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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초의차와 사대부

기자명 법보신문

장안의 명사들 초의차 깊은 맛에 흠뻑 젖다

신위·박영보 등 사대부
차 문화 부흥 주역으로
초의 스님의 공적 찬탄

 

 

▲훗날 병조판서를 지낸 박영보가 1830년 초의 스님과 청교(淸交)의 증표로 지은 ‘남다병서’.

 


1830년 겨울, 상경한 초의 스님은 두어 해를 한양에서 지내면서 수종사와 다산 댁, 홍현주의 청량산방 그리고 신위의 북선원, 금선암을 오가며 홍현주의 지인들, 신위, 정학연형제 등과 교유하면서 그가 갈고닦은 선시의 시경(詩境)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1831년 정월 중순 초의를 위해 마련된 청량산방 보상암의 아름다운 고회(高會)는 홍현주가 주관한 시회(詩會)로, 윤정진, 이만용, 정학연, 홍희인, 홍성모 등, 장안의 명사들이 그의 별서에 모여 기량을 뽐냈다. 이들의 아회(雅會)는 촛불을 켜고 봄날을 즐겼던 이백(李白)의 호기를 닮으려는 듯,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초의는 이 모임의 따뜻한 정회를 “운을 나누어 시를 지으니 (이것은)정말로 좋은 인연이다(分韻賦詩信宿)”라 한 것으로 보아 서로간의 마음이 흡족했었나보다. 이들이 남긴 이날의 의경(意境)은 ‘청량산방시축’에 녹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초의가 가져온 차는 이들에게 새로운 차의 경지를 경험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는 박영보(1808~1872)가 쓴 ‘남다병서(南茶幷序)’에 드러난다. 박영보는 어떤 연유에서 ‘남다병서’를 지었을까. 그의 말을 들어보자.

 

南茶는 영남과 호남에서 난다. 초의는 그곳에서 수행을 하는데 정약용과 김정희 는 모두 문자로써 교유하였다. 경인(1830)년 (초의가) 겨울 한양에 올 때, 손수 만든 차 한포를 예물로 가져왔다. 이산중이 이 차를 얻어 이리저리 돌아서 나에게까지 (초의차) 오게 되었다. 초의차가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마치 금루옥대처럼 귀하게 대접받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정갈히 자리를 마련하고 (차를)마시며, 장구시 20운을 지어 초의 선사에게 보냅니다. 혜안으로 정정해주시고 아울러 화운해 주십시오.


(南茶湖嶺間産也 草衣雲遊其地 茶山承旨及秋史閣學 皆得以文字交焉 庚寅冬來訪于京師 以手製茶一包爲贄 李山中得之 轉遺及我 茶之閱人 如金縷玉帶 亦已多矣 淸座一啜 作長句二十韻 以寄禪師 慧眼正之 兼求郢和)


박영보의 견해로는 차가 영호남에서 나며 초의가 그곳에서 수행하면서 차를 만든다는 것이다. 당대 문예의 종장이었던 다산과 추사는 학문을 통해 초의와 교유했다. 그리고 완호의 비문을 받고자 상경했던 초의는 손수 만든 차를 가져와 교유했던 인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초의차를 맛보게 되면서 그의 차는 귀한 보물처럼 여겨졌다는 것이다. 그도 초의차를 우리면서 정갈하게 주변을 정리했다고 하니 초의차를 대하는 그의 성의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외에도 그는 이 다시를 초의에게 보내 바로잡아 줄 것을 청하고 이 시에 화답하는 시를 정중히 구한 것. 이로써 박영보가 이 시를 지을 당시만 해도 초의와 교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박영보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신위의 제자이다.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박문수의 4대 손인 그의 자는 성백(星伯), 호는 열수(洌水), 금령(錦)이다. 1844년 증광문과의 병과에 급제했고청북의 암행어사를 지냈다. 1862년 동지부사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공조와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그가 초의와 만난 것은 1830년 ‘남다병서’를 지어 청교(淸交)의 증표로 보낸 이후 로 여겨진다.


1831년 초의는 금강산 유람 길에 올랐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돌아오던 길에 그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에서도 이들의 교유는 이 다시를 증표로 보낸 이후 더욱 친밀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다시를 지을 무렵 종로구 적선동 근처인 흥방서실에서 마포 근처인 서령(西)의 강의루(江意樓)로 잠시 거처를 옮겼다. 당시의 정황은 그의 문집 ‘서령하금집(西霞錦集)’를 통해 확인된다.


초의차 명성 알려지면서
금루옥대처럼 귀한 대접
“새로운 차의 경지” 평가

 

 

▲박영보의 스승 신위가 초의차를 찬탄한 ‘남다시병서’.

 


1830(경인)년 10월 10일, 내가 흥방(興坊)에서 서령의 강의루로 옮겨 왔다. 이때 신위가 물러나 용경(蓉涇)에 머물렀다. 용경은 소 우리 소리가 가깝게 들리는 곳일 뿐이다. 이때 창수한 시가 가장 많다(庚寅 十月十日 余自興邦 移居于西泠江意樓 是時申紫霞侍郞 退居蓉涇 蓉涇一牛鳴地耳 一時酬唱 爲最多)


용경은 신위가 머문 곳. 외척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이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신위는 강화유수를 사직하고 시흥의 자하산방에서 칩거했다. 그가 용경에 온 것은 각질을 치료하기 위한 것. 여기에서 2여년 간 머물다 돌아갔다.
박영보가 “1830년 10월10일 신위가 용경에 머물렀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용경은 강의루와 가까운 곳인 듯, 스승 신위를 위해 차를 다리는 박영보의 성의는 신위의 ‘남다시병서(南茶詩幷序)’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다는 호남과 영남에서 나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중국에서 차 씨를 가져와 산과 골짜기에 파종하였다. 종종 차 싹이 돋았지만 후인들은 쓸모없는 잡초라 여겨 (차의)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했다. 요즘 들어 차가 나는 산지의 사람들이 차를 따다가 (차를)만들어 마셨으니(이것이) 곧 차이다. 초의는 몸소 차를 만들어 당대의 명사에게 보냈는데 이산중이 (차를)얻어 박영보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나를 위해(차를)다려 맛보았다. (그가) 남다가를 지어 나에게 보이니 나도 그의 뜻에 화답하였다.


(南茶湖嶺間所産也 勝國時人 以中州茶種播諸山谷之間 種種有萌芽者 然 後之人以蓬蒿之屬 視之        不能辨其眞贋 近爲土人採之 蒸而飮之 乃茶也 草衣親自蒸焙 以遺一時名士 李山中得之分 于錦舲 錦舲爲我煎嘗 因以南茶歌示余 余亦和其意焉)


이는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실정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신위는 신라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차 씨를 가져와 골짜기에 심었다고 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입당사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했다(入唐廻使大廉 持茶種子來 王使植地理山)는 것을 말한다. 대렴이 차 씨를 가져온 것은 흥덕왕 3년(828)의 일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차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도 이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요즘 들어 차가 나는 산지의 사람들이 차를 따다가 만들어 마신다.”라는 신위의 증언은 조선후기 초의에 의해 촉발된 차 문화의 발흥을 두고 한 말이다. 당시 초의는 차를 만들어 장안의 명사들에게 보냈다는 사실도 이 다시를 통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로, 박영보가 스승을 위해 차를 다렸고, 차를 함께 맛본 후 이 다시를 지었다. 신위 또한 제자의 다시에 화운하여 ‘남다시병서’를 지었다. 이는 차를 함께 맛본 이들이 초의차를 품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구나 이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공경하는 모습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차는 단순한 물질에 불과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훈훈하게 소통하는 매개물이었음이 이들이 나눈 차에서도 명증하게 드러났다.


초의노사는 옛날부터 정토업(淨業)에 힘써 (草衣老師古淨業)/ 농차로 적체를 씻고 참선을 참구하네(濃茗洗積參眞禪)/ 여가에 글 쓰는 일로 깊은 시름 밝혀서(餘事翰墨倒寥辨)/ 당시의 명사들이 존경하고 따랐지(一時名士瓣香處)/ 눈보라치는 천리 길을 건너온 초의(雪飄袈裟度千里)/ 頭鋼과 같은 둥근 차 가지고 왔네(頭綱美製玉團圜)/ 오랜 친구, 나에게 절반을 나누어 단차를 보내니(故人贈我伴瓊玖)/ 그냥 둬도 선명한 광채, 자리가 찬란하다(撒手的皪光走筵)/ 나에게 수액인 차 마시는 버릇 생겨서(我生茶癖卽水厄)/ 나이 들어 맑은 몸이 견고해졌네(年深浹骨冷淸堅)/ 열에 셋은 밥을 먹고 일곱은 차를 마시니(三分飡食七分飮)/ 집에서 담근 강초처럼 비쩍 말라 가련하다(沈家薑椒瘦可憐)


▲박동춘 소장
박영보가 본 초의차는 둥근 차라 했으니 이는 떡차를 말한다. 초의차를 나누어 준 이산중은 박영보의 오랜 친구이고, 초의가 당대의 명사들에게 존경 받은 이유는 시를 잘 지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그는 차를 마시는 해가 거듭될수록 몸이 맑아졌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가 밥보다 차를 더 좋아했다니 어찌 신선처럼 가벼운 몸을 지니지 않았으랴. 차의 구덕(九德) 중에 가장 수승한 가치는 몸과 마음을 맑게 하는 것. 예나 지금이나 차의 진정성이 여기에 있음은 변치 않는 법칙이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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