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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견해 구해 도깨비 귀신에 홀리지 말아라

기자명 법보신문

조작하지 않으면 모든 망념 사라지고
땅이 만물 품 듯 마음이 일체 만든다
밖에서 찾는 부처 또한 헛된 이름일뿐

 

▲중국 선불교의 시원인 숭산 소림사. 사진은 소림사 주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보전.

 

 

示衆云, 我有時에는 先照後用하며 有時에는 先用後照하고 有時에는 照用同時하며 有時에는 照用不同時니라 先照後用은 有人在요 先用後照는 有法在요 照用同時는 耕夫之牛하며 奪飢人之食이니 敲骨取髓하고 痛下鍼錐요 照用不同時는 有問有答하며 立賓立主하야 合水和泥하야 應機接物이니 若是過量人인댄 向未擧已前하야 起便行이라 猶較些子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말했다. “여러분! 나는 어느 때는 먼저 비추고 나중에 쓰며, 어느 때는 먼저 쓰고 나중에 비추며, 어느 때는 동시에 비추고 쓰며, 어느 때는 비춤과 씀을 동시에 하지 않기도 한다. 비춤이 먼저고 씀이 나중일 때는 사람을 우선한 것이요, 씀이 먼저고 비춤이 나중일 때는 법을 우선한 것이다. 동시에 비추고 쓰는 경우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고, 뼈를 두드려 골수를 빼앗고, 아픈 곳에 침과 송곳을 꽂는 것이다. 비춤과 씀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경우는 질문이 있으면 대답을 하고 손님이 되기도 하고 주인이 되기도 하며, 물에 합하고 진흙으로 변하여 근기에 맞게 사람들을 가르친다. 만약 뛰어난 사람이라면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들어내기도 전에 떨치고 일어나 가버릴 것이다. 그래야 진리에 계합할 작은 역량이라도 있다고 할 것이다.”


강의) 임제 스님의 유명한 사조용(四照用)입니다. 명나라 이전에는 없다가 뒤에 수록된 것으로 봐서 후대에 가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어찌됐든 사조용은 앞서 강의한 임제 스님의 사료간(四料揀)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이 또한 임제 스님께서 제자를 제접하는 네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조용(四照用)에서 조(照)는 비춘다는 뜻이고, 용(用)은 쓴다는 의미입니다. 비춘다는 의미는 제자를 보면 지혜로 비춰보아 그 근기를 바로 알아낸다는 말입니다. 쓴다는 것은 어떤 때는 고함을 지르고 어떤 때는 몽둥이로 때리고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등 근기에 따른 방편을 말합니다. 지혜로운 스승에게 제자를 깨우치기 위한 정형화 된 방법이란 없습니다. 그때그때 상황과 제자의 근기 등을 고려해 가장 좋은 방편을 걸림 없이 사용하는 것이 눈 밝은 스승의 방식입니다.


먼저 비추고 나중에 쓰는 것은 사람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먼저 근기를 살펴보고 그에 따라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먼저 쓰고 나중에 비춰보는 것은 먼저 찔러보고 그 반응을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법을 우선으로 한 것입니다. 비춤과 씀을 동시에 하는 것은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어 수행의 길로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밭가는 농부에게 가장 소중한 소를 빼앗듯이,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듯이, 뼈를 두드려 골수를 뽑듯이 하는 것입니다. 비춤과 씀의 작은 틈도 주지 않고 극한의 상황에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해 비춤과 씀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는 먼저 비추고 쓰고, 때로는 먼저 쓰고 비추며 어떤 때는 비춤과 씀을 동시에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제자가 질문을 하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고, 때로는 스승이 질문을 하기도 하고 먼저 대답해 주기도 하며, 제자의 근기에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진흙 속을 함께 뒹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애틋하게 생각하듯이 제자를 대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역시 과량인(過量人)이 최고입니다. 과량인은 일반적인 기준을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근기가 남다른 사람입니다. 스승의 가르침과 방편에 의지하고 않고 진리를 향해 굳건하게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정도 근기는 돼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작은 역량이나마 갖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師示衆云, 道流야 切要求取眞正見解하야 向天下橫行하야 免被這一般精魅惑亂이니라 無事是貴人이니 但莫造作이요 祇是平常이라 擬向外하야 傍家求過하야 覓脚手하면 錯了也로다 祇擬求佛하니 佛是名句니라


해석) “여러분! 간절하게 진정견해를 구해서 천하를 향해 거침없이 다니면서 도깨비 귀신에 홀리지 말아야 한다. 일없는 사람이 참으로 귀한 사람이니 다만 조작하지 말아야 한다. 평상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그대들이 밖으로 향하고 옆집을 찾아 헤매면서 붙잡을 것을 찾고 있으니 그르칠 뿐이다. 다만 부처를 구하려고 한다지만 부처란 이름과 글귀일 뿐이다.”


강의) 진정견해(眞正見解)는 앞서도 나온 말입니다. 정견(正見)입니다. 우리가 정견을 갖게 되면 발이 가는대로 천하를 주유해도 도깨비와 같은 잘못된 견해나 주장에 더 이상 현혹되지 않게 됩니다. 일체의 망념이 사라져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겠다거나 조사가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조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되려고 하거나, 된 것처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지금 그 마음, 그 상태로 부처입니다. 이것이 평상의 마음입니다. 또한 진리입니다.


이런 까닭에 진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 내재돼 있습니다. 부처가 되겠다고 진리를 찾아 밖으로 내달리고 옆집을 찾아 헤매봐야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밖으로 아무리 부처를 구하려 해도 그것은 실체가 없는 이름과 글귀일 뿐입니다. 그림 속의 음식이 진짜 음식이 아니듯 이름과 글귀로 만나는 부처 또한 진실한 부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還識馳求底아 三世十方佛祖出來는 也祇爲求法이니 如今參學道流도 也祇爲求法이라 得法始了요 未得하면 依前輪廻五道니라 云何是法고 法者는 是心法이니 心法이 無形하야 通貫十方하야 目前現用이언마는 人信不及하고 便乃認名認句하야 向文字中求하야 意度佛法하니 天地縣殊로다


해석) “그대들이 밖으로 쫓아다니며 구하려고 하는 그가 누구인지 아는가? 삼세와 시방에 부처와 조사가 출현한 것은 다만 불법을 구하기 위해서다. 지금 여기서 공부하는 그대들도 또한 법을 구하기 위함이다. 법을 얻어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만약 법을 얻지 못하면 과거와 같이 오도(五道)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마음의 법이다. 마음의 법은 모습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두루 관통하며 눈앞에서 지금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믿지 못하는 까닭에 이름과 글귀에 집착해 문자 속에서 법을 구하고 사량과 분별로 이해하려 든다. 그래서 하늘과 땅 만큼이나 멀어져 버렸다.”


강의) 지금 우리는 밖으로 부처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찾아 헤매는 그 사람이 바로 부처 자신입니다. 삼세시방에 출현한 모든 부처님과 조사도 법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수행을 하는 것도 결국 법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와 우리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법을 얻지 못하면 결국은 끝없는 윤회를 할 뿐입니다. 그런데 법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심법(心法)입니다. 마음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마음은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막힘없이 관통하며 지금 현재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이름과 글귀에 집착을 합니다. 불상에 절을 하고 경전을 외우며 사량과 분별로 진리를 이해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진리에서 아득히 멀어지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道流야 山僧說法은 說什法고 說心地法이니 便能入凡入聖하며 入淨入穢하며 入眞入俗하나 要且不是眞俗凡聖이라 能與一切眞俗凡聖安著名字요 眞俗凡聖이 與此人安著名字不得이니라道流야 把得便用이요 更不著名字니 號之爲玄旨니라


해석) “여러분! 산승이 어떤 법을 설하려고 하는지 아는가? 나는 심지법(心地法)을 설한다. 능히 범부에도 들어가고 성인에게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이나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며, 참된 것에도 들어갔다가 속된 것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대들 스스로 진속범성(眞俗凡聖)이 아니면서 모든 진속범성에 이름을 붙이고 있다. 진속범성이 참사람에게 이름을 붙이지는 않는다. 여러분! 알았으며 바로 써라. 이름이나 글귀에 집착하지 마라. 이것을 일러 신비롭고 그윽한 뜻이라고 한다.”


강의) 심지(心地)는 대지(地)가 만물을 품고 키우듯이 마음(心)이 모든 작용의 주체이며 또한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삼계유심(三界唯心)이며 만법유심(萬法唯心)이며 그리하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삼계가 오직 마음으로 이뤄져 있으며, 만법이 오직 마음을 바탕으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범부의 경지에도 들어갔다가 성인의 경지에도 들어갑니다. 깨끗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갑니다. 진속범성(眞俗凡聖)의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무애(無碍))하고 자재(自在)합니다. 더럽고 깨끗함의 차별이나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별을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본질 또는 진리의 당체로서의 마음은 진속범성(眞俗凡聖)의 범주로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불법의 아득하면서도 신비로운 가르침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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