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허 스님 [중]
운허 스님 [중]
  • 심정섭 기자
  • 승인 2012.04.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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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대중화 발원 ‘불교사전’ 편찬
▲스님은 항상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봉일사에서 경송 스님에게 “중 노릇 잘하여 조선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주면 그것도 독립운동”이라는 가르침을 듣고 계를 받은 후, 금강산 유점사로 가서 서기 일을 보며 불법을 배우던 운허는 경송의 은사 봉선사 월초 스님 뜻에 따라 봉선사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자신을 미나미 총독의 수양아버지라며 일본 경찰들을 나무라기도 했던 월초는 운허에게 “봉선사 월초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는 편지를 갖고 벙어리 흉내를 내도록 하는 등 일본 경찰을 피해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운허는 그렇게 봉선사로 와서 월초 밑에서 본격적으로 ‘능엄경’, ‘법화경’을 비롯한 경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오후불식을 하면서 공부에 전념했고, 1929년까지 7년간이나 오후불식을 이어갔다. 운허는 월초 밑에서 경학을 배운 다음 걸망을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당대의 뛰어난 학승으로부터 경전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 스승으로 삼은 이들이 범어사 진진응 스님, 동대문 밖 개운사 박한영 스님 등이다.


이미 어려서 학자적 재능을 인정받았던 운허는 불문에 귀의해 경학을 공부하면서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곁에서 보았던 이들이 “스님께서는 길을 걷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또 훗날 학인들에게 경전을 강의할 때 역시 반드시 먼저 경전을 다시 읽고 메모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만큼 책과 더불어 살았다.


운허는 또 자신이 책을 가까이하는 만큼이나 불자와 일반대중들의 교육에 관심이 깊었다. 그런 이유로 1945년 해방 후에는 “조국 광복을 맞아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인재가 필요하니, 이제 내가 할 일은 인재양성”이라는 생각으로 봉선사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5개 사찰 소유재산을 모아 광동학교 설립을 추진해 오늘날 광동학원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운허의 인재양성 갈망은 1962년 한국불교 최초의 ‘불교사전’ 편찬으로 이어졌다. 책의 첫머리 4페이지에 달하는 ‘일러두는 말’에서 “이 사전은 강원 학인들과 불교를 처음 연구하는 이들을 위하여 만든 것으로 간단하고 알기 쉽도록 해석했다”며 불교 대중화를 위한 편찬임을 분명히 했다. 운허 자신의 말처럼 불교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불교사전’은 불교용어를 알기 쉽게 해석해 ㄱ, ㄴ, ㄷ 순서대로 수록했으며 불교인명사전의 역할도 했다.


‘불교사전’이 출간될 때 동국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퇴경 권상로는 서문에서 “어려운 경전과 도리를 통속적으로 쉽게 풀어서 일반이 보면 즉각적으로 알게 하자는 것이며, 오랜 숙원이며 부르짖음이었다. 이것이 우리 교도들의 공통적 지극한 소원이었지만, 이에 대해 특별히 노파심이 간절하고 실천으로 옮긴이는 오직 운허 스님”이라고 운허의 ‘불교사전’ 편찬을 칭송했다.


불교를 보다 널리 대중화시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전이 쉽게 읽혀야 한다고 확신했던 운허는 그렇게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더욱더 경전 번역에 전념했다. 그러한 역경 의지는 1964년 역경원장을 맡아 한글대장경 번역을 주도하면서 “지금 역경원에서 하는 역경 사업은 우리 민족이 가진 대장경이 있어야 하겠기에 하는 것”이라 말하고, 역경발원문에서 “부처님의 본의대로 글과 뜻이 옮겨지고 읽는 이가 감격토록 아름다운 문장 이뤄 한글로 된 대장경이 집집마다 모셔지고, 누구든지 읽게 되어 지혜로운 가르침이 온누리 곳곳마다 두루 펼쳐지이다”라고 한데서도 잘 나타난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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