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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다크 관문 레와의 아찔한 첫 만남

기자명 법보신문

구법승 사연 켜켜이 쌓인 설산을 단숨에 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라다크의 중심도시 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레 외곽은 추수를 끝낸 보리밭이 황금빛 들녘을 이루고 있다. 그 뒤로 펼쳐진 살풍경한 산들은 히말라야산맥의 자락들이다.

 


비행기는 오후에 출발하는데, 어제 꾸려놓은 짐가방은 아침까지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겨울 점퍼 때문이다. 라다크 여행 시즌의 끝자락, 이제 곧 겨울이 닥친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분명 여름시즌인데 ‘1박 2일 야외취침’에서나 등장할 법하게 생긴 이 겨울 점퍼를 꼭 가져가야할까. ‘여행자에게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말을 경전처럼 믿고 있는 소심한 객에게 두툼한 겨울 점퍼는 도통 내키지 않는 옵션이다. 하지만 현지 기온이 벌써 영하를 오르내린다는 조언에 눈 딱 감고 가방 속에 점퍼를 쑤셔 넣는 것으로 여정은 시작됐다.


가뿐하게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두 시간여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인도국적기인 비행기는 홍콩서 1시간 남짓 머무른 후 델리로 간다. 홍콩이 목적지인 사람들이 내리자 기내의 승객은 출발 때의 절반가량만 남았다. 사리 형태의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은 늘 그렇다는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좌석의 시트를 바꾸고, 내린 승객들이 던져놓은 담요를 ‘탈탈’ 털어 정리하더니 태연하게 빗자루를 들고 와 기내 복도를 쓸기 시작한다. 델리가 목적지인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이 소동 속에서 기내 가득한 먼지를 꾸역꾸역 마실 수밖에. 하지만 기내에서는 아무런 안내도, 양해도 없다. 물론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둘러보니 동양인은 몇 안 된다. 아, 정말 인도로 가는 길이구나.


입과 코를 틀어막았던 손수건을 걷어치우고 창밖을 내다보니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그런데 그 비가 심상치 않다. 내리는 양이 점점 더 많아지더니 홍콩에서 인도로 가는 승객들이 다 타고 예정된 출발 시간이 됐을 때는 아예 폭우로 바뀐다. 간간히 번개까지 내리친다.


결국 예정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기고 나서야 비행기는 마지못한 듯 그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비가 오고 번개가 치는데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휘청거리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델리로 향하는 내내 창밖에서는 허공을 쪼개며 떨어지는 번개의 현란한 스카이쇼가 계속됐다. 예정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한 밤중의 델리 공항은 눈이 퀭해진 여행객에게 후텁지근한 첫 인사를 건넨다. 그래도 반갑다, 델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추적추적 비 내리는 델리공항을 빠져 나온다.


델리에서 라다크의 중심도시 레까지는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키로 했다. 당초에는 잠무·카슈미르주의 주도인 스리나가르로 간 후 레까지 육로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현지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결과 ‘절대불가’ 통보를 받았다. 한 달 전 라다크 지역에 쏟아진 폭우로 스리나가르에서 레로 이어지는 도로 곳곳이 유실됐다고 한다. 어느 곳이 어느 정도 붕괴됐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아예 단념하란다. 서울에서부터 현지 소식을 들어 대략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쉬움이 크다. 결국 델리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날 아침 일찍 레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시간30분만에 3500미터 급상승

 

 

▲숙소 맞은편의 고산 봉우리에는 만년설이 쌓여 있다. 그 위로 펄럭이는 타르초는 얼마나 많은 바람이 읽고 지나갔는지 벌써 하얗게 퇴색돼 있다.

 


아침 6시 델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북으로 날아간다. 1시간 남짓 지났을까. 대지를 구겨놓은 듯 거칠게 솟아오른 산맥들이 눈 아래로 펼쳐진다. 파미르고원에서 시작된 라다크의 울타리 히말라야산맥이다. 지평선 쪽 희끗하게 보이는 봉우리들. 설산의 일족답게 흰 눈을 이고 있는 고봉들도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했다. 나무 한그루 없이 맨살의 모래피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산맥들의 이어짐이 낯설다. 살풍경해서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검은 산맥들을 지나자 이번엔 설산 봉우리들이 줄짓는다. 멀리 희끗하게 보이던 설산이 눈 아래 펼쳐지자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히말라야와의 첫 조우. 혜초 스님이 수십일 뱃길을 타고 다시 수천리 길을 걸어 만났을 설산, 수많은 구법승들이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와 인도로 오는 길에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며 힘겹게 넘어야 했을 설산, 그리고 달라이라마가 티베트 민중을 이끌고 눈물을 삼키며 지나왔을 그 설산이다. 고작 몇 장 달러와 맞바꾼 비행기표가 있다는 이유로 무슨 왕이라도 된 듯 이렇게 높은 곳에서 굽어보며 첫 인사를 나누기에는 설산 굽이 켜켜이 쌓여있는 사연과 눈물들이 너무도 진득하지 않은가. 과연 전생에 무슨 큰 복덕을 지은 것 있다고 오늘 이 같이 과분한 호사를 누리는가. 아니면 분에 넘치는 오늘의 호사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쥐꼬리만 한 복덕마저 몽땅 탕진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환희와 두려움으로 뒤범벅된 가슴 울렁임이 스멀스멀 목을 타고 올라온다.


그러나 무심한 비행기는 설산을 단숨에 넘어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곧이어 황량한 산맥 사이로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둥지를 틀고 있는 푸른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라다크의 관문 레다. 주변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들이 흑백사진 같지만 그 사이 계곡을 따라 너른 들녘처럼 펼쳐진 보리밭은 가을 추수를 끝내고도 여전히 황금빛이다. 라다크와의 첫 대면인데, 그 한가로운 풍경을 여유 있게 감상할 틈도 주지 않고 비행기는 서둘러 착륙한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승객들은 별다른 시설이랄 것도 없는 공항 활주로 위에 내려선다. 아침 7시. 델리에서 느꼈던 후텁지근한 공기와는 전혀 다른 쌀쌀한 아침 공기가 먼저 콧속을 씻어준다. 기분 좋은 상쾌함, 가슴 깊이 시원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며 활주로를 타박타박 걸어 청사로 향한다. 청사는 비행기가 내린 활주로보다 약간 높은 비탈 위에 자리하고 있다. 불과 50m나 될까 싶은 완만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헉’하는 한숨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해발 3500m 고산도시의 희박한 공기가 폐부 속으로 스며들어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이다. 청사에 들어서자마자 털썩 주저앉는다. 첫 만남 치고는 제법 아찔한 환영이다. 줄레(라다크식 인사). 라다크!


국내선인데도 공항에서는 간단히 짐을 검색하고 외국인들은 방문기록서를 작성한다. 하지만 델리 공항에서 보았던 이국적인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우리 내와 쏙 빼닮은 둥근 얼굴과 납작한 코, 작은 눈, 그리고 황색 피부의 라다키 여직원)이 ‘줄레, 줄레’하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서류작성법을 친절히 도와준다. 낯선 이국의 오지에 덩그러니 떨어졌다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그 환한 미소 한 번에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그런 이방인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직원은 한 번 더 미소 지으며 손 모아 합장까지 해주는데 손목에 칭칭 감긴 단주를 보니 오래된 도반을 길에서 만난양 안도감에 기운이 솟는다.


마중 나온 가이드를 따라 레 시내로 향했다. 흙벽돌로 쌓아올린 야트막한 담장과 집들이 소박한 레의 첫 인사를 건넨다. 산은 풀 한 포기 없지만 그 위를 뒤덮고 있는 하늘은 빈틈없이 선명한 푸른빛이어서 산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냥 ‘파랗다’는 말로는 부족한 새파란, 시퍼런 하늘이다.


숙소는 라다크 전통 가옥형태로 이층에는 햇살이 잘 드는 테라스가 있다. 짐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아 홍차, 토스트 등을 먹어치운다. 허기 때문이 아니다. 고작 이층 계단을 올라왔을 뿐인데 마치 지진을 만난 듯 휘청거리며 어지럼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고산증세다. 출발하기 전 델리서 예방약을 먹긴 했지만 3500미터나 되는 고도를 불과 1시간 30분 만에 올라왔으니 몸이 이정도로 버텨주는 것만도 다행이다. 체력이 떨어지면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해서 서둘러 이것저것 챙겨먹는다. 따뜻한 차를 몇 잔 들이키고 나니 기분이 훨씬 좋아진다.

 

50미터 걷고 헐떡거리며 ‘털썩’

 

 

레 공항 바로 옆에는 라다크의 불교사원인 곰파가 우뚝 솟아있다. 이곳이 티베트 불교의 땅임을 일깨워 준다.

 

 

그제야 다시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본다. 옆 건물 옥상에 걸려 있는 오색 깃발 ‘타르초’가 그런 이방인을 보며 웃기다는 듯 바람을 타고 가볍게 나부작 거린다. 불보살상, 호법신상, 경전 등을 오색 천에 찍어서 길게 한 줄로 엮어 바람이 잘 부는 곳에 걸어 놓는 이 깃발은 라다크 뿐만 아니라 티베트 불교가 전해진 곳이라면 어디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티베트 불교 특유의 신행형태다. 바람이 오가며 그 깃발을 읽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람을 따라 세상 멀리멀리 전해진다는 믿음이 실려 있다.


오가는 바람이 쉼 없이 타르초를 읽다 보면 깃발은 조금씩 삭아들고 거기에 새겨진 경전의 말씀과 불보살의 형상들도 깃발을 따라 점점 퇴색된다. 종국에는 그 화려한 색과 글, 도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낡고 하얀 천 조각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보살의 가피가 바람을 타고 세상 구석구석까지 전해지길 바라는 민초들의 아름다운 발원이 저 타르초에 실려 이곳 레의 평범한 가정집 옥상에서 저렇게 세상을 향해 법향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금 가볍게 스쳐가는 이 바람에서 달콤한 향기가 묻어나는 듯하다.


맞은편 설산 봉우리 주변엔 구름이 머물고 있지만 이곳 레의 하늘은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밝고 선명하다. 따뜻한 햇빛이 가득한 테라스에 앉아 잠시 호흡을 가눈다. 사방이 조용하다. 누군가가 그랬다.


“희박한 산소를 아끼기 위해서인지 라다크에서는 큰 소리로 떠들거나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지만 결코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거나 다투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귀가 소음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탓에 더 조용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럴지도 모른다. 찢어질 듯 울어대는 알람 소리로 하루를 시작해 자동차, 텔레비전, 핸드폰, 각종 안내방송 등 온갖 소음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고요함은 오히려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런 고요함에 익숙해져야할 것이다.


레를 둘러싸고 있는 히말라야산맥, 하늘과 맞닿아 있는 봉우리들 위로는 벌써 눈이 하얗다. ‘손바닥만 하다’는 라다크 여름의 끝자락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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