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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라면 스스로 일없는 사람임을 알아야

기자명 법보신문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면 경계에 떨어져
부처가 바로 중생이고 중생이 바로 부처

 

깨달음은 지금 이순간, 시간 필요치 않아
일체의 시간 속에 특별한 법은 따로 없어

 

 

▲중국 하북성 정정시 임제사 대웅전.

 


問, 如何是佛魔오 師云, 儞一念心疑處가 是箇魔니 儞若達得萬法無生하면 心如幻化하야 更無一塵一法하야 處處淸淨하나니 是佛이니라 然이나 佛與魔는 是染淨二境이라 約山僧見處하면 無佛無衆生하며 無古無今하야 得者便得하야 不歷時節이요 無修無證하며 無得無失하야 一切時中에 更無別法하니 設有一法過此者라도 我說如夢如化하노니 山僧所說이 皆是니라

 

해석) 어느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와 마구니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그대의 한 생각에 의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마구니다. 만약 그대의 마음에 만법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환(幻)임을 알아서 다시는 한 티끌, 한 법도 없어서 곳곳이 청정해지면 그것이 곧 부처다. 그러나 부처와 마구니가 이와 같다면 깨끗함과 더러움의 두 가지 경계에 걸리게 된다. 산승이 보는 바에 따르면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고 과거와 현재도 따로 없어서 곧바로 깨닫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치 않다. 따라서 닦을 것도 증득할 것도 없으며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어 일체의 시간 속에 특별한 법이 없다. 설사 이보다 훌륭한 다른 법이 있다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꿈같고 환영 같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산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강의) 하여시불마(如何是佛魔)는 “어떤 것이 부처와 마구니입니까?”라는 뜻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것이 부처라는 마구니입니까?”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처님은 깨끗하고 마구니는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관념 속의 부처님과 마구니는 항상 대립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면 곧 마구니입니다. 불법을 믿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나에게 불성이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 마구니입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이 환영인줄 알아서 아주 작은 티끌이든, 일체의 법이든 집착하지 않아 항상 청정하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만약 부처와 마구니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두 가지 경계에 떨어지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본래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까닭으로 증득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수행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닦아야 할 특별한 법도 없습니다. 만약 이보다 나은 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부연하자면 내가 본래 부처인데, 내가 부처인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처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부처였을까요. 그리고 한때나마 중생이었을까요. 몰랐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였겠지요. 주머니에 금덩이를 담고 있으면서 금덩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 헤매다가 어느 날 문득 주머니에 금덩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경우도 금덩이를 새로 얻은 것은 아닙니다. 원래 나에게 있었는데 몰랐을 뿐입니다. 따로 얻은 것도 아니지만 또한 잃어버린 적도 없습니다. 깨달음 또한 이와 같습니다. 얻고 잃을 것이 없습니다. 또 달리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떠나서 달리 고정불변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여시불마(如何是佛魔) 또한 부처인 마구니로 보는 것이 임제 스님의 뜻에 부합될 것입니다.

 

道流야 卽今目前孤明歷歷地聽者가 此人이 處處不滯하고 通貫十方하야 三界自在하야 入一切境差別호되 不能回換하나니 一刹那間에 透入法界하야 逢佛說佛하며 逢祖說祖하며 逢羅漢說羅漢하며 逢餓鬼說餓鬼하야 向一切處하야 游履國土하야 敎化衆生호되 未曾離一念하고 隨處淸淨하야 光透十方하야 萬法一如니라

 

해석) “여러분! 바로 지금 눈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히 듣고 있는 이 사람은 가는 곳마다 걸림이 없고 시방세계를 관통하고 삼계에 자유자재하다. 온갖 경계에 들어가도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니, 한 찰나에 법계에 뛰어 들어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와 말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와 말하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과 말하며 아귀를 만나면 아귀와 말한다. 일체의 장소와 국토를 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하지만 일찍이 한 생각도 떠나 본 일이 없다. 가는 곳 어디에서나 청정하여 그 빛이 시방에 두루 비쳐 만법이 한결같다.”


강의) 임제 스님이 말씀하신 지금 눈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히 듣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눈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대중들입니다. 이 미혹된 대중들이 본래 무위진인(無位眞人)이며, 진리의 당체이며 또한 부처라는 말입니다. 이를 알게 되면 삼계(三界)에 걸쳐 자재하고 온갖 경계에 들어가도 경계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와 대화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와 대화할 수 있게 됩니다. 중생을 교화하며 세간에 살아도 한 생각도 진리에서 벗어남이 없게 됩니다.

 

道流야 大丈夫兒가 今日에 方知本來無事로다 祇爲儞信不及일새 念念馳求하야 捨頭覓頭하야 自不能歇하나니라 如圓頓菩薩이 入法界現身하야 向淨土中하야 厭凡忻聖이라 如此之流는 取捨未忘하고 染淨心在니 如禪宗見解는 又且不然하야 直是現今이요 更無時節이니라 山僧說處는 皆是一期藥病相治요 總無實法이니 若如是見得하면 是眞出家라 日消萬兩黃金하나니라

 

해석) “여러분! 대장부라면 오늘 바야흐로 스스로가 일없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대들의 믿음이 철저하지 못해서 생각마다 밖으로 내달리며 법을 구하게 되면 자기 머리를 놔두고 다른 머리를 찾느라 스스로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최상의 진리를 깨달은 보살은 법계에 들어가 몸을 드러내 정토에 있으면서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을 잊지 못하여 더럽고 깨끗함에 대한 차별심이 남아있다. 그러나 선종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지 따로 다른 시절은 없다. 산승이 설하는 것은 모두 병에 따라 그때그때 약을 쓰는 것이지 따로 실제 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진정한 출가라고 할 것이며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써도 괜찮다.”

 

강의) 본래무사(本來無事)는 처음부터 할 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敢)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든 법은, 즉 진리는 텅 비어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리가 그런 것임을, 진리의 당체인 우리가 본래 그런 존재임을 알게 되면 처음부터 수행을 한다거나, 도를 닦는다는 그런 것들이 허황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깨달음의 경지에서 그렇다는 말이지, 노력이 중요치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혹한 우리는 이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밖으로 진리를, 도를, 깨달음을 찾아 헤맵니다. 앞서 말한 연야달다가 거울이 사라지자 거울에 비치던 자신의 머리가 없어진 줄 알고 밖으로 찾아 헤매듯이 말입니다. 원돈보살(圓頓菩薩)은 대승불교의 최상의 진리를 깨달은 보살을 말하는데, 이런 보살도 범부를 싫어하고 성인을 좋아합니다. 아직도 더러움과 깨끗함이라는 대립적인 마음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종의 깨달음은 이와 다릅니다.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계단을 올라가듯이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깨닫는 것이지 따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미혹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부처의 씨앗이 있으며 또한 부처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은 지금 바로 이 순간입니다. 달리 증득하는 것도 아니고 먼 훗날을 기약하고 단계를 밟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는 것도 다 방편일 뿐입니다. 고정된 불변의 법이란 없습니다. 일체(一切)가 모두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대장부가 있다면 하루에 만냥을 쓰더라도 허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道流야 莫取次被諸方老師印破面門하야 道我解禪解道하라 辯似懸河하나 皆是造地獄業이니라 若是眞正學道人은 不求世間過하고 切急要求眞正見解니 若達眞正見解圓明하면 方始了畢이니라

 

해석) “여러분! 그대들은 함부로 제방의 노사들에게 인가증명서를 받아 들고 나는 선을 알고 도를 안다고 떠들지 말라. 설사 그의 설법이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말솜씨가 유창하더라도 이는 다 지옥 갈 업을 짓고 있는 것이다. 만약 진정한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허물을 구하지 않는다. 참되고 바른 견해를 체득하는 일이 급하다. 만일 참되고 바른 견해를 얻어 뚜렷하고 분명해지면 일을 남김없이 마쳤다고 할 수 있다.”

 

강의) 어떤 위대한 스승에게 인가를 받았다고 해서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팔만대장경’을 달통해 막힘이 없다하더라도 이 또한 지식일 뿐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허상에 불과합니다. 깨달음은 세상의 평판이나 평가로 체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 즉 정견(正見)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리의 당체를 참되고 바르게 알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미망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참되고 바른 견해가 둥글고 밝은 태양처럼 확연해져야 비로소 할 일을 마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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