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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스님 다삼매를 찾아] 5. 수락산 학림암-추사와 첫 만남

기자명 법보신문

佛法 물으려 눈길 헤치고 온 젊은 추사와의 조우

 
1815년 초의 스님이 평생지기 추사를 처음 만난 학림사. 초의 스님과 추사의 만남을 지켜보았을 600년 된 반송이 지금도 학림사를 지키고 있다. 사진=도서출판 동아시아 제공

수락산 학림암은 초의 스님이 첫 상경에서 평생지기 추사를 처음으로 만난 곳이다. 이 암자는 초의와 추사의 교유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수락산은 도봉산과 북한산을 마주하고 있다. 간간히 드러난 화강암 암벽이 단아하고 신비로운 산.

수락의 넓은 품은 동쪽 사면에 금류계곡과 서쪽으로 쌍암사, 석림사를 품고 남쪽으로 계림암, 흥국사를 끼고 있다. 학림암은 덕능고개에서 불암산으로 이어지는 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암자인데 지금은 학림사라 부른다. 1861년 가을, 초의 스님이 쓴 ‘제해붕대사영정첩(題海鵬大師影幀帖)’ 발문에는 당시 이들이 만났던 정황을 그림처럼 그려냈다.

지난 1815년 해붕 노화상을 모시고 수락산의 학림암에서 한 해의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을 때 하루는 추사가 눈길을 헤치고 노스님을 찾아와 공과 각의 소생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추사가) 하룻밤을 (학림암에서)보내고 돌아갈 때 노스님께서 (추사에게) 글을 써 주었다. 이 글에 ‘그대는 집 밖을 쫓아다니고 나는 집안에 앉아있네. 집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집안에는 원래 번뇌가 없다’라고 하셨다. 노스님이 거듭해 전해주신 조화로운 가르침은 생각해 볼만 하다.

(昔在乙酉 陪老和尙結臘於水落山鶴林菴 一日阮堂披雪委訪 與老師大論空覺能所生 經宿臨歸 書壹偈於老師 行軸曰君從宅外行 我向宅中坐 宅外何所有 宅中元無火 可想也龢和尙再傳之燈)

추사와 해붕 스님이 어떤 시기에 무슨 인연으로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정학연과 해봉 스님이 잘 알고 지낸 사이였던 것으로 보아 추사가 해붕 스님을 찾아간 것은 정학연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눈이 내렸던 어느 겨울날 눈길을 헤치고 해붕 스님을 찾아 온 추사의 열의는 그 뜻이 분명하다. 초의가 해붕을 노스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추사와 해붕 스님의 세대 차이도 엄연해 보인다. 그들이 벌린 공각(空覺)의 소생(所生)에 대한 담론은 서로간의 법거량이었음이 분명하다.

해붕 스님의 한판 승부는 그가 추사에게 써준 일갈에 잘 드러난다. 진리를 찾아 집 밖을 떠돌던 추사의 행각을 빗댄 해붕 스님의 노련한 한 마디, 은산철벽보다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 ‘집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집안에는 원래 번뇌가 없다’하던 해붕 스님의 호쾌한 가르침은 초의의 마음속에 각인된 진리의 등불이었으리라. 하나를 쳐서 양변을 울리는 해붕의 장쾌한 법문은 그를 호남의 칠고붕(七高朋)이라 일컫던 명성과 걸맞은 것이다.

또 이어 초의는 “호운 우공이 1856년 과천병사(추사)로 해붕화상찬을 부탁하였다. 5년이 지난 1861년 가을, 호운 스님이 해남의 표충사 주관 유사로 부임하던 날, 해붕의 화상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은) 아마 내가 평소 노스님에게 성의를 다하고 잠시도 잊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이에 옛날을 연모하여 새로 이 첩을 장황해서 보낸다(有浩雲雨公 咸豊丙辰 乞受景贊於果川丙舍 越五年辛酉秋 雲師爲海表忠主管有司莅任之日 懷景贊來示恂 蓋和恂之素所懇款於老師而不暫忘之故也 余乃戀舊感 新莊潢求帖以歸)”라 하였다.

해붕 스님의 직전 제자 호운 스님이 초의를 보여 주기 위해 가져온 이 영정첩에는 1856년 5월 추사가 해붕 스님을 위해 성의를 다해 쓴 「해붕대사화상찬」이 들어 있었다. 추사는 이 화상찬을 쓴 후,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추사가 이 화상찬을 짓기 전 호운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평생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홀연 서신을 보내오니 심히 기이한 일이다. 해붕노사의 문하라 하니 인연이 될 만하다. 생소한 손님이 불쑥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해붕노사는 나의 옛 벗이다.”고 한 것에서 그가 이 화상찬을 쓰게 된 연유를 분명히 밝혔다.
호운은 해붕 스님의 직전 제자이다. 그가 서산대사의 가을 제사를 주관하는 소임을 맡아 대둔사에 올 적에 이 영정을 가슴에 품고 와 초의에 보여 준 것이다.

초의가 학림암에 머물게 된 것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1815년 대둔사를 출발해 한양에 도착한 그는 수종사에 머물렀다. 당시 수종사는 주거 환경이 열악했는지. 추운 겨울을 이곳에서 지내야하는 그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정학연은 학림암의 해붕 스님에게 부탁해 초의가 여기에서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해붕 스님과 정학연이 언제부터 교유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하지만 해붕 스님이 원래 선암사 승려라는 사실에서 이들의 교유는 강진의 다산 적거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초의가 학림암에 머물렀던 당시 이곳의 사정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듯하다. 1881년 김순항이 쓴 『학림암중수기』에 “1780년 최백과 궤징 스님이 낡고 기운 것을 바로 잡아 중수하였고, 1830년 주담화상이 다시 중수했다”는 것으로 보아 초의가 머물렀을 당시의 학림암은 퇴락한 암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그는 수종사와 학림암, 만연각, 서성에서 지내면서 정학연과 김명희, 옥경산방의 이노영과 함께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특히 정학연과 함께 만향각에서 지은 「만향각여유산공부(蔓香閣與酉山共賦)」는 학림암에서 다시 수종사로 거처를 옮긴 후 지은 것이다.

열수에 온지도 벌써 두 해 째 (冽水踰來便兩年) / 단잠 자던 어여쁜 풀들이 놀라서 깬다.(忽驚芳艸翠芉眠) / 남쪽 구름 막히지 않고 보이는 높은 누각(南雲不礙重樓眼) / 북쪽 끝은 사방으로 이어졌구나.(北極終次四度天) / 흰 나비 난간에서, 붉은 꽃비 밖에서 춤추고(粉蝶舞欄紅雨外) / 녹음 진 저편 애처롭게 들리는 꾀꼬리 소리(黃鸝聲切綠陰邊) / 그립구나! 대둔사의 종소리 들으며 (深思故壑鐘聲裏) / 고요히 앉아 선정에 들던 일이(靜有寒燈照淨禪) 

 
1856년 5월 추사가 해붕 스님을 위해 성의를 다해 쓴 ‘해붕대사화상찬’.

열수는 정학연이 사는 곳. 초의가 이곳에 온지 두 해 째라는 것은 1815년 겨울에서 1816년 봄까지를 말한다. 당시 그는 학림암을 떠나 다시 수종사로 거처를 옮긴 듯하다. 춘풍에 봄풀은 단잠에서 깨어나고 흰 나비와 꽃비가 난다는 것으로 보아 화창한 봄날인 듯하다. 그가 “떨어진 붉은 꽃 잎 자리에 가득하고 살포시 이는 안개 하늘을 덮었다.”라는 시구에서도 만향각의 봄은 깊을 대로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의가 정녕 그리워한 것은 종소리를 따라 선정에 들던 깊고 고요한 세계이다. 진한 향수가 행간 사이에 묻어나 초의의 인간적인 모습이 실감나게 드러난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가 불현듯 떠오른 곳이 학림암이다. 계획도 없이 학림암을 찾아 나섰다. 학림암(현재 학림사)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어찌나 복잡한지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어렵다. 마을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어본 후에야 겨우 절로 들어가는 산길을 찾았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연세 지긋한 노스님과 젊은 스님 두어 분이 울력을 하고 있다. 아마 패여 나간 산길을 고치는 듯. 수행과 울력, 이 아름다운 정경이 가을 산 빛과 어우러져 성성한 선미를 드러낸다.

학림암은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학포지란(鶴抱之卵)의 형국이라 학승을 많이 배출하는 지세를 지녔다고 전한다. 아마 예부터 학림암이라 부른 것은 이 형세에서 연유된 것은 아닐까. 산문을 들어서니 정갈하고 짜임새 있는 가람의 배치, 법당을 오르는 계단 양 옆으로 곱게 놓인 꽃 화분들. 화강암 돌계단과 붉은 꽃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고 있다. 법당 왼편에 서 있는 600년 된 반송(盤松)에는 학이 깃드는 곳인가.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당당하고 기품 있는 이 소나무는 학림사를 지켜온 수호수(守護樹)가 분명하다.

180여년 전 초의 스님을 반겼던 이 소나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행여 옛 얘기 들려줄까하여 가만히 소나무에 귀를 대본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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