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호국대룡이 된 문무왕 [끝]
23. 호국대룡이 된 문무왕 [끝]
  • 김상현 교수
  • 승인 2013.01.0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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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녹여 농기구 만들고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된 통일의 주역

거대한 왕릉 조성 대신
검소한 불교화장 유언

 

대왕암에서 장사 지내고
동해 앞바다에 유골 뿌려

 

 

▲삼한통일의 주역 문무왕이 죽어 장사를 지낸 대왕암. 여기에서 장사지내고 화장 한 뒤 남은 유골은 바다에 산골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문무왕(661~681)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대왕이다. 삼국간의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고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 수 있던 평화의 시대가 대왕에 의해 열렸다. 대왕은 평소에 지의(智義)법사에게 자주 말했다.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이에 법사가 물었다.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 합니까?”
왕은 답했다.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지 이미 오래다.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되어도 짐의 뜻에 합당하다.”


문무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만인 681년 7월21일에 돌아갔다. 대왕은 유조(遺詔) 중에 그의 장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산과 골짜기는 변해서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아가니,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 모양의 빛나는 향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나라 임금이 묻힌 서릉의 망루는 단지 동작이라는 이름만이 전할뿐이다. 지난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서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는 것은 책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지 못한다. 가만히 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아플 뿐이다. 이와 같은 일은 즐거이 행할 바가 아니니, 내가 죽어 열흘이 지나면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의하여 화장할 것이며 장례를 치르는 제도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도록 하라.”


참으로 놀라운 유언이다. 국왕의 장례는 거대한 능(陵)을 조성해서 매장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경주 시내에 남아 있는 거대한 왕릉들이 그 오랜 전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통일의 영주 문무왕은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평소에 불법을 깊이 믿었고, 죽어 내생에도 한 마리의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모시며 나라 지키기를 염원했던 국왕은 자신의 장례를 불교식에 따라 화장으로 치를 것을 미리 유언으로 밝혀두었던 것이다.


신하들은 국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법으로 장례를 모셨다. 화장법에 의한 장례는 화장 이후 남은 뼈를 가루 내어 바다 등에 뿌리는 산골(散骨)의 방법과 남은 유골을 묻는 장골(藏骨)의 방법이 있지만, 흔히 전자에 의한다. 대왕의 시신은 고문 밖의 뜰에서 화장했다. 그리고 감은사가 있는 동해 바다 중의 큰 바위, 즉 대암(大巖) 위에서 장사지냈다. 이로부터 그 바위는 대왕암(大王巖)으로 불렸다. 대왕암은 가루 낸 뼈를 동해에 뿌리며 마지막으로 문무왕의 장례를 치룬 곳이다. 왜 감은사 앞의 바다 중의 바위 위에서 장례를 행했는가? 감은사는 처음 문무왕이 창건을 시작했던 인연 있는 절이고, 죽어서 한 마리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어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기를 원했던 대왕의 뜻에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대왕암은 가루 낸 뼈를 바다에 뿌리며 마지막 문무왕의 장례를 모신 곳이다. 물론 ‘삼국유사’ 왕력에는 문무왕의 능이 감은사 바다 중에 있다고 했다. 이 기록에 주목하게 되면, 대왕암은 장골처(藏骨處)인 셈이고 따라서 문무왕릉이 된다. 근래에도 대왕암을 문무왕의 해중릉이라는 주장이 대두해서 교과서에까지 이 설을 따라 서술하고 또한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대왕암은 산골로 장례를 치룬 기념할만한 장소는 될지언정 문무왕의 능일 수는 없다. 문무왕은 유언으로 인력을 동원하여 능을 조성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를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다. 만약 대왕암이 항간의 주장처럼 문무왕의 유해를 봉안한 능이라면, 세계 유일의 해중릉 조성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일 뿐 아니라, 대왕의 유언과도 어긋나는 것일 수 있다.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 인용된 감은사의 사중기(寺中記)에는 유언에 따라 유골을 장사지낸 곳, 즉 장골처(葬骨處)를 대왕암이라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에도 동해 중의 대석(大石) 위에서 장례 모셨다고 했고,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대왕암을 단순히 장사지낸 곳이라고 했다. 연산군 원년(1495) 12월 16일 시강관(侍講官) 표연말(表沿沫)도 다음과 같이 아뢴 바 있다.


“불교에는 화장하는 일이 있어서 신라 문무왕이 죽음에 화장하여 그 재를 동해에 흩날려버렸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도 문무왕의 장례를 화장한 뒤에 뼈를 흩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료는 문무왕비문 중의 기록이다. 조선 정조 20년(1796)에 문무왕비편이 발견되었는데,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쓴 것이었다. 이 비의 명(銘)에는 ‘장작을 쌓아 장사지내고 분골경진(粉骨鯨津)했다’는 구절이 있다. 경진은 고래가 사는 큰 바다를 의미한다. 분골은 남은 뼈를 가루 낸다는 말이다. 유해를 가루 내는 것은 산골을 위해서다. 대왕이 돌아가신 후 몇 년 사이에 세워졌을 문무왕비, 이 비문 중의 이 구절은 남은 유해를 가루 내어 저 동해 푸른 바다에 흩어서 장사지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라에서 왕릉비(王陵碑)가 건립된 예로는 태종무열왕릉비, 문무왕비, 성덕왕릉비, 흥덕왕릉비 등이 있다. 모두 왕릉 곁에 세워졌던 것이다. 만약 대왕암이 진정 문무왕릉이었다면 문무왕릉비는 해중릉이 바라다 보이는 이견대(利見臺) 정도에 세워져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무왕비가 발견된 곳은 대왕암과는 전혀 관계없는 선덕왕릉 아래 사천왕사 근처였다. 이 비가 서 있었던 곳은 처음 화장한 장소와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문무왕 이후에 화장으로 장례를 치른 국왕은 34대 효성왕과 37대 선덕왕, 그리고 38대 원성왕뿐이다. 이들은 모두 유언을 통해 화장할 것을 밝힌 경우다. 특별한 유언이 없는데도 국왕의 장례를 화장으로 모시는 일은 신하들의 도리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원성왕의 경우, 유명(遺命)으로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을 했다는 기록 뿐, 화장 후에 산골했는지 유해를 장골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효성왕과 선덕왕은 모두 화장 후에 뼈를 동해에 뿌릴 것까지를 유언으로 당부하고 있다. 아마 원성왕의 경우도 그 유해를 동해에 뿌렸을 것인데, 화장 이후의 동해 산골은 문무왕의 장례로부터 전통이 되었던 것 같다. 문무왕은 동해 가에 절 하나를 짓기 시작했다. 바다로 오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한 진국사(鎭國寺)였다. 그러나 이 역사를 다 마치지 못한 채 대왕이 돌아가자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682년에 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고 하였다. 이 절 금당의 계단 아래에는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용은 곧 문무왕의 화신인데, 문무왕은 돌아간 뒤에 그가 평소에 염원했던 대로 용이 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신문왕 2년(682) 5월 초하루, 바다를 지키는 관리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바다의 왜병 진압 위해
동해가에 감은사 조성


죽어서도 나라 걱정에
재앙 없애는 피리 보내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조성한 감은사. 원래 이름은 진국사였으나 후에 감은사로 바뀌었다. 전각은 모두 사라지고 두 개의 탑만이 있는 폐사지로 남아있다.

 


“동해 중에 있는 작은 산이 감은사를 향해 떠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이 점을 친 뒤에 아뢰었다.


“부왕(父王)은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진호하시고, 삼십삼천의 한 아들인 김유신은 인간으로 내려와서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시려 함이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배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은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행차하여 그 산을 바라보며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그 위에는 한 그루의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됩니다.”


왕은 감은사로 가서 유숙했다.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해지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캄캄해지기를 7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 달 16일이 되어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왕을 맞이했다. 왕이 용에게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해지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나무란 합해져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대왕께서는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부왕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와 같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이를 왕에게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사자에게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산과 용은 문득 사라졌다. 대궐로 돌아온 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로 삼아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였으며, 바람이 자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김상현 교수

삼국통일의 영웅 문무왕, 그는 살아서 병기를 녹여 농구로 만드는 시대를 열었고 죽어서도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문무왕과 김유신이 준 나라를 지키는 보배, 그것은 무기가 아니라 피리였다. 음악은 조화고 평화이기에.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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