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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허물어져가는 아름다움 바스고성

기자명 법보신문

주인 잃은 옛 왕궁 안엔 금빛 부처님 미소만 가득

 

▲바스고성. 하얀 몸체에 붉은 지붕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바스고성은 그 위치나 형태가 사실상 요새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은 약간의 비에도 쉽게 허물어지는 주인 잃은 성이다.

 


“잠깐, 잠깐. 좀 천천히 가자고요. 난 지금 산소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길 아래서 올려다볼 때는 더 없이 멋있어 보였다. 오색 타르초에 쌓여있는 고성(固城). 허물어져가는 초르덴이 입구를 지키고  있어 더욱 고풍스런 바스고성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사실 그리 높지 않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10여분 남짓이면 올라가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그 10분이 문제다. 바스고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달동네 골목 같이 제법 가파른 비탈이다. 한두 걸음 옮길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다리가 아픈 것도, 몸이 무거운 것도 아닌데 고지대의 희박한 산소 탓에 가슴이 터질 듯 턱밑까지 숨만 차오르니 더 미칠 노릇이다.


달동네 골목길 같은 성 입구

 

 

▲바스고성에서 내려다본 전경. 성을 닮아가는지 허물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집들과 그 너머의 황금빛 보리밭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바스고성은 15세기까지 남부라다크, 바스고왕국의 심장부였다. 라다크왕국은 한때 형제들간의 불화로 인해 몇 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눠졌는데 이중 하나였던 남부라다크의 수도가 바스고였다. 그러나 정작 성 입구에는 변변한 안내표지판 하나가 없다. 라다크식 흙집 몇 채가 모여 있는 동네 사이의 골목길이 성으로 가는 길이다. 무심코 지나쳤다면 이곳에 옛 성과 사찰이 있을 것이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초르덴이 서있기는 하지만 라다크 어느 곳에서나 쉽게 만나볼 수 있는 초르덴이 이정표가 되어주진 못한다. 성이 자리 잡고 있는 바위산도 어찌나 거칠고 험하게 생겼는지 도대체 저 위에 집이라는 것을 지을 수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그런 바위산 옆을 깎아 만든 길은 돌계단과 바위고개, 흙길의 반복이다.


성에 가까워지자 흙벽돌을 쌓아 만든 옹벽과 계단들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그 위로 붉은 지붕을 이고 있는 하얀 몸체의 바스고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이라고는 하지만 그 위치나 형태는 사실상 요새에 가깝다. 그나마 왕이 살지 않는 성은 지금 사찰로만 사용된다.


17세기 라다크왕국의 전성기를 연 셍게남걀왕은 바스고성에 법당을 만들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불상을 조성한 왕은 대포를 녹여 구리 쇳물을 만들고 그 안에 금을 넣었다. 그래서 이 법당은 지금도 ‘금과 구리’라는 뜻의 ‘사르정’이라 불린다.


왕국을 지켜야할 대포를 녹여 기꺼이 불상을 조성할 정도로 신심 깊었던 왕과 그의 원력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모셔져 있지만 정작 성은 심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일부는 마치 폐허 같이 보인다. 진흙과 진흙벽돌로만 지어진 성이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란 버거웠을 것이다. 미국의 한 문화재보호단체는 이 성을 ‘허물어지기 전에 보호해야할 세계100대 문화유적’으로 선정했다. 덕분에 보수공사도 이뤄졌다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어 보인다.


성안으로 들어가 고불꼬불한 계단과 몇개의 문을 지나 성벽 위에 올라서니 성 아래 마을과 보리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방금의 험한 길을 잊게 만드는 아름다운 전망이다. 성을 빙둘러가며 타르초가 걸려 있고 가운데에는 하늘을 향해 세워 놓은 나무기둥에 룽다가 펄럭이고 있다. 타르초와 마찬가지로 경전이나 호법신상, 불보살상 등의 경판을 찍어 만든 오색 깃발 룽다는 ‘바람의 말[風馬]’이라는 뜻. 오색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이 마치 앞발을 들고 선 말의 형상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색천은 위에서부터 청, 백, 적, 녹, 황색의 순서로 걸리는데 각각 하늘, 구름, 불, 물, 땅을 상징한다. 간혹 다섯 색의 긴 천을 세로로 길게 매놓기도 한다. 이곳의 룽다가 그렇다. 룽다를 세우는 이유도 타르초와 비슷하다. 부처님의 말씀과 가피가 바람을 타고 세상 멀리, 구석구석까지 전해지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바람을 알고 있는 바람이 경쟁하듯 타르초와 룽다를 읽는다. 성 안은 독경 같은 바람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사방이 조용하다.
그 정적을 깨며 한 노인이 사원 뒤쪽에서 걸어 나온다. 마치 집주인인양 한껏 여유 있는 걸음으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노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안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 성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뜻인가. 궁금증에 노인의 뒤를 따른다.


대포 녹여 조성한 10m 미륵불

 

 

▲바스고성 법당인 사르정의 부처님 17세기 라다크왕국의 셍게남걀왕은 이 부처님을 조성하기 위해 왕국의 대포를 녹였다.

 


세월에 닳고 닳아 조금 무뎌지고 빛이 바라긴 했지만 섬세한 조각과 화려한 채색의 흔적이 역력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바스고성의 법당 사르정이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가 바스고성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법당 정면에는 의자에 앉아계신, 높이 10여 미터의 미륵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 크기가 너무 커 정면에서는 부처님의 가슴까지만 보이고 상호는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천장 높이보다 큰 불상을 모시기 위해 불단 위 지붕을 굴뚝처럼 높게 만들었다. 광창도 있어 부처님의 상호 위로 햇빛이 든다. 환한 얼굴의 부처님은 광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계신다.


법당 벽을 따라 경전을 넣어 놓은 책장이 놓여 있고 벽에는 벽화가 빈틈없다.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 부처님은 비단 법의를 입고 계신다. 보관도 비단으로 장식돼 있다. 금빛의 미륵부처님은 터키석으로 장식된 영락으로 치장돼 있어 더욱 장엄해 보인다. 이 미륵부처님은 전형적인 티베트 양식이다. 이 보다 앞서 조성된 불상에서 보이던 카슈미르나 인도 양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라다크왕국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며 전성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일행에게는 라다크에 발을 딛은 후 처음 친견하는 불상이기에 이번 여정의 안전을 기원하며 정성껏 삼배를 올린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보니 아까 그 노인이 앉아 계신다. 그러고 보니 저 분이 이곳 법당 관리인이다. 스님 대신 법당을 지키고 있는 노인은 참배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먼저 말을 건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등. 노인은 “편안한 여행길이 되길 바란다”며 법당 밖까지 우리를 마중 나온다. 아마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오랜 만에 만난 외지인들이 반가웠나 보다.


바스고성에는 두 개의 법당이 있다. 이곳에서 좀 더 산위로 올라가면 참바라캉법당이 있는데 사르정보다 더 큰 미륵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일반에는 공개가 되지 않기에 이쯤에서 발길을 돌린다.


대포를 녹여 만든 부처님, 허물어져 가는 고성, 인적 드문 옛 성에서 하루 종일 부처님을 시봉하는 노인. 꾸밈없는 미소로 이방인들을 배웅해주는 저 미소를 보며 라다크 어느 길가에 마침내 우리가 서 있음을 세삼 깨닫는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큰소리로 타르초를 읽고 지나가는지 ‘휘휘’ 바람 소리로 우리 뒤를 배웅한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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