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하면서 물건은 정토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생각생각마다 염불하는 것과 같은 불가사의를 낳는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자기를 벗어나고 자기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혹은 자기가 작업 그 자체로 옮겨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니게 된다.
이 반복된 동작과 생각생각마다 칭명하는 것은 닮지 않은 것 같으면서 매우 닮았다. 칭명에는 ‘자기’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공인(工人)의 일에도 ‘자기’가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자기’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다념(多念)이고 반복이다.
생각해보면 공인들은 모르는 사이에 칭명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말할 수도 있다. 도공이 녹로()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리는 그 소리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이라 말하는 소리이다. 그 외에 다름 아니다. 반복이라는 칭명이 아니라면, 공인들도 원래의 범부에 머물고 말 것이다. 뭔가를 아름답게 만들 수 없게 된다.
정토문의 가르침은 여기서도 빈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말로 불가사의한 인연이지만 민예품, 즉 하품(下品)의 그릇이 범부성불(凡夫成佛)을 설하는 정토교에 나를 더욱 가까이 데려다 준 매개물이 되었던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따스하며 고마운 것은 범부도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상품(上品)의 사람만이 성불할 수 있다면, 중생의 생활은 어두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범부가 성불할 수 있다는 진리를 설하는 것이 정토교의 특징이다. 아름다운 민예품은 하품성불(下品成佛)의 살아있는 증거이다.
이런 이야기는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종교라고 하면 인간의 마음만을 상대로 하여 설해진 것이다. 신심(信心)이라고 하면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는 신심이고, 구원이라고 하면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는 구원이었다.
종교는 인간들을 질곡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고, 종교의 철리(哲理)는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를 말하는 데 있었다. 인간들이 언제나 종교의 대상인 것이다. 가령 자연을 종교의 대상으로 삼더라도, 인간에 즉한 자연, 자연 속에 살아있는 인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떠난 자연 등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토교의 진리는 실제로 훨씬 보편적인 것이다. 제도(濟度)는 인간계에만 적용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니라, 모든 것에 다 적용된다. 그것은 믿음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영역에도 꼭 들어맞는 원리인 것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실로 ‘사물’에도 적용되어야 할 진리인 것이다. 사물 또한, 그것이 보통 백성들의 것인 한, 그 구원은 온전히 정토교가 설한 진리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정토교를 사람으로부터 사물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광대한 종교의 철리(哲理)인 것이다.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법칙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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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사연구소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