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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원로의원 동춘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10.05.19 08:26
  • 댓글 0

물 소리도 깨달음 소리 법음은 온 세상 가득해

내가 있기에 우주도 존재
집착 없는 ‘나’가 ‘참 나’

마음 생멸 어디서 오는가
내 안에서 찾아야 체득

 
지금까지도 손수 밥짓고 빨래하며 지내는 동춘 스님은 “천상락(天上樂)은 우리 마음에 있으며 그것이 부처님께서 오신 뜻”이라고 강조했다.

‘납승의 본분에 따른다면 사계절도 구별하지 못했을 것인데, 여덟 절기를 어떻게 알았겠는가?’했던 서암영각(瑞岩永覺)은 ‘이불이 따뜻해지면 비로소 봄이 온 줄 알았고, 시든 잎이 섬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가을빛을 제대로 알았다’고 했다. 바위동굴에 은거하며 ‘나왔다 사라졌다 거두었다 펼쳤다 하며,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이 되거나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거나 상관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선가에서도 암자나 토굴에서 홀로 지내시는 선지식이 있다. 조계종 원로의원인 동춘 스님은 평생을 토굴에서 생활했다 과언이 아니다. 토굴생활이 무소유 실천의 단면임과 동시에 목숨 건 용맹정진의 상징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면 동춘 스님이 걸어 온 50여년의 정진여정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경주 기림사 지족암 지척 거리에 황토로 지은 토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보아도 딱 한 사람 머물만한 공간이다. 부처님은 ‘출가수행자는 잠을 청할 때도 나무 밑에서 생활해야한다’는 ‘수하좌(樹下座) 원칙’을 계율로 정했는데, 율장에서도 ‘만약 비구가 스스로 방사(房舍)를 지을 경우, 마땅히 그 양(量)에 따라 지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양’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손 뼘을 기준으로 정해진다고 하는데 굳이 지금으로 환산하면 대략 방사의 길이는 8.7m이며, 넓이는 5m 정도라고 한다. 동춘 스님의 토굴이야 말로 율장에 ‘딱’ 맞는 방사요, 토굴이다.

토굴에 머무는 선사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동춘 스님 역시 누가 찾아오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법’에 관한 물음이라면 사양하지 않지만 시간만 낭비하는 무의미한 말은 서로 나누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암시일 것이다. 오죽하면 ‘공양만은 절에서 하시라’는 기림사 주지 종광 스님의 청도 마다하며 손수 밥 짓고 빨래하며 지내겠는가.

자리에 앉자마자 동춘 스님은 “먼 데서 예까지 오셨으니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 보시라” 했다. “며칠 있으면 부처님 오신 날이니 그 의미를 말씀해 달라”고 청하자마자 “오늘은 무슨 날인데요?”하고 다시 물어 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부처님은 49년을 설법하셨지만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 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또 다시 침묵이다. “부처님은 마음 심(心)자로 설법한 것이지 육신으로 설법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을 알지 못하면 봉축일은 석가모니탄신일 뿐이라는 뜻일까?
“싯다르타 태어나신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듯, 내가 태어난 날이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내가 있어야 이 우주도 있고, 부처님도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과 이치도 쉽게 다가옵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어찌해야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일까? 마음을 깨끗이 해가면 조금이라도 알아갈 수 있을까?

“마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어떻게 생겨났다가 사라지는지를 알아야 깨끗하게 하든 말든 하지요. 마음이 무언지 모르거나,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은 업력 때문입니다. 이생의 집착 역시 무명으로 작용해 눈을 어둡게 하지요.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밖에서만 마음을 찾으려 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에 의지하며 선지식과 조사 스님들의 일언에 귀 기울이면 조금씩 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지 않고는 그 마음의 진면목을 체득하기 어렵지요.” 집착은 분별에서 온다고 하는데 그 분별만 끊으면 집착도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

“근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금생에 끊기는 어려울 겁니다. 다만, 선악에 대한 분별만이라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 보세요. 인연법을 알면 가능합니다.”
동춘 스님은 우선 ‘행위’ 보다 ‘의도’에 눈을 돌려보라 했다. ‘불살생’(不殺生)이란 말도 살생하지 않는 행위보다 그 속에 담긴 의도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가 마실 수밖에 없는 공기 중에도 무수한 미생물이 있는데 이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다.

“강도가 돈을 강탈할 목적으로 나에게 와 내놓으라면 내 입장에서 강도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강도가 내게서 빼앗은 돈을 어느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 사람에게 강도는 좋은 사람이 되겠지요? 행위만 볼 때 이 강도는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상황에 따른 의도를 살피지 않으면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자신도 이 사회에서 무엇인가 행할 때 어떤 의도로 행할 것인지를 먼저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의도가 선하다면 행위가 다소 불순해 보여도 악행으로만 남지는 않을 겁니다.”
행위와 의도를 갈파한 스님은 다시 인연법으로 선악을 이어갔다.

“이 세상에 선만 있다면 선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이 있기에 선이 있을 뿐입니다. 내 돈 빼앗아 간 도둑, ‘악인’이라 일평생 욕하며 분노 일으켜 봐야 나만 손해입니다. 그 도둑과 내가 전생에 악연이 있어 금생에 이렇게 만났구나 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 이웃이 나를 욕한다 해서 보복할 생각 말고 전생의 악연이 있어 지금 이렇게 힘들구나 생각해 보세요. 내가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악연은 정리되고 새 인연이 맺어지는 겁니다.”

선악은 세속에 분명 있지만 그 선악도 한 생각 바꾸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혜를 발현한다면 악연도 선연으로 돌릴 수 있음을 설하고 있는 것이리라. 백운(白雲)도 말했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구별은 없다. 미추의 구별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고.
작지만 아담한 토굴을 보니 새삼 우리 불교계에 일고 있는 호화토굴의 문제점에 대한 생각이 스쳐갔다.

세상 선악미추는 분별
인연법 알면 화 안 내

내가 태어난 그 날이
바로 부처님오신날

“제 토굴은 옳고 다른 분의 토굴은 그른가요? 그것도 분별일 뿐입니다. 복이 있어 좋은 토굴에 머무는 것이겠지요. 어떤 토굴인가에 앞서 어떤 생활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심지를 잘 보살피며 경계에 끄달리지 않으면 됩니다. 불광(佛光)이 작고 누추한 토굴에만 비춰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출가 전 청년 시절에도 나뭇가지와 비닐로 엮은 토굴에서 수행할 만큼 동춘 스님은 이 ‘분야’에 관한한 독보적이다. 어느 정도의 근기가 되었을 때 토굴에 들어가야 하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대중과 토굴 생활의 장단점이 각각 있습니다. 다만 자신을 스스로 다잡기 전까지는 대중과 함께 수행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나태함도 금방 잡을 수 있고 선병 치유도 이른 시일 안에 할 수 있지요. 무엇보다 하심(下心)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요. 토굴 생활 중에는 많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앉으면 눕고 싶고, 한 번 망상을 피우면 저 우주 끝까지라도 가려 하지요. 스승의 허락을 받은 후 토굴에 들어가는 게 그나마 낫지 않을까 합니다.”
“내 말보다 지족암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 법문이 더 좋다”며 “이제 그만 일어나자”는 스님에게 불자들에게 당부할 한마디를 더 청했다.

“수행도 좋은 생각 내기 위해 하는 겁니다. 부처 될 여건은 다 갖춰져 있으니 자신을 살피며 인격을 성장시켜 가 보세요. 천상락(天上樂)은 우리 마음에도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뜻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자, 이젠 물소리 들으시지요!”

‘물소리 들어보라’함은 우리가 지나치는 계곡 물소리, 풀 한 포기에도 법음이 배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옛 선인이 말했다. “새들의 지저귐, 푸른 계곡과 물고기의 도약, 폭포소리의 울림! 그대들은 이렇게 수많은 경계의 현상들이 그대들에게 깨달음의 실마리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아는가? 만약 안다면 참구하기 좋을 것이다.”
지족암 계곡 물소리 청량하기 그지없다. 동춘 스님은 이날 문제를 하나 내놓았다.

“우물이 있습니다. 퍼내면 다시 솟아 제자리요, 더하면 물이 빠져 제자리입니다. 어찌해야 우물을 더 많이 담을 수 있습니까?”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동춘 스님은

19세 되던 해인 1956년 부산 선암사에서 석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전국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봉암사, 각화사 주지 소임을 맡았던 스님은 현재 기림사에 주석하고 있다. 어린이 도서 60여 만부를 배포한 바 있는 스님은 최근 『관세음보살 이야기』 30만부를 전국 사찰을 비롯한 불자들에게 보시했다. 현재 조계종 원로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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