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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도 부처 구하려는 마음 갖지를 마라

기자명 법보신문

아라한과 벽지불은 화장실의 똥오줌

보리나 열반 나귀 매는 말뚝에 불과

 

부처를 구하려는 마음 일으키는 순간

생사윤회의 커다란 조짐이 될 뿐이다

 

 

▲중국 선종의 시원인 소림사 입구.

 

 

道流야 心法이 無形하야 通貫十方하야 在眼曰見이며 在耳曰聞이요 在鼻齅香하고 在口談論하며 在手執捉하고 在足運奔이라 本是一精明이 分爲六和合이니 一心이 旣無하면 隨處解脫이로다 山僧의 與麽說은 意在什麽處오 祇爲道流가 一切馳求心을 不能歇하야 上他古人閑機境이니라

 

해석) “여러분! 마음이라는 것은 형상이 없어 시방세계를 관통 한다. 눈에 있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어 듣는다고 하고, 코에 있어 냄새를 맡는다고 하고, 입에 있어 말을 한다고 하고, 손에 있어 잡는다고 하고, 발에 있어 바쁘게 걷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하나의 정명이 나뉘어서 여섯 가지로 화합이 된 것이다. 따라서 만일 그 하나의 마음마저 없다고 한다면 어디서든지 해탈이다. 산승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 뜻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밖으로 정신없이 찾아 헤매는 마음을 쉬지 못하고 옛 사람의 쓸데없는 말씀과 방편에 끌려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강의) 마음은 육체의 반대로서의 마음이 아니라 진리 자체로서의 마음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할 때 그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형상이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방(十方)을 두루 관통합니다. 시방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과 건곤간손(乾坤艮巽)의 사우(四隅), 상하(上下)를 말합니다. 공간의 총합이면서 또한 공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눈으로 보고 있을 때는 눈에 있고 말을 할 때는 입에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마조 스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입니다.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라는 말씀인데, 마음은 우리 일상의 생활 속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뜻 입니다.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움켜잡고 걷고 하는 생활 자체가 바로 도이며 이것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떠난, 일상을 벗어난 마음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이런 이치를 다시 설명한 것이 “본래일정명(本來一精明)이 분위육화합(分爲六和合)”입니다. 하나의 정명이 나뉘어서 여섯 가지로 화합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능엄경’에 나오는 내용인데 일정명(一精明)은 앞서 말한 일심(一心)입니다. 마음입니다. 깊게 들어가면 장식(藏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섯 가지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경(六境)입니다. 하나의 정명이 나뉘어서 여섯 가지로 화합된 것이라는 의미는 일심(一心)이 육경(六境)을 통해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육경을 통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심(一心)이라고 하니까 이제는 일심에 집착 합니다. 그러나 그 일심, 즉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걸 알게되면 어디에서나 해탈입니다.

 

임제 스님께서 말씀하신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과 같은 말입니다. 처한 곳마다 주인이 되고 그 자리가 진리의 세계, 곧 해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탈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진리가 밖에 있을 것으로 알고 정신없이 찾아 헤매는 그 마음을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옛 스님들이나 조사들이 썼던 문자나 방편에 집착하여 흉내를 내거나 진리로 착각하는 것이 우리의 해탈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道流야 取山僧見處하면 坐斷報化佛頭라 十地滿心은 猶如客作兒요 等妙二覺은 擔枷鎖漢이요 羅漢辟支는 猶如厠穢요 菩提涅槃은如繫驢橛이니 何以如此오 祇爲道流不達三祇劫空일새 所以有此障礙니라 若是眞正道人인댄 終不如是니 但能隨緣消舊業하고 任運著衣裳하야 要行卽行하며 要坐卽坐하야 無一念心希求佛果니 緣何如此오 古人이 云, 若欲作業求佛이면 佛是生死大兆라 하니라

해석)  “여러분! 산승의 견처를 취한다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앉은 자리에서 끊어버리는 것이다. 십지의 수행을 성취한 보살도 천한 나그네와 같고 등각, 묘각의 깨달음을 체득한 사람도 감옥의 죄수와 같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마치 화장실의 똥오줌과 같다.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경지도 마치 당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과 같다. 왜 이러한가? 도를 닦는 여러분들이 삼아승지겁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애가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인이라면 마침내 그렇지 않을 것이니, 다만 인연 따라 옛 업을 녹이고 자유자재로 옷을 갈아입어 가게 되며 가고, 앉고 싶으면 앉아서 한생각도 불과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서 부처가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는 생사를 일으키는 큰 조짐이 될 뿐이다 라고 하였다.”

 

강의) 임제 스님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이건, 조사건 관계가 없습니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칼로 끊어내듯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임제 스님은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를 앉은 자리에서 끊어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신불이라는 고정관념, 화신불이라는 권위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통은 나의 문제입니다. 해결하는 것도 또한 나의 몫입니다. 불상을 잘 모신다고 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수학을 잘 하려면 수학 문제를 직접 풀어야 합니다. 수학 참고서를 숭배한다고 수학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이유로 십지의 수행을 성취한 보살 또한 천한 나그네와 같고 등각, 묘각의 깨달음을 체득한 사람도 감옥의 죄수와 같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한이니 벽지불이니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삼아승지겁(三阿僧紙劫)이 공한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승지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되기까지에는 삼아승지겁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무한한 세월이 공함으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한한 세월을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관념 자체가 장애라는 뜻입니다. 선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한한 세월 자체가 바로 공이며, 깨달음의 단계라는 것 또한 공입니다. 이런 까닭에 진정한 도인이라면 인연에 따라 옛 업을 녹이고 자유자재로 옷을 갈아입으며, 가게 되면 가고 오게 되면 오는 것뿐입니다. 불과를 얻거나 깨달음을 얻겠다는 생각 따위도 없습니다. 무위진인에 맡기고 결코 사량하거나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수행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생사윤회의 커다란 계기가 될 뿐입니다. 부처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의업(意業)이 되는 까닭에 결코 해탈을 이룰 수는 없게 됩니다.

 

大德아 時光을 可惜이어늘 祇擬傍家波波地에 學禪學道하며 認名認句하며 求佛求祖하며 求善知識意度이로다 莫錯하라 道流야 儞祇有一箇父母어니 更求何物고 儞自返照看하라 古人이 云, 演若達多失却頭라가 求心歇處卽無事로다

 

해석)  “대덕아! 시간을 아껴야 한다. 다만 옆길로 들어서서 소란을 피우면서 선을 배우고 도를 배운다고 하지 말라. 이름과 글귀를 잘못 알고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한다고 하지 말라. 그렇게 잘못 알지 말라.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그대들에게 안에 부모가 있다. 다시 무슨 물건을 구하는가? 그대들 스스로 돌이켜 보라. 옛사람이 이르기를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구하는 마음이 쉰 그 순간에 아무런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강의) 우리는 불법을 배운다고 요란을 떨지만, 옆길로 들어서서 마치 파도를 일으키듯이 소란만을 피우고 있습니다. 경전을 읽고 조사들의 어록을 읽으며 이것으로 부처를 구하고 조사를 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결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진리의 당체 그 자체입니다. 다만 알지 못할 뿐입니다.

 

‘능엄경’에 연야달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연야달다는 매우 잘 생겨서 하루하루 거울을 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거울이 사라지자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이 있다고 착각한 연야달다는 불안한 마음의 자신의 머리를 찾아 헤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거리를 헤매는 연야달다에게 사람들이 말합니다. “당신 머리는 당신 몸에 잘 붙어 있소.” 그러자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얻고 머리를 찾아 헤매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찾아 헤매는 연야달다처럼 우리도 지금 밖에서 도를 구하겠다며 치구심을 내며 부지런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大德아 且要平常인댄 莫作模樣하라 有一般不識好惡禿奴하야 便卽見神見鬼하며 指東劃西하며 好晴好雨하나니 如是之流는 盡須抵債하야 向閻老前하야 呑熱鐵丸有日이니라 好人家男女가 被這一般野狐精魅所著하야 便卽捏怪하니 瞎屢生이여 索飯錢有日在로다

 

해석) “대덕아! 평상심을 유지하기 바란다면 모양을 짓지 말아야 한다.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신을 본다, 귀신을 본다 말하고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가리키고 맑은 것이 좋으니, 비 오는 것이 좋으니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좋은 집안의 남녀들이 들여우와 도깨비 같은 귀신들에게 홀려서 눈을 누르면 헛것이 보이는 것처럼 이상하게 되었다. 눈먼 자들이여! 밥값을 물어내야 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강의) 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밖에 무엇이 있을 거라고 믿고 꾸미려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수행을 한다는 스님들이 신을 본다. 귀신을 본다하는 허황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임제 스님의 이 말씀들은 지금 들어도 정신이 번쩍 드는 준엄한 경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신도들의 신행이 바르지 않으면 스님들의 수행도 바르게 가지 못합니다. 사부대중이 함께 잘 가야 합니다. 어느 쪽이 잘못되면 한쪽에서 바로 잡아 줘야 합니다. 승재가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도들은 기복에 빠져 있고 스님들은 이를 이용해 장사나 하는 풍토가 참담한 오늘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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