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마을들을 걷다보면 ‘나무아미타불’의 여섯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흔히 만나게 된다.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염불종의 절들은 물론, 길가에서도 숲속에서도 이런 비석들이 쉽게 눈에 띈다. 교토히가시야마[東山]의 구로다니(黑谷)라도 찾아가 보면, 육자(六字)를 새긴 비석의 무리들이 마치 숲처럼 우뚝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안에 그 수가 전부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마 어떤 비석도 육자를 새긴 비석의 수에는 크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전적으로 범음(梵音)이지만, 지금은 일본의 언어에 녹아들어, 어느 한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그것이 “무량수(無量壽)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임을 모르고 있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범음 ‘나무아미타불’이 일본어로서 그대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햐쿠만벤[百万遍]’이라는 절이 있는데, 옛날부터 하루에 백만 번의 염불을 외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길이가 3~4칸(間)에 이르는 염주가 있어서 종종 여러 명의 신도들이 둥글게 둘러앉아서, 염주알을 하나씩 돌리면서 명호를 외운다. 일념(一念)이냐 다념(多念)이냐 라는 다툼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염불행자(念佛行者)에게는 모든 일상생활이 염불이었다.
무릇 신자의 입으로부터, 아니 신자가 아닌 사람의 입에서까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목소리가 몇 번이나 터져 나왔을까. 천문학적인 숫자로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상행삼매(常行三昧) 등이 말해지는데, ‘행’이란 칭명(稱名)의 행이어서, 오히려 생활이 육자를 부르는 소리 속에 있었다 할 수 있으리라. ‘나무아미타불’이 족히 일본어로 변모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잊으려 해도 이미 잊기 어려운 단어이다. 지금도 칭명의 소리는 몇몇 지방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며, 수많은 *묘코닌(妙好人)을 낳고 있는 불가사의한 힘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변화가 극심하다. 특히 지식에만 치우친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을 회의(懷疑)로 이끌어 버렸다. 그렇기에 육자의 불가사의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날로날로 줄어만 간다. 그렇지만 이를 내버려 두어도 좋은 것일까? 적어도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이 육자로 인해서 편안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회의가 인간에게 좀 더 편안한 안심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으로도 좋겠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간의 삶은 날마다 불안에 빠져든다. 뭔가 큰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육자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설령 과거와 같은 형태로 칭명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되살아나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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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코닌 : 에도시대 정토진종의 재가신자로서, 내세에 극락에 왕생하리라 확신하고서 현세를 살았던 사람들.
일본불교사연구소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