시 지객스님께 가서 세수 비누를 하나 달라고 했더니 한참 후에 빨래비누를 가져다준다. 중국 비누는 한국 비누보다 좋지 않지만 이것도 감지덕지라 생각하고, 세수하면서 빨래비누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번뇌까지 제거되라고 읊으면서.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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