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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은 특별한 공부와 노력이 필요치 않다

가는 곳마다 주인 되면 서 있는 그곳이 그대로 참
참과 거짓 구별도 분별…버리지 못하면 생사 헤매

 

▲소림사 대웅보전 안에 모셔진 불상과 달마상.

 

 

山僧說法은 與天下人別하니 祇如有箇文殊普賢이 出來目前하야 各現一身問法하되 纔道咨和尙하면 我早辨了也니라 老僧이 穩坐에 更有道流하야 來相見時 我盡辨了也니 何以如此오 祇爲我見處別하야 外不取凡聖하며 內不住根本하야 見徹하야 更不疑謬니라


해석) 산승이 설하는 법은 천하의 사람들과 다르다. 예를 들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눈앞에 나타나 일신을 나투어 법을 묻기를 ‘화상에게 도에 대해 묻습니다’ 하자마자 나는 바로 알아차린다. 노승이 가만히 앉아있는데 어떤 수행자가 찾아와 만나면 나는 바로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나는 견해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밖으로 범부와 성인을 따로 취하지 않고 안으로 근본에도 머무르지도 않는다. 나는 견해가 투철해서 어떤 의심이나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강의) 분별의 마음을 갖게 되면 진리에서 바로 멀어지게 됩니다. 어떤 것은 진리다. 어떤 것은 진리가 아니다 라고 말하게 되면 이것은 진리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바로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것입니다. 임제 스님은 진리는 말이나 글로 규정될 수 없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관념으로 취할 수 없습니다. 생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삼법인(三法印)을 통해 제행(諸行)이 무상(無相)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법(諸法) 또한 무아(無我)입니다. 모든 것은 변화하여 일정한 모양이 없습니다.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밖으로 성인과 범부가 영원불멸의 모습으로 존재 할 수 없으며, 안으로 변하지 않는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게 됩니다. 임제 스님께서는 밖으로 범부와 성인을 따로 취하지 않고 근본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뜻입니다. 견해가 투철해지면, 즉 정견(正見)을 이루게 된다면 말은 안과 밖, 진과 속, 부처와 범부와 성인이라는 분별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師示衆云, 道流야 佛法은 無用功處요 祇是平常無事니 屙屎送尿하며 著衣喫飯하며 困來卽臥라 愚人은 笑我나 智乃知焉이니라 古人이 云, 向外作工夫는 總是癡頑漢이라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분! 불법은 특별히 공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 그대로 아무 일이 없으면 된다. 똥을 싸고 오줌을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 쉬면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밖에 나가서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은 전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하였다.”


강의) 불법은 억지로 어떻게 해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의 마음이 인위적인 조작이나 노력도 가하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불법입니다. 무용공(無用功)은 무심(無心)이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노력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말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주 치열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그 노력마저 버려야 합니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임제 스님의 말씀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도 선수가 낙법을 처음 할 때는 온 몸이 멍이 들도록 노력해야하지만, 나중에는 몸에 절로 배게 되면 인위적 노력이 없이도 낙법은 절로 되게 됩니다. 그런데도 낙법을 하면서 동작을 의식하게 되면 몸에 힘이 들어가 제대로 된 낙법은 힘들게 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똥 싸고 오줌 싸고 옷 입고 먹고 자는 것이 그대로 이뤄질 때, 즉 번뇌나 망상 없이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짐 없이 일상이 그대로 투명하게 일상으로 존재할 때 이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나를 떠나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 법당의 불상에서 찾고, 스승의 권위와 문자를 빌어 진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헛된 일입니다.


임제 스님과 동시대 사람으로 조주 스님이 있습니다. 조주 스님의 어록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스님이 묻습니다. “무엇이 급한 일인지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조주 스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소변이 급하네. 소변 누는 것이 작은 일이긴 하나 내가 몸소 해야만 하는 일이네.”


조주 스님은 자애로운 분이기에 친절하게 설명을 했겠지만 만약 임제 스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다면 흠씬 얻어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진리를 알려달라는 말에 조주 스님은 스스로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국은 밖에서 찾지 말라는 말입니다. 조주 스님의 깨달음은 조주 스님의 것일 뿐입니다. 단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맛을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듯이 결국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부처님도, 문수보살, 보현보살도 대신 해 줄 수 없습니다.


儞且隨處作主하면 立處皆眞하야 境來에 回換不得하야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하야도 自爲解脫大海니라 今時學者는 總不識法하고 猶如觸鼻羊이 逢著物安在口裏하야 奴郞을 不辨하며 賓主를 不分이라 如是之流는 邪心入道하야 鬧處卽入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이요 正是眞俗家人이니라


해석)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돌이켜 바꿔 놓을 수 없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즘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이 무엇인지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 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노예와 주인을 분간하지 못하고 손님과 주인도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에 들어 온 사람들로 번거롭고 시끄러운 일에 빠져 버린다. 그러므로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이들이야 말로 진짜 세속의 사람이다.”


강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은 임제록에서 가장 유명한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곧 참된 곳, 진실한 곳, 극락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가볍게는 현재 인식되는 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여불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부처가 되면, 혹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게 되면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고 정토며 극락이고 열반의 세계라는 설명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삶의 대부분 시간을 주인으로 살지 못합니다. 기분 나쁜 소리를 하면 바로 화가 일어나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짜증이 밀려옵니다. 경계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소리라는 경계에, 이해라는 경계에 너무나 쉽게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주인이 아닌 객체가 돼서 이리저리 헤매는 까닭에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은 극락이 아니라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주인으로 설 수만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으며 진리를 오롯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 나쁜 습관들이 쌓여있다 하더라도, 아버지를 죽이거나(殺父), 어머니를 죽이거나(殺母), 성인을 죽이거나(殺阿羅漢), 부처님 몸에 피를 내거나(出佛身血), 승가의 화합을 깨거나(破和合僧)하는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죄를 지었더라도 수처작주(隨處作主)만 할 것 같으면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법을 모릅니다. 양의 코에 무엇이 닿기만 하면 그것이 음식인지 아닌지 구분도 없이 미친 듯 입에 집어넣는 것처럼, 세속의 경계에 이끌려 삼독(三毒)에 물들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출가해서 가사를 입고 있다하더라도 결코 진정한 의미의 출가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夫出家者는 須辨得平常眞正見解하야 辨佛辨魔하며 辨眞辨僞하며 辨凡辨聖이니 若如是辨得하면 名眞出家니라 若魔佛을 不辨하면 正是出一家入一家니 喚作造業衆生이요 未得名爲眞出家人이니라 祇如今에 有一箇佛魔하야 同體不分흠이 如水乳合이라 鵝王은 喫乳요 如明眼道流는 魔佛을 俱打하나니 儞若愛聖憎凡하면 生死海裏浮沈이니라


해석) “진심으로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평상의 참되고 바른 안목으로 부처와 마군을 잘 판단해야 한다. 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고 범부와 성인을 가려내야 한다. 이와 같이 가려낼 수만 있다면 진짜 출가라고 할 수 있지만 만약 부처와 마군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저 한 집에서 나와 다른 집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이는 업을 짓는 중생이지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 부처와 마군이 함께 있어서 나눌 수 없는 것이 마치 물과 우유가 섞여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위는 우유만 먹는다. 눈 밝은 도인이라면 마군과 부처를 다 함께 부셔버린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에 떴다 잠겼다 할 것이다.”


강의) 지혜가 없으면 겉모습이나 권위에 의지해 사물을 판단하게 됩니다. 부처와 마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겉으로는 화려하고 거룩해 보이지만 내면엔 알맹이 하나 없는 허깨비가 들어 있을 수 있고 옷은 거지처럼 누더기를 걸쳤지만 내면은 환한 지혜가 가득 찬 성자일수도 있습니다. 만약 진짜 수행자라면 속지 않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 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저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집을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때로는 부처와 마군이 함께 섞여 있거나 한 몸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물과 우유가 섞여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거위가 물과 우유가 섞인 먹이통에서 우유만 골라 먹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잘 구분해서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눈 밝은 도인이라면 부처와 마군을 동시에 부셔버려야 합니다. 참과 거짓을 구별해 내는 것도 결국에는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마지막 단계에서 이 분별을 버리지 못하다면 결국은 해탈하지 못하고 생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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