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전법륜지 녹야원
2. 초전법륜지 녹야원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3.01.1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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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수레바퀴 첫 걸음 따라 60명 아라한 탄생한 불연의 땅

3000년 고도 바라나시는
인도 학문·문명의 중심지
“전설보다도 오래된 도시”


34m 높이 대탑 위용 당당하지만
1500여 스님 머물렀던 녹야원엔
흐트러진 건물 잔해만 즐비해

 

 

▲ 7세기 중엽까지도 1500여 명의 스님들이 머물렀던 녹야원엔 수많은 석탑과 가람의 흔적이 남아있다.

 

 

“베나레스(바라나시의 영어식 지명)는 역사보다 오래됐고, 전통보다 오래됐으며, 심지어 전설보다도 오래됐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합쳐 놓은 것보다 두 배는 더 오래돼 보인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전 세계를 다니며 펼친 그의 강연에서 바라나시를 소개할 때마다 이와 같이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바라나시는 이런 감탄과 찬사로도 부족한 도시다.


바라나시의 역사는 기원전 1000년경 아리안족의 일부가 강가강 유역에 자리 잡으며 시작되었다. 지구상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 살아있는 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다. 여러 국가들이 이 지역을 정복했고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가 모두 바라나시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꽃폈다. 바라나시는 2000여 년 간 인도의 학문과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오늘날 바라나시는 가장 종교적인 도시이며 가장 인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일행을 싣고 밤새 달린 기차는 새벽녘 강을 건너 바라나시로 들어섰다. ‘바라나강과 아시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도시의 이름에 걸맞음이다.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바라나시는 오랜 역사를 품은 채 잠들어있기가 버거운 듯 새벽녘부터 술렁인다. 물안개가 자욱한 강가에는 목욕을 하러 나온 사람들과 그들을 실어 나르는 싸이클릭샤(자전거수레)가 즐비하다. 기차가 멈춰선 바라나시정션역 주변에도 새벽기차에서 내리는 승객들과 짐을 실을 요량으로 시간 맞춰 모여든 오토릭샤(오토바이수레)와 택시들이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혼란의 틈을 비집고 나와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7세기 중국의 구법승 현장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바라닐사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바라나시를 소개하고 있다.
“…마을이 즐비하게 서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집마다 엄청난 부가 넘쳐나고 방마다 신기한 재화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며 세속에서는 학문을 익히는 데 힘쓰고 있다.…”
예로부터 바라나시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특히 바라나시는 옷감, 그 가운데서도 화려한 색의 실크로 유명했다.

 

또한 세상의 모든 향기로운 것들을 다 섞어놓은 듯 한 향료가 가득한 도시이기도 했다. 귀한 옷감과 향료는 도시를 풍요롭게 했고 그 풍요를 기반으로 철학과 종교가 꽃을 피웠다. 수행자들이 모여들었음 또한 당연하다.


태자 싯다르타가 출가한 후 아버지 숫도다나왕은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신하들을 보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싯다르타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신하들은 실망할 숫도다나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거운 발길을 돌렸지만 일부는 태자 곁에 남아 함께 수행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꼰단냐, 왑빠, 밧디야, 마하나마, 앗사지가 그들이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난 후 이들은 수행자 싯다르타의 곁을 떠났다.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하고 수자타의 공양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헤어진 다섯 수행자들은 바로 이곳 바라나시 인근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바라나시에 모여들었던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러했듯 다섯 수행자 역시 숲에 머물렀다. 바라나시 인근의 작은 작은 마을 사르나트에 있는 사슴동산, 즉 녹야원이 그들의 거처였다.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부처님은 이들을 찾아 이곳 바라나시까지 오신 것이다. 서울에서 강릉에 이를 정도의 먼 길을 걷고 걸어 마침내 녹야원에서 다섯 수행자에서 처음으로 법을 펴셨다. 성지순례의 첫 목적지는 바로 부처님의 법음이 처음 울려퍼진 초전법륜의 성지 사르나트다.


사르나트는 바라나시에 북동쪽으로 10km여 떨어져 있다. 지금은 별다를 것 없는 인도의 시골 마을이지만 붓다의 첫 가르침이 울려 퍼진 이 특별한 불연의 장소는 한 때 불교성지로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인도 최초의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 대왕이 기원전 262년 불교로 개종한 후 이곳 사르나트의 녹야원이 초전법륜지임을 알리는 석주를 세웠다. 5세기에는 중국의 구법승 법현 스님, 7세기에는 현장 스님이 이곳을 찾아 불교성지로 번영한 사르나트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7세기 중엽 이곳을 순례한 현장 스님은 당시 사르나트에 1500여 명의 스님, 100미터 가까이 되는 높이의 불탑, 거대한 아쇼카석주 등과 함께 수 많은 불탑과 사원들이 즐비했다고 기록, 사르나트가 불교성지로 여전히 흥성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후 이슬람교가 확산되면서 도시의 건물들은 파괴되었고 불교는 급속히 쇠퇴했다. 급격한 쇠락의 결과는 8세기 이곳을 순례한 신라의 구법승 혜초 스님의 기록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혜초 스님은 ‘피라날사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나시를 기록하며 “이 나라 역시 황폐했다. 왕도 없다.…당간위에 사자상이 있다.”라고 전했다. 도시와 유적은 이미 파괴됐고 아쇼카왕의 석주만이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음이다. 파괴된 도시는 복구되지 못한 채 수백 년 세월을 방치되었고 오늘날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1835년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사르나트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물의 상당수는 지금도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녹야원 입구에 들어서면 멀리 거대한 대탑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처음으로 가르침을 펴신 초천법륜지임을 알리는 다메크스투파다.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석주모양의 이 대탑은 높이 34미터, 지름이 28미터에 달한다. 현재 남아있는 대답은 약 500여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수차례의 재건과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실제로 대탑에서는 기원전 200년 경 마우리아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벽돌이 나오기도 해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해준다. 대탑의 표면을 장엄하고 있는 기하학 문양과 꽃무늬 역시 4~5세기 이 지역을 장악했던 굽타왕조의 것이다.


다메크스투파 주변으로는 수많은 건물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불상을 모셨을 사원터, 수행자들이 머물렀을 승원터, 탑을 세웠을 자리, 명상에 이용했을 수행터 등. 남아있는 기단의 모양과 건물의 배치된 모양을 통해 용도와 구모를 짐작해본다. 1500여 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었다는 현장 스님의 기록이 결코 허언이 아니다. 왕조의 흥망에 따라 번영하고 쇠퇴했을 녹야원 초전법륜지의 역사가 흩어진 벽돌기단의 흔적을 따라 서리서리 흐른다.


다메크스투파 앞에 다다른 순례단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잠시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다섯 수행자의 재회. 수행자 싯다르타가 고행을 버리고 타락했다며 떠나갔던 다섯 수행자들은 붓다가 된 싯다르타, ‘환한 얼굴빛과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 광채’에 휩싸인 옛 도반의 모습 앞에서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 ‘외면하자’고 했던 다섯 수행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발우를 받아들고, 앉을 자리를 준비하고, 발 씻을 물을 가져와 석가모니 부처님을 맞이했다. 바로 지금 이 다메크스투파가 서 있는 자리에서.

 

 

▲ 석가모니부처님이 최초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신 녹야원. 초전법륜지임을 상징하는 높이 34m의 대탑 다메크스투파가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다. 스투파 주변에 즐비했을 법당과 불탑, 수행처는 8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확산되며 파괴되었다. 비록 지금은 흐트러진 기단과 벽돌 유적 뿐이지만 오랜 기간 이곳이 불교성지로 번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은 옛 도반이었던 다섯 수행자를 위해 법을 펴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환한 보름달이 뜰 무렵 진리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그날 밤 다섯 수행자 가운데 꼰단냐가 처음으로 아라한과를 얻었다. 이후 닷새 동안 나머지 네 명의 수행자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 먼저 깨달은 이가 아직 깨닫지 못한 도반을 위해 바라나시 시내에서 탁발을 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그 첫해의 우기를 이곳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와 보내셨다. 그러는 동안 바라나시 부호의 아들이었던 야사를 비롯해 모두 55명의 청년들이 녹야원으로 찾아와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들은 부처님과 함께 우기를 보내며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 이로써 세상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포함해 모두 61명의 아라한이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곳 녹야원에서 함께 머물렀다. 60명의 아라한이 탄생한 곳. 녹야원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보드가야의 우루벨라와 더불어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성스러운 깨달음의 땅이 되었다.


도대체 이 땅의 그 무엇이 석가모니부처님과 그토록 특별한 인연을 만들었을까.


깨달음을 얻은 후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가장 먼저 법을 펼 대상으로 옛 스승이었던 알라라깔라마를 떠올리셨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수행자 웃다까라마뿟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 바라나시의 녹야원까지 오는 동안 이교도 수행자, 뱃사공을 만났지만 그들 모두 진리의 법과는 인연이 없었다. 눈앞에 부처님을 보고도 법을 청하지 않았음이다.


부처님께서 그토록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오시는 동안 단 한 명이라도 법을 청했다면 초전법륜지는 이곳 녹야원이 아닌 보드가야와 바라나시 사이의 그 어디 즈음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대탑 다메크스투파는 진리의 수레바퀴가 구른 최초의 순간, 그 역사적인 장소를 일깨우는 동시에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구하지 않고서야 어찌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법의 수레바퀴는 세상 그 어는 곳에서라도 당당히 구를 것이라고.


녹야원 맞은편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관·전시하고 있는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이 있다. 이곳 박물관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 가운데 하나인 초전법륜상과 아쇼카석주의 사자기둥머리가 보관돼 있다. 녹야원에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르게 카메라 등 일체의 촬영장비는 물론 간단한 필기도구조차 소지가 불가능하다. 금속탐지기를 지나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야쇼카석주를 비롯해 책에서만 보아왔던 불상과 각종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전시돼 있다. 하지만 철저하게 검문을 하던 입구에서와는 달리 박물관 내부에서는 유물들이 별다른 보호 장치도 없이 전시돼 있지 않은가. 유리벽 하나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불상과 조각상 들. 일부 관람객들은 별다른 제약 없이 불상의 발을 만지거나 조각상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박물관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전시돼있는 초전법륜상 앞에는 다행히 관람객들의 접근을 막는 보호선이 설치돼 있어 그나마 무지한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 이것이 지극히 인도다운 모습인가 싶기도 하지만 박물관을 나서는 걸음은 무겁고 답답하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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