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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스승 붓다-7. 최고의 평화인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님 탄생게는 내남 구별없는 인류 평화 선언

팔정도 가운데 바른말은
평화 일으키는 진실한 말


중도와 화쟁의 가르침은
대립 없애는 최고의 지혜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이 시대 우리 모두가 잡고 씨름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는 무엇일까? 분명 ‘생명과 평화’라 할 것이다. 생명을 보존하고 북돋는 일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일이고 평화를 지키고 더욱 널리 깊이 퍼지게 하는 일이 곧 생명을 위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면서 쓰는 이 짧은 글에서는 ‘인류의 스승’으로서 부처님이 평화를 위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 특히 오늘을 사는 우리 개인, 사회, 종교 간이나 세계 평화 문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중심으로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우선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을 사는 나 자신의 내면적 평화로움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오늘 우리 대부분은 나의 정체성의 불확실성, 나의 존재감의 결여 때문에 괴로워한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정 시간 살다가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로 괴로울 때 손을 내밀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없는 고독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에 평화가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나면서 외쳤다고 하는 탄생게(誕生偈)가 생각난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天上天下唯我獨尊)”고 한 것이다. 여기서 ‘나(我)’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부처님 개인을 두고 한 말 이상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뿐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우주적 나’를 가리킨다고 본다는 뜻이다. 지금의 나, 탐진치로 찌든 나, 이것이 본래의 내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근원이 되는 우리 모두의 본바탕, 이것이 나의 진정한 나요, 나의 참나라는 것을 선포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 부처님이 이 땅에 온 뜻은 바로 이 참나를 찾지 못하고 미망 속에서 헤매는 우리가 우리 속에 내재하는 인간 본래의 성품인 참나에 눈 뜨게 함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는 이런 안목이 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하고 늠름하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물론 이렇게 내 속에 있는 참나에 눈 뜬다는 것은 동시에 내 이웃 속에 있는 참나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될 때 나와 너의 하나 됨을 확인하게 되고, 내 이웃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자비의 마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부처님의 탄생게는 이처럼 본래적인 나를 찾아 누릴 수 있는 나의 내적 평화를, 그리고 나와 내 이웃이 하나라는 일체감에서 오는 근본적 평화를 위한 선언인 셈이다.


둘째, 현재 우리 주위를 보라. 나와 내 이웃 간, 혹은 사회 집단 간에 평화스러운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여러 계층이나 분야에서 갈등과 대립과 긴장 관계가 주종을 이루는 사회라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를 위해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 중 특히 팔정도(八正道)의 ‘바른 말(正語)’에 대한 가르침이 생각난다.


오늘처럼 말이 많은 세상도 없을 것이다. 개인 간 주고받는 말도 많아졌지만, 온갖 종류의 인쇄매체나 SNS로 대표되는 전자 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말도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서 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부처님이 가르쳐준 ‘바른 말’은 물론 거짓말, 모함하는 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 사람들 사이에 불화와 증오를 가져오는 말을 금하고, 적극적으로 진실된 말, 시의 적절한 말, 경우에 합당한 말, 남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오늘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불화와 증오를 가져오는 말’은 바르지 않은 말이라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사실에 근거한 말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거나 사회에 분란을 야기시키는 말이라면 ‘바른 말’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어떤 말이 바른 말이냐 바르지 못한 말이냐 하는 것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그 말 때문에 화해와 평화의 따뜻함이 생기느냐, 그와 반대로 불화와 반목의 싸늘함이 생기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바른 말’을 해야 한다. 그러나 대중 언론매체들의 경우‘바른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오늘 우리가 매일 접하는 신문들을 보라. 신문들이 우리 사이에 화해와 평화의 따뜻함이 더하도록 하는 일을 하는가, 혹은 알아야 할 권리라는 미명아래 개인 간은 물론 사회 집단이나 경제 계층 간의 불화와 반목을 조성하는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지는 않는가? 특히 정치나 남북문제를 다루는 경우 언론에 종사하는 이들은 부처님이 설하신 이‘바른 말’의 가르침에 더욱 주목해야겠다. 싸움을 부추기고 붙이는 쪽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고 화해시키는 쪽으로 힘을 모을 때 우리 사회가 살벌한 대립과 반목의 관계에서 조금씩 벗어나 더욱 조화롭고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채워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종교 간의 평화다. 달라이 라마가 말한 것처럼, 종교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람을 더욱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특히 한국의 현실은 그와 반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종교심이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부드러움을 찾기 힘들다. 특히 몇몇 종교의 경우 종교적으로 열성이면 열성일수록 이웃 종교를 인정하고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대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 되는 경향이 더욱 강하다.

 

종교 큰 기능 중 하나는
사람 화평하게 하는 것


종교간 대화 협력 없이
세계 평화 있을 수 없어


한국의 경우 종교 인구의 거의 반반을 차지하는 불교와 기독교가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거의 대화가 없는 ‘독백’의 관계, 나아가서는 불편하고 불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런 종교 간의 갈등 같은 문제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부처님이 실천하고 가르친 ‘중도(中道)’ 사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도’란 극단적인 고행이나 극단적인 사치 생활을 피하고 균형지고 건강한 삶을 사는 길이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고 각기 다른 견해들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이른바 ‘중관(中觀)’이다.


‘궁극실재’에 대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견해(見解)’는 어쩔 수 없이 일방적이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쪽 견해든 저쪽 견해든 모든 견해에서 완전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궁극실재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있음’이나 ‘없음’이라는 한 가지 범주로 제한할 수가 없다.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진공만도 아니고 묘유만도 아니다. 진공이면서 동시에 묘유이고 묘유이면서 동시에 진공이다. 어느 일변에 치우칠 수 없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다고 할까. 양변을 모두 내치라. 양변을 모두 분명히 보라. 양쪽 모두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불교 전통적인 언어로 말하면 쌍차이변(雙遮二邊), 쌍조이제(雙照二諦), 쌍비쌍역(雙非雙亦)이다. 서양에서 말하는‘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가 이에 해당된다고 할까. 이런 가르침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이 7세기 신라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원효의 유명한 화쟁론(和諍論)이다.


원효도 궁극실재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법신이 유색이냐 무색이냐 하는 대립된 두 가지 상충된 견해를 놓고‘어느 한 쪽의 견해에만 집착(定取一邊)하면 우리는 결국 실재를 분명히 볼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이를 다시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다원주의적 시각(pluralistic perspective)을 함양하라는 말이다. 어느 한 견지에서 형성된 한 가지 특정한 견해를 고집하는 대신 여러 시각에서 얻어진 여러 가지 견해를 실상(實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욱 균형 잡힐 수 있게 하기 위한 보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한국에 있는 여러 종교들, 특히 불교와 기독교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각자 자기의 주장만을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독단을 버리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의견에 조용히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평화가 없이는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 종교 간의 평화는 한국 사회에서의 평화만이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도움을 주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오강남 교수
석가탄일을 맞아 나 자신의 내적 평화, 사람 사이의 평화, 종교 간이나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평화의 씨앗을 가져다 준‘평화의 왕’‘최고의 평화인’으로서의 부처님을 다시 한 번 기리게 된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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