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토욕구천불동(吐千佛洞)
5. 토욕구천불동(吐千佛洞)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2.07.19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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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님 붙잡던 투루판은 벗어날 수없는 용광로인가

화염산에 막힌 삼장법사처럼
대협곡 입구에서 발묶인 일행

 

지표 온도 80℃ 열사의 땅은
포도 맺는 풍요의 땅 됐지만

 

5세기 융성했던 석굴사원은
허술한 담장 안에 갇힌 신세

 

 

▲토욕구대협곡에 조성돼 있는 천불동 입구. 강을 따라 십여 미터만 올라 가면 4~5세기 투루판 불교의 중심지였던 석굴사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없다’는 관리국 측의 단호한 입장에 발이 묶인채 입구에 서서 하염없이 계곡 안쪽만 바라보다 돌아섰다. 

 

 

“제가 여기 온 것은 대법(大法)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와서 장애를 만났으니, 단지 육체는 왕 곁에 머물 수 있겠으나 정신은 머물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장 스님은 고창국(高昌國)에서 발이 묶였다. ‘천축에 이르지 못한다면 끝내 한 걸음도 동쪽으로 옮기지 않겠다’ 맹세하고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구법의 길에 나선 현장이었다. 그러나 ‘고창국에서 우매한 중생들을 이끌어 달라’며 애원하다 못해 협박(?)하다시피 붙잡는 고창국왕 국문태가 그를 막아섰다. 국문태의 지극한 신심이 눈에 밟히지만 어찌 여기서 멈추랴. 현장은 단식을 감행했다. 숨소리가 잦아들어가는 현장을 보고 결국 국문태는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고창국이 바로 지금의 투루판(吐魯番)이다.


일행도 발이 묶였다. 고창국 옛 수도인 고창고성에서 불과 10km 가량 떨어진 토욕구(吐)대협곡의 천불동(千佛洞) 입구서다. 입구에는 ‘개방하지 않는다’는 짧은 안내문뿐이다. 현지 관리인들은 “얼마 전 홍수로 길과 석굴 일부가 무너졌고 도난 사건까지 발생해 당분간 개방하지 않는다”고 좀 더 긴 설명을 해준다. 하지만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결론은 마찬가지다. 토욕구천불동을 보기위해 7시간 이상 차를 달려 톈산산맥을 넘어왔다. 가뜩이나 풀린 다리가 힘없이 꺾인다.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 땅. 오지 못하게 막아서는 땅. 투루판은 그런 곳인가.


북쪽에서 내려오던 유목민들은 톈산산맥을 넘어서지 못했고 서쪽에서 밀려들어오던 이슬람세력도 투루판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한족의 통치력이 서쪽으로 온전히 미친 것도 투루판 목전까지였다. 투루판에는 동쪽 중원의 문화와 북쪽 유목민의 문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쪽 이슬람의 문화가 모두 모여들어 경쟁하고 융화되어 꽃피웠지만 어느 것도 온전히 이곳을 벗어나진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땅을 문명의 용광로라 칭했다.


기후 역시 용광로에 비유할 만하다. 투루판은 톈산산맥 동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자그마한 오아시스 분지다. 동서길이 총 240km, 남북길이 약75km에 불과하다. 하지만 분지의 중심인 아이딩호(艾丁湖)는 중국에서 가장 낮은 땅, 해발 -154m다. 즉 바다보다 154m나 낮은 땅이다. 투루판 전역의 80%가 해수면보다 낮다. 모든 방향이 고봉준령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태양열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분지 안에 갇힌다. 높은 산맥을 넘어오는 바람은 덥고 건조하다. 그러니 여름철 최고기온은 50℃에 육박하고 지표면의 온도는 80℃까지 올라간다. 열기는 땅위의 수분을 순식간에 증발시켜 버린다. 고온 건조한 열사의 땅. 그 어떤 것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영락없는 용광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혹한 자연에 맞섰다. 특히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 지하수로를 만들었다. 수로는 투루판 전역에 천여 갈래, 전체 연장길이 5000km에 달한다. 투루판의 명물인 동시에 운하, 만리장성과 더불어 중국 3대 역사(물론 한족들의 주장이지만)의 하나로 손꼽히는 지하수로 ‘카레즈’다. 수로를 따라 톈산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흘러들어 메마른 땅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투루판 사람들은 그 물을 이용해 포도와 참외를 키웠다. 고온 건조한 투루판의 기후는 과일의 당도를 높였다. 마침내 이 땅은 ‘풍요로운 곳’이라는 뜻의 ‘투루판’이 된 것이다. 카레즈는 지금도 투루판의 생명줄이고 이곳의 포도와 참외도 세계 최고의 품질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 투루판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신기한 지하수로 카레즈도, 현장 스님의 자취가 서린 고창고성도, 투루판의 명품 포도가게도 아닌 토욕구천불동이었다. 15세기 이슬람세력이 투루판을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불교는 이 지역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토욕구대협곡을 따라 조성된 천불동은 실크로드 톈산북로를 따라 전파된 불교 전성기의 산물이자 쇠망기의 증인이다.


토욕구의 불교 역사는 기원전으로까지 올라간다. 기원전1세기 투루판지역에는 흉노족이 세운 차사전국이 들어선다. 실크로드 교역의 요충지에 자리 잡은 차사전국은 여러 민족과 국가의 침입에 성쇠를 반복하며 5세기 중반 투루판분지에 고창국이 들어설 때까지 지속됐다. 투루판에 언제 불교가 전래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차사전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서진(265∼316) 시기 이곳 마자촌은 이미 중요한 불교성지가 되었다. 이후 4~5세기에 걸쳐 토욕구대협곡에는 수많은 석굴 사원이 조성됐고 이후 오랜 기간 번영을 누렸다.

 

 

▲‘불타오르는 산’ 화염산이다. 메마른 붉은 산과 불꽃처럼 보이는 협곡들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여름철 지표면의 온도가 섭씨 80도에 육박하니 ‘불타오르는 산’ 이라는 이름이 결코 허언은 아니다.

 


특히 고창국은 차사전국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지원했다. 당나라 현장 스님 역시 서역으로 구법의 길을 떠나며 이곳 고창국의 국문태왕으로부터 극진한 공양과 후원을 받아 구법길의 초석을 마련했다. 그러한 역사 때문인지 투루판에는 현장 스님과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火焰山)과 파초선 이야기다. 그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화염산은 사실 하나의 산이 아니라 투루판 분지 가장자리에 있는 동서 98㎞, 폭 9㎞의 작은 산맥이다. 건조한 기후 탓에 풀 한포기 없는 화염산은 전체가 검붉은 색을 띄고 있다. 또 산맥 전체에 줄지어 형성된 구불구불한 협곡들이 마치 불타오르는 불꽃과 연기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실 여름철 지표 온도가 80℃까지 올라가니 산 전체가 불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성 싶다.


토욕구대협곡은 바로 이 화염산 남쪽면의 협곡 가운데 일부다. 화염산에 가로막힌 삼장법사처럼 일행도 화염산 아래 토욕구대협곡 입구의 마자촌 어귀에서 발목을 잡힌 것이다.


이 고풍스런 흙집마을은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가장 오래된 위구르족 촌락이다. 약 1700여 년 전에 형성되기 시작해 고창국 시기에는 왕명으로 천불동이 조성될 만큼 투루판 불교의 중심지였다. 이후 티베트족이 세운 토번, 한족이 세운 송, 몽고족이 세운 원이 차례로 이 지역을 차지하는 상황에서도 불교의 맥은 면면히 이어졌다. 그러나 원나라 말기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시작했고 14세기 말에는 이슬람세력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마자촌에서는 불교와 이슬람문화의 치열한 충돌이 벌어졌고 결국 불교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시기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제자를 비롯해 이슬람 역사에서 성현으로 추종받는 7명이 마자촌 인근 화염산에 묻혔다고 한다. 덕분에 중국내 최대 이슬람성지이자 세계적으로도 7대 이슬람성지에 포함돼 ‘동방의 메카’로 불린다. 중국의 이슬람교도들은 이 성현들의 무덤을 참배하기 전 마자촌을 먼저 순례한다. 20세기 초까지는 인도, 터키 등지의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으로 성지순례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슬람교의 성지답게 마을에는 한 눈에 보아도 규모가 큰 이슬람사원이 우뚝 서 있다. 그 앞을 지나 강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면 토욕구천불동 입구다. 이슬람교에 밀려난 불교의 위상을 보여주듯 토욕구천불동 입구는 초라하다. 손으로 툭 밀면 풀썩 넘어져버릴 것 같은 허술한 나무토막 울타리가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경계 앞에서 일행은 1시간여 동안 관리인과 실랑이를 벌인다.


“토욕구천불동을 보려고 새벽부터 톈산산맥을 넘었어요. 좀 들여보내주세요.”


“위(문화재 관리국)에서 안 된다니 어쩔 수가 없어요.”


한 눈에 보아도 위구르족으로 보이는 관리인도 난감한 표정이다. 슬쩍 들여보내주고 싶은 마음도 있는 듯 하지만 모험을 감행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해 보인다. 토욕구천불동 입국에서 벌어진 이 작은 소란으로 마자촌 어르신, 청년, 아이들까지 모여들어 구경을 겸한 토론과 조언을 쏟아냈지만 아무도 그 허술한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토욕구천불동 입구의 마자촌.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가장 오래된 위구르족 촌락인 마자촌은 ‘동방의 메카’라 불리는 이슬람성지다.  

 


토욕구대협곡에는 현재 94개의 석굴이 남아있다. 이 석굴군을 토욕구천불동이라고 통칭한다. 한때 투루판 최고의 불교성지였지만 이슬람세력의 지배를 받는 동안 석굴들은 방치되고 그 안의 벽화와 불상들은 훼손당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버려진 석굴은 1879년에야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공식 개방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더 지난 2004년 10월에 이르러서다. 그 사이 이곳 천불동의 벽화와 불보살상들도 수없이 약탈당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천불도와 보살도도 훼손이 심하다고 한다. 훼손이 심해 약탈을 피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 허술한 담장 하나만 훌쩍 넘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 역사의 현장이 불과 몇 십 미터 앞인데. 설득과 사정, 협박과 회유를 총동원하고도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한 일행은 결국 발길을 돌렸다. “못 가게 한다면 단식을 하겠다”고 결연히 맞섰던 현장 스님이 문득 떠오른다. ‘들여보내주지 않는다면 단식을 하겠다고 할 걸 그랬나?’ 어쭙잖게 현장 스님 흉내라도 내볼까 싶지만 이미 수백 년을 이슬람교도로 살아온 이들에게 현장 스님의 일화가 무슨 큰 감동을 주랴. 보지 못해 더 그립고, 갖지 못해 더 욕심나는 범부의 마음이 자꾸 뒤돌아보게 만든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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