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둔황(敦煌)과 모가오굴(莫高窟)-上
7. 둔황(敦煌)과 모가오굴(莫高窟)-上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2.08.21 14: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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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목구멍’에 펼쳐진 사막의 대화랑

서역 문물이 중원으로 가는 입구
풍요한 경제력이 석굴 조성 배경


한족이 불교와 가장 먼저 접한 곳
366년 낙준 스님이 첫 석굴 개착
세계 최대 규모의 ‘벽화 박물관’

 

 

▲모가오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96호굴 입구의 9층 누각. 이 석굴에는 높이 35.5m의 미륵대불이 조성돼 있다.

 

 

한밤을 꼬박 달려 옥문관(玉門關)을 넘었다. 옛 글에 ‘서쪽으로 양관을 나선다’ 함은 처량한 이별과 고단한 여정의 시작을 의미했고 ‘살아서 옥문으로 돌아왔다’는 곧 행복한 재회를 상징했다. 옥문관은 고래로 중국 한족 세력의 서쪽 끝, 그 너머는 ‘오랑캐’의 땅이었다. 그러니 옥문과 양관을 나선다는 것은 곧 서역 정벌을 뜻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별이었다. 반대로 살아서 옥문을 들어선 것은 생사의 갈림길을 넘어 온 것.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행은 야간열차를 이용, 그 옥문관 옆을 지나 ‘중국의 목구멍’ 둔황(敦煌)시에 도착했다. 비록 옥문을 직접 통과한 것은 아니지만 일행에게도 분명 행복한 일이다. 둔황엔 ‘둔황석굴’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모가오굴(莫高窟. 막고굴)’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간쑤성(甘肅省) 둔황시는 옥문관 동남쪽 약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다. 서역의 문물과 문명이 모두 이곳 둔황을 통해 들어온다 하여 중국인들은 둔황을 ‘인후(咽喉)’, 즉 목구멍에 비유했다. 서역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가 둔황을 기점으로 사막남·북로로 나눠지는 것도 둔황을 이같이 비유한 이유다. 이러한 지리 덕분에 동서 문명이 모이고 만나는 둔황은 일찍이 한나라 때부터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거점으로 중시됐다. 둔황이라는 이름도 기원전 100년 전후 한나라 무제가 이곳을 군사요지로 삼아 붙인 이름이다.


둔황에는 상인들이 모여들었고 경제는 풍요로웠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권문세가도 등장했다. 그들의 후원으로, 혹은 장거리 무역의 평안을 발원하는 상인들의 희사로 대규모 불사도 가능했다. 실크로드 최고의 스타, 모가오굴의 탄생 배경이다.


흔희 ‘둔황석굴’이라 하면 모가오굴을 떠올리지만 ‘둔황석굴’이라는 명칭은 모가오굴 외에도 안시위린굴(安西楡林窟), 오개묘석굴(五個廟石窟), 그리고 동서에 각각 위치하고 있는 천불동 등 둔황지역 일대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석굴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 가운데 모가오굴은 둔황석굴의 대명사인 셈이다.


둔황은 한족의 세력권 중 가장 먼저 불교와 접한 지방이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은 둔황의 불교예술을 일러 “동쪽으로 전래된 불교가 성숙한 봉건문화를 가진 지방에서 독특하게 형성된 산물이며 민족(한족)전통문화가 외래종교(불교)의 자극을 받아 나타난 새로운 형태(남경사범대학 유진보 교수 저서 ‘돈황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라고 강조하곤 한다. 서쪽의 ‘오랑캐’들로부터 전래 받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데 방점이 있다.


한족들이 콧대를 높여도 될 만큼 모가오굴은 그 규모와 예술적 수준에 있어 단연 독보적이다. 밍사산(鳴沙山)의 동쪽 끝 절벽에 조성돼 있는 모가오굴은 그 길이가 무려 1.6km에 달한다. 492개의 석굴과 2400여 점의 불상 및 소조상, 그리고 4만5000㎡에 달하는 벽화가 남아 있다. 이 수치는 현재까지 확인된 것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그 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거대한 미술관이나 다름없어 ‘사막의 대화랑’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이곳에 처음 석굴이 조성되고 불상이 모셔진 것은 4세기 중엽이다. “모가오굴은 진 건원2년(366) 낙준이라는 승려가 짓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여러 문헌에서 일치한다. 계행이 청정한 스님 낙준이 이곳에 이르러 맞은편 삼위산이 금빛으로 빛나며 마치 1000개나 되는 부처님이 모습을 드러낸 듯 보였기에 바위를 뚫어 감실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셨다. 그 후 동쪽에서 온 법랑 스님 역시 낙준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그 옆에 석굴을 또 조성했다. 이 때 부터 불과 400여 년 간 석굴은 급속히 증가해 1000여 개에 달했다. 이후 원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고 보수되었다.


그러나 원의 뒤를 이은 명나라가 둔황 지역을 통치하지 못하면서 모가오굴은 국경 밖이 되었다. 청나라에서도 모가오굴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세기 초반까지 모가오굴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여있었다. 중국인들이 지금까지도 ‘도둑’ ‘서양마귀’라며 치를 떠는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그리고 미국의 랭던 워너가 막대한 고서들과 벽화·유물들을 편취해가기 전까지. 그 와중에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로 실려 갔고 후손들은 아직까지도 이 국보급 고문서를 찾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모가오굴의 역사와 운명이 그저 남의 일 같지 않다.


야간열차를 이용한 이동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비교적 깨끗하고 안락하다는 4인용 침대칸을 이용했지만 밤새 흔들리고 추운 열차에서 8시간을 보냈으니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둔황시내 호텔에 여장을 풀고 모가오굴로 향할 준비를 한다. 오늘은 아침 개장 때부터 저녁 폐장시간까지 하루 종일 모가오굴을 살펴볼 계획이다. 그래도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겠지만.

 

 

▲당나라 전성기의 불교미술을 보여주는 45호굴 칠존상 중 좌측의 소조상. 어느것 하나 흠잡을 곳 없는 모가오굴 불교미술의 백미다.

 


둔황 시내에서 20km여 떨어져 있는 모가오굴까지는 차로 30여분. 하천을 끼고 가는가 싶더니 곧이어 황토빛 산맥을 따라 석굴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한 눈에 보아도 모가오굴이다.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입구에서 방문객을 맞는다. 앞서 보았던 어느 석굴유적보다도 세련되고 말끔하게 정리돼 있다. 우리말이 가능한 안내인도 있다고 한다. 지나온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여러 석굴 유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시내에서 마주친 사람들도 대부분 한족들이다. 투루판까지만 해도 흔히 보이던 위구르인들도 자취를 감췄다. 위구르족을 비롯해 티베트족, 회족 등 소수민족은 둔황 인구의 1퍼센트 미만이라고 한다. 한족 문화권으로 들어왔음이 실감된다.


모가오굴에는 둔황의 역사, 즉 중국 역사의 단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각 시대의 시대상과 특징, 문화의 전래와 변화 과정이 석굴과 소조상·벽화 속에 응축돼 있다. ‘화랑’이라기보다는 박물관이자 타임머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싶다.


모가오굴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붉은색의 9층 누각은 사실 96호굴이다. 내부에는 높이 35.5m의 미륵보살상이 조성돼 있다.


이 미륵불은 당나라 초기, 정확히는 당나라 초기 잠시 정권을 장악하고 주나라를 열었던 여걸의 작품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였던 측천무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측천무후는 원래 당 고종의 황후였지만 690년 당나라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황제에 등극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다. 측천무후는 스스로를 세상에 내려온 미륵보살이라 여기며 곳곳에 절을 짓고 미륵대불을 모셨는데 이 석굴과 미륵대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측천무후는 비록 독재를 펼쳤지만 이 시기 백성의 삶은 안정되고 평화로웠다.


역사는 그녀의 치세가 당 태종이 통치했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며 ‘무주(武周)의 치(治)’라 부른다. 비록 주나라는 705년 측천무후가 세상을 떠나며 함께 막을 내렸지만 그 자취만은 남아 이어지고 있으니 중국을 호령했던 여제의 발자취가 결코 작지 않음이다.


전성기에 들어간 8세기 당나라 불교미술의 정수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석굴은 45호굴이다. 정면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제자와 보살, 천왕이 좌우에 대칭의 구조로 조성돼 있다. 이 칠존상은 각각의 소조상들이 빚어내는 유려한 자태, 엄숙하면서도 우아한 표정, 그리고 생동감 있는 표현과 여전히 빛을 간직하고 있는 색체 등 그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 없는 모가오굴 불교미술의 백미다. 보존 상태 또한 완벽에 가까워 1300여 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잊게 만든다.

 

 

▲외부로 노출돼 있는 석굴 입구 곳곳에는 여전히 벽화가 남아있다. 전성기 모가오굴이 얼마나 장엄한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본다.

 


그런가하면 275호굴 미륵불은 모가오굴이 한족만의 역사는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이 석굴은 모가오굴 조성 1기에 해당하는 5세기 초반 이 지역에 잠시 등장했던 북량(北凉, 397년~439년)왕조 시기에 조성됐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교차하고 있는 미륵교각좌상은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의 작품임을 여실히 말해준다. 세 개의 구슬로 만든 삼주보관 형태의 머리장식과 허리 아래에 치마를 걸친 듯한 복식 또한 한족과는 다르다. 또 석굴 내부에 인도식 나무 지붕 장식 등의 형태가 보여 인도의 석굴 양식이 이곳에 까지 전해졌음을 말해준다.


역사의 상처도 모가오굴엔 고스란히 남아있다. 285호굴은 근대 이곳에 휘몰아쳤던 약탈의 광풍을 말해준다. 이 석굴은 서위(535~556)시대인 539년 조성된 것으로 석굴 입구에는 ‘대대대위대통사년세차무오팔월중순조(大代大魏大統四年歲次戊午八月中旬造)’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이 석굴이 조성된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다. 이는 현재 모가오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연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한 기록이다. 덕분에 석굴은 약탈꾼의 표적이 됐다.


1925년 미국인 랭던 워너가 이 석굴의 벽화를 통째로 때어가려던 것을 ‘생계를 팽개치고 15리 길을 달려와 감시한’ 주민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지켜낼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285호 굴에서는 서위 시대의 특징, 즉 갸름한 얼굴, 날씬한 몸매, 그리고 가늘고 작은 눈, 얇은 입술 등을 보여주는 수행승 소조상의 미소가 방문객을 맞는다. 이 석굴을 조성하는데 보시한 동참자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는 벽화도 무사하다. 서역·남북조·인도의 문화가 하나로 융합되며 나아가 불교와 도교의 만남까지도 말해주는 많은 벽화들도 옛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결국 역사와 문화를 지켜낸 힘의 원천은 무력과 권세가 아닌 하나로 뜻을 모은 민중과 그들의 지속적인 관심이었다.  <계속>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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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신라 2014-07-16 11:35:40
붓다는 머리를 깎지 않았고 깎으라 명하지 않으매 ...... 두번째 사진에는 깎은 머리가 있으니 저기서부터가 ... 원조군요.

신라 2014-07-16 11:33:31
둔황은, 신라지역이므로 프랑스에 있는 그 책은 한국으로 가져올 필요가 있으랴 ? 그냥 둔황으로 ! 원위치로 돌려놔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