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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를 확실히 믿어야

기자명 법보신문

사대는 인연화합 의해 조합된 것
이를 알아야 경계 휘말리지 않아


법문을 듣는 주체는 육신 아니며
육신을 능숙하게 부리는 그 사람

 

 

▲중국 마안산 계태사. 사진은 중국 스님들이 계를 받았던 계단이 있는 선불장 전경.

 


問, 如何是四種無相境고 師云, 儞一念心疑가 被地來礙하며 儞一念心愛가 被水來溺하며 儞一念心瞋이 被火來燒하며 儞一念心喜가 被風來飄하나니 若能如是辨得하면 不被境轉하고 處處用境이라 東涌西沒하며 南涌北沒하고 中涌邊沒하며 邊涌中沒하야 履水如地하며 履地如水하나니 緣何如此오 爲達四大如夢如幻故니라

 

해석) 물었다. “무엇이 네 가지 모양이 없는 경계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한 생각 의심하는 마음이 흙이 되어 그대의 앞을 가로막으며, 한 생각 애욕의 마음이 물이 되어 그대를 빠지게 하며, 한 생각 분노하는 마음이 불이 되어 그대를 불태우며,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이 되어 그대를 날아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내용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경계와 대상에 끌려 다니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경계를 활용하게 될 것이다. 동쪽으로 솟았다가 서쪽으로 사라지고 남쪽에서 솟았다가 북쪽으로 사라지고 가운데서 솟았다가 가장자리에서 사라지고, 가장자리에서 솟았다가 가운데서 사라진다. 땅을 밟는 것처럼 물을 밟고, 물을 밟는 것처럼 땅을 밟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대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음을 완전히 통달해 알았기 때문이다.”

 

강의) 네 가지 모양 없는 경계, 즉 사종무상경(四種無相境)은 우리 육체를 이루고 있는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四大)를 말합니다. 지수화풍은 인연화합에 의해 조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질은 공(空)입니다. 임제 스님은 지수화풍 사대를 마음의 상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수화풍은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지만 또한 의심과 애욕과 분노와 들뜬 마음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대(四大)가 우리 마음에 번뇌와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집착 때문입니다. 사대가 영원할 것이라는 애착이 끊임없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킵니다. 사대는 인연에 따라 일어난 것임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경계와 대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됩니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경계에 휘말리지 않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처한 곳마다 진리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임제 스님의 말씀대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입니다.

 

道流야 儞祇今聽法者가 不是儞四大로대 能用儞四大하나니 若能如是見得하면 便乃去住自由니라 約山僧見處하면 勿嫌底法이라 儞若愛聖하면 聖者는 聖之名이니라 有一般學人이 向五臺山裏求文殊하나니 早錯了也라 五臺山에 無文殊니라 儞欲識文殊麽아 祇儞目前用處가 始終不異하며 處處不疑는 此箇是活文殊요 儞一念心無差別光이 處處總是眞普賢이요 儞一念心自能解縛하야 隨處解脫은 此是觀音三昩法이니라 互爲主伴하야 出則一時出하나니 一卽三三卽一이라 如是解得하면 始好看敎니라

 

해석) “여러분! 지금 나의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사대로 이뤄진 그대들의 육신이 아니다. 그대들의 사대를 능숙하게 부리고 있는 사람이다. 능히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이내 가고 머무름에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의 견해에 의하면 꺼려할 것이 전혀 없다. 그대들이 성인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성인이란 성(聖)에 붙은 이름일 뿐이다. 보통 학인들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만나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틀린 일이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의 눈앞에 또렷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디에서나 의심할 바 없는 그것이 살아있는 문수다. 그대들의 한 생각에 차별 없는 마음의 빛이 어디에나 두루 비치는 것이 진짜 보현보살이며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어헤치고 어디에서나 해탈하는 그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삼매법이다. 서로 주인이 되기도 하고 조연이 되기도 하며 나올 때는 동시에 나온다. 따라서 하나가 셋이고 셋이 곧 하나다. 이런 진리를 이해해야 비로소 경전에 설해져 있는 가르침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강의) 임제 스님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앞서 사대는 공한 것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사대로 이뤄진 육체가 법문을 듣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요. 임제 스님은 사대를 능숙하게 부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확연히 알게 되면 생사에 걸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을 좋아하고 따르려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우리의 환상이 만들어 논 허깨비일 뿐입니다.


임제 스님은 성인이다 범부다 차별을 두는 그 마음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흔히들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말을 합니다. 중국에서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임제 스님 때도 그랬나 봅니다. 그런데 오대산에 과연 문수보살이 계실까요. 문수보살이 특정 지역에 특별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이냐 하는 말입니다. 임제 스님은 문수보살을 찾는 사람은 이미 글러먹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현보살도 관세음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살은 바로 우리 마음의 작용입니다. 맑고 밝고 차별 없는 마음이 곧 문수보살이며 보현보살이며 관세음보살입니다. 흔히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으로 보현보살은 행원 또는 실천의 상징으로 관세음보살은 자비의 상징으로 말합니다. 이들 보살들은 우리 밖에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육신을 굴리면서 법문을 들으며 밝고 맑고 차별 없는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내는 이가 바로 문수보살이며 보현보살이며 관세음보살입니다. 내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보살이 밖에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찾으려고 하면 진리 안으로는 한발자국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들 보살의 특징들은 마음을 쓸 때마다 함께 작용합니다. 지혜가 발현될 때 행원이 함께 하고 자비가 발현될 때 지혜가 발현되는 것입니다. 함께 작용하지만 전혀 걸림이 없습니다. 무차별의 세계입니다. 전혀 차별이 없이 서로 주인이 되기도 하고 조연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으로 세분의 보살은 결국은 하나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입니다. 화엄경에서는 이들 세 보살을 진리의 빛인 비로자나불의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임제 스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비로자나불 또한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재돼 있습니다. 우리의 밝고 맑은 마음이 비로자나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진리이며 부처님입니다. 임제 스님 앞에서 법을 듣는 바로 그 주인입니다. 이런 이치를 확연히 알고 경전을 봐야 경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師, 示衆云, 如今學道人은 且要自信이요 莫向外覓하라 總上他閑塵境하야 都不辨邪正하나니 祇如有祖有佛은 皆是敎迹中事니라 有人은 拈起一句子語하야 或隱顯中出하면 便卽疑生하야 照天照地하야 傍家尋問하야 也太忙然이로다

 

해석) 임제 스님이 대중에게 말했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모두 다 옛사람들이 방편으로 설한 문자와 언설에 휩쓸려 어떤 것이 삿되고 어떤 것이 바른지 구분을 못하고 있다. 예컨대 조사니 부처니 하는 것은 모두 다 교학의 자취 가운데 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한 구절의 말을 거론하였을 때 그 말의 의미가 확연치 않으면 곧바로 의심을 내어 이리저리 온갖 생각을 다해 보며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옆 사람을 찾아가 물으며 망연자실해 한다.”

 

강의) 부처님은 자등명(自燈明)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임제 스님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의심하지 말고 스스로를 믿어야 합니다. 절대로 밖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마조 스님도 “그대들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믿어야 한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면 기도를 잘 받는다느니. 어떤 다라니를 하면 좋다느니, 어느 절 부처님이 영험하다느니, 이런 불교적이지 못한 말들을 많이 합니다. 물론 이 또한 진리로 들어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편은 결국 방편일 뿐입니다. 문제는 방편의 길에서 헤매다 어느덧 방편을 진리로 착각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뗏목은 강을 건너기 위한 방편인데, 뗏목에 집착하다 어느새 뗏목을 진리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옛 사람이 방편으로 설한 문자나 언설에서 진리를 찾다보면 어떤 것이 그른지 바른지 구분 못하게 됩니다.

조사니 부처니 하는 것은 다만 발자취일 뿐입니다. 불교는 자취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처가 되는 공부입니다. 진리 그 자체에 들어 가야합니다. 스스로가 만법의 주체이며 내재돼 있는 불성을 일깨워 반드시 깨달음을 체득하리라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 우리 안에 모두 갖춰져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大丈夫兒여 莫祇麽論主論賊하며 論是論非하며 論色論財하야 論說閑話過日하라 山僧此間에는 不論僧俗이요 但有來者하면 盡識得伊니 任伊向甚處出來하나 但有聲名文句하야 皆是夢幻이니라

 

해석) “대장부라면 주인이니 도적이니, 옳으니 그르니, 사랑이니 재물이니 하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세월을 보내지 말라. 산승은 이곳에서 승속을 논하지 않으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다 알아내 버린다. 그가 어디에서 오든지 모두 소리와 이름과 문구일 뿐 다 꿈이요 허깨비일 뿐이다.”

 

강의) 대장부라면 세상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인이니 도적이니’로 해석한 논주논적(論主論賊)에서 주(主)는 왕(王)으로, 적(賊)은 왕과 대립되는 사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요즘말로 풀이하면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옳다 그르다는 시비에서 벗어나고 남녀의 사랑과 재물에서도 초연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름지기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하는 대장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제 스님 당시에도 이런 대장부를 만나보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승속에 차별을 두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보아도 목소리만 요란하고 지위로 자신을 드러내고 문자에 얽매여 꿈과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 밖에 없다고 한탄을 하고 계신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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