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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자 바틀비

기자명 법보신문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주인공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류를 손으로 베껴 쓰는 일을 한다. 그런데 변호사가 필사한 문서를 검토하자고 불렀지만, 그는 매우 상냥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동일하게 대답한다. 우체국에 심부름을 보내도, 다른 어떤 일을 시켜도 마찬가지였다. 호의적인 관심으로 출생지를 물어도, 자신에 대해 아무거나 말해달라고 부탁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해고하고 나가라고 하지만 그때에도 그의 응답은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였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무실에 있을 뿐인 그를 견디지 못해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겨버린다. 그러나 그 사무실에 새로 입주한 변호사가 찾아와서 떠나지 않는 편을 택한 바틀비를 처리해달라고 한다. 결국 그는 경찰에 의해 구치소로 보내진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걸면서까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게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열의와 정열을 갖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선 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는 어떤 선택이 있을 수 있음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며칠 전 군입대 하지 않기를 택한 한 젊은 청년이 캐나다로 망명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바틀비가 떠올랐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싫었으면 가족과 친구, 삶의 터전이 있는 자신의 고국을 떠나면서까지 군대에 안 들어가기를 택했던 것일까!


이 경우 그의 선택은 캐나다나 망명생활이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망명이란 자신이 살던 곳을 포기하는 것이고, 자신이 살아오던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바틀비처럼 삶의 모든 것을 걸고 “하지 않기를 택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어떤 것을 하지 않기를 택하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그의 선택에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또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 것을 안 하길 택하기 위해선 삶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곳임을.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나 또한 여러 가지 이유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 편을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군대에 가지 않을 방법은 그 시절에도 몸을 망가뜨리는 것 아니면 감옥에 가는 것뿐이었다. 어느 것이나 삶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하고자 했던 사회운동은 당시 금지된 것이었고, 따라서 감옥에 갈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의 선택으로 하고자 하는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에 감옥이냐 군대냐를 두고 번민해야 했던 후배가 있었다. 오랜 번민 끝에 그는 군대 아닌 감옥을 선택했다. 그 번민에 더해 더 나빴던 것은, 남에게 해를 주는 어떤 범죄를 한 것이 아니었지만, 도둑이나 강도, 강간범과 똑같이 ‘잡범’으로 취급되어, 그나마 정치범들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감과 긍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이들은 내가 감옥에 있었을 때도 적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로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한 선량한 청년들. 그들 역시 ‘잡범’이었다. 그들의 삶에도 빨간 줄이 그어져 있을 것이다.


▲이진경 교수
‘군대냐 감옥이냐’의 선택지는 군대를 감옥과 맞먹는 곳으로 만든다. 혹자에겐 감옥보다 못한 곳인 것이다! 여전히 군대가 감옥과 동렬에 놓이는 상황에서 망명자 김경한 씨는 새로운 선택지를 창안한 것 같다: “군대냐 망명이냐.” 감옥이 모든 희망에 암갈색 페인트를 칠하는 곳이라면 망명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란 점에서 어둡지만 파란빛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감옥을 택하는 것보다 쉬우리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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