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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견해만 있다면 생사에 물들지 않는다

기자명 법보신문

우리 스스로는 모든 것 완전하게 갖춘 부처님
부처님의 거룩함·달콤한 가르침도 결국 속박

 

▲중국 임제사 경내에 들어선 장경루.

 

 

師乃云, 今時學佛法者는 且要求眞正見解니 若得眞正見解하면 生死不染하야 去住自由하야 不要求殊勝하나 殊勝이 自至니라 道流야 祇如自古先德은 皆有出人底路니라 如山僧指示人處는 祇要儞不受人惑이니 要用便用하야 更莫遲疑하라 如今學者不得은 病在甚處오 病在不自信處니 儞若自信不及하면 卽便忙忙地하야 徇一切境轉하야 被他萬境回換하야不得自由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말했다. “오늘날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진정견해(眞正見解)를 갖춰야 한다. 만약 진정견해를 얻을 수 있다면 생사에 물들지 않고 가고 옴이 자유로워져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이뤄진다. 수행하는 사람들이여! 옛 선지식들은 모두 사람들을 교화하는 특별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산승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만 그대들이 다른 사람의 말에 속지 않을 것을 요구할 뿐이다. 꼭 해야 될 일이면 하고 우물쭈물 주저하며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견해를 체득하지 못하는 병이 어디에 있는가하면 바로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있다. 그대들이 만약 스스로 믿지 못하면 일체의 경계에 바쁘게 끌려 다니게 되고 이렇게 수많은 경계에 휘둘려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강의) 임제 스님 가르침의 핵심이 진정견해(眞正見解)입니다. 진정견해는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임제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깨달음의 내용은 진정견해이며 바로 정견입니다. 우리 불교에서 깨달음은 지나치게 신비화되고 우상화 돼 있습니다. 깨달음이 마치 신비한 무엇인 것처럼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견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다면 정견은 무엇일까요. 삼법인(三法印)에 대해 확고한 이해입니다. 여기서 인(印)은 도장입니다. 인감도장이 나를 대신하듯이 세 가지 법이 바로 불교이며 진리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장을 뜻하는 인을 쓴 것입니다. 세부적으로 삼법인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입니다. 제행무상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는 모든 현상에 나라 할 만 한 것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즉 변하지 않는 나라는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흔히 나로 착각하는 아(我)는 여러 조건들이 만나서 즉 인연가합(因緣假合)에 의해 이뤄진 조합에 불과합니다. 양파를 까다보면 결국 아무것도 없듯이 레고로 만든 사람을 분리하고 나면 조각들만이 남아 있듯이 결코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에 나라는 것은 없다. 임제 스님께서 말한 진정견해는 이런 삼법인에 대한 명확한 이해입니다. 만약 진정견해만 얻을 수 있다면 생사에 물들지 않고 오고감에 자유롭게 됩니다. 진정견해를 통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나면 바로 스스로가 무위진인임을, 본래 부처임을 체득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생사에 물들 일도 없고 가고 옴에 잠시의 망설임이나 걸림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견해를 얻으면 따로 깨달음을 구하지 않아도 깨달음은 절로 오게 됩니다. 이것이 수승함을 구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절로 이뤄진다는 의미입니다.


도류(道流)는 ‘구도자 혹은 수행하는 사람들이여’ 라는 뜻입니다. 옛 선지식들도 나름대로 사람들을 교화하는 특별한 방법들을 가지고 있지만, 임제 스님의 가르침은 다만 다른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거나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인 “스스로를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 끝없이 정진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스스로 부처이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된 진리 그 자체임을 믿어야 합니다. 스스로가 부처의 현현이며 무위진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전의 말씀에,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에,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에 감탄을 합니다. 그리고 밖에서 진리를 구합니다. 임제 스님은 바로 이런 모습에 대해 경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또한 속박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에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을, 지금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지 못한다면 바깥 경계에 휘둘려 이리저리 노예처럼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정말 온전히 갖춰져 있음을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儞若能歇得念念馳求心하면 便與祖佛不別이니라 儞欲得識祖佛麽아 祇儞面前聽法底是니 學人이 信不及하고 便向外馳求하며 設求得者라도 皆是文字勝相이요 終不得他活祖意니라 莫錯하라 諸禪德아 此時에 不遇하면 萬劫千生을 輪廻三界하야 徇好境掇去하야 驢牛肚裏生이로다


해석) “그대들이 만약 한 생각 한 생각마다 바깥에서 구하는 마음을 쉬어 버릴 수 있다면 조사와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다. 그대들이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가? 다만 지금 바로 내 앞에서 법문들 듣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철저하지 못하여 밖을 향해 정신없이 헤매며 구하자고 한다. 설사 그렇게 해서 얻었다 해도 모두 문자로 된 훌륭한 모습일 뿐 끝내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조사의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여러 선덕들이여! 지금 이때에 자기가 곧 부처라는 사실을 알고 만나지 못하면 오랜 세월을 삼계에 윤회해서 달콤한 경계에 이끌려 다니느라 나귀와 소의 뱃속에 태어날 것이다.”


강의) 념념은(念念)은 순간순간, 생각생각의 의미입니다. 치구심(馳求心)은 바깥으로 달려 나가는 마음입니다. 이런 치구심만 없앨 수 있다면, 즉 경계에 끌려 이리저리 헤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조사 스님이나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임제 스님께서는 ‘법문을 듣는 그대들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정견을 갖지 못한다면 결과는 영원히 삼계(三界)를 윤회(輪廻)하며 당나귀나 소의 뱃속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바로 삼계와 윤회입니다. 삼계는 흔히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천태지자 스님은 삼계를 탐진치(貪瞋癡)로 해석했습니다. 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도, 천상의 육도윤회(六道輪廻)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신없이 어질러진 곳을 아수라장이라고 합니다. 아수라는 싸움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주변은 시끄럽고 어질러져 있어 정신이 없습니다. 내 주변이 이렇다면 지금 내가 아수라입니다. 또 밥을 미친 듯이 먹는 사람을 보면 아귀아귀 먹는다고 합니다. 탐욕이 지나쳐 무언가에 항상 허기져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아귀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옥과 천상을 오락가락합니다. 또 틈틈이 짐승보다도 못한 일을 할 때도 많습니다. 육도의 윤회가 따로 있어, 죽은 다음에 과보에 따라 유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에서 끊임없이 육도를 윤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이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죽은 다음 윤회가 가능할까요? 후대 대승불교에 유식사상이 등장하면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유전한다는 이론이 나오지만 부처님의 무아사상에 비춰본다면 사후의 윤회는 논리적인 모순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천태 지자 스님의 말씀처럼 윤회는 지금 삶 속에서 당장에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런 까닭에 윤회는 사후의 문제가 아니고 지금 당장의 문제인 것입니다.


道流야 約山僧見處인댄 與釋迦不別이라 今日多般用處가 欠少什麽오 六道神光이 未曾間歇이니 若能如是見得하면 祇是一生無事人이니라


해석) “도를 배우는 수행자들이여! 산승의 견해를 분명히 밝힌다면 석가모니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 여러 가지로 작용하는 곳에 모자란 것이 무엇인가? 육근에서 나오는 신령스런 빛이 잠시도 쉰 적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한평생 완전한 자유를 얻은 일없는 사람이다.”


강의) 임제 스님은 우리 모두가 완전한 그대로 부처임을 다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족한 것 또한 없습니다.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이런 진정견해만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얻은 무사인(無事人)입니다. 여기서 다반용처(多般用處)는 일상생활에서의 우리의 모든 행동이며 육도신광(六道神光)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에서 나오는 지혜의 작용입니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우리의 육근을 통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음을 임제 스님께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무위진인은 잠시도 쉬지를 않습니다. 그것만 안다면 달리 닦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또 닦는다고 해서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보물은 바로 지금 우리 손에 들려 있습니다. 그것만 알면 됩니다. 그것만 확연히 깨달으면 쓸데없는 번뇌와 망상으로부터 바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할 일이 전혀 없는, 또는 할 일을 모두 마친 무사인이며 무위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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