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4. 티베트 사원의 교육제도-하

섭정에 맞설 경우 활불이 독살 당하기도

유목 사회서 활불제는
권력 안정성 유지하는
효과적인 정치 제도


달라이라마 짧은 수명은
불안정했던 통치권 대변

 

 

▲ 전대의 활불로 인준된 어린영동을 달라이 라마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섭정활불은 어린영동의 탐사와 확인 및 인준의 모든 기획과 결정권을 가졌다. 사진은 섭정활불이 거주했던 중국 사천성의 티베트 홍교사원.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라는 거룩한 별에 의해서 유지되고 힘을 발휘하는가? 외관적으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들은 설역(雪域)고원에서 티베트인들로부터 추앙받는 존재이자, 대체 불가한 종교적 능력을 배양한 인간 신(神)이기 때문이다. 또 그들이 위대하게 보이는 것은 스스로의 법력으로 윤회와 환생을 주관할 수도 있고 티베트인들의 고통과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따뜻한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베트에는 이들 존재외에는 없는가? 다시 말해 이 위대한 수행승들이 없으면 티베트가 유지될 수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그들에 버금가는 종교적 능력과 인성을 갖춘 수행승들이 즐비하다. 대표적으로 섭정(攝政)활불이 그러하다. 그는 평생 불교공부와 내면의 영적수행을 위해 정진한 고승이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종교적으로도 매우 성숙되고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가 숨기고 있는 독살스런(?) 정치적 행정적 카리스마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대 달라이 라마와의 상호 관계에서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다.

티베트에서 종교와 정치가 밀접하게 결탁한다는 사실은 ‘활불’(活佛)제도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활불제도는 티베트 사회에서 기득권을 보유하고 있었던 속세의 귀족세력과 사원세력, 그리고 상승 라마집단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세습을 유지하기 위하여 종교적 상징적 인물, 즉 신격화된 활불을 배양하고 그 사상적 배경으로써 환생이론을 결합하여 만들어낸 티베트 스타일의 정치제도라고 볼 수 있다. 고대 티베트 사회는 독특한 인문학적 환경 속에서 그들만의 지도자를 배출하고 승계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했다. 특히 대다수가 유목민인 티베트의 생활공간에서 지도자를 객관적으로 선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역사 속에서 유목민은 역사적 연속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민족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활불이라는 지도자를 배출해내고 그를 정점으로 응집하는 티베트사회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안정적이었다. 또 기존 불교종파의 세력을 용이하게 유지하면서 지도자 승계문제도 자연스럽게 분쟁 없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불제도는 종파의 최대 위기라고 할 수 있는 정권교체의 시기(활불의 승하)에 외부의 영향력을 극소화 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대의 활불(대표적으로 달라이 라마)이 친정(親政)을 하기 전까지 섭정(攝政)의 권리를 누가 갖느냐는 것이다. 다음의 도표를 살펴보자.


이 상관표는 역사적으로 달라이 라마와 섭정 동안의 통치시기를 보여주는 상호 관계 도표이다. 이 도표 속에서 예상 밖의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달라이 라마의 통치시기를 거의 섭정이 대리 통치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가만히 따져보면 1751년부터 1950년까지 평균 13년에 한 번씩 통치자가 바뀌었는데 그 기간에 섭정이 통치한 기간은 전체의 77%의 점유율을 보인다. 만약 13대 달라이 라마의 통치 기간인 1895~1933년 기간마저 제외한다면 섭정의 통치 기간은 무려 94%에 다다른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달라이 라마는 그저 전세영동의 합법성을 획득한 상징적 활불에 지나지 않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도표에서 확인되어지듯이, 1757년부터 1895년까지 티베트 정교(政敎)의 실질적인 리더는 달라이 라마가 아닌 섭정활불들이었다. 심지어 8대 달라이 라마는 성년이 되어 정치와 종교의 권한이 정식으로 전이(轉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섭정에게 모든 종교 사무의 권한을 위임하여 기존의 영향을 유지하도록 배려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섭정의 역할과 직무는 전대 활불로 확인되어진 어린 영동이 성년이 될 때까지 불경 공부에서부터 인성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정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보모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린 영동이 성년이 되어 달라이 라마로 추존되어도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한편으로는 불경 공부만을 천착해온 구도자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항(특히 정치)을 섭정에게 의뢰하고 협조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섭정이 본인의 의무와 시기가 다하면 달라이 라마의 보좌를 그만두고 소속사원으로 귀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섭정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그동안 축적해온 종교적, 정치적 인프라를 이용해서 계속적으로 권한을 유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달라이 라마가 이러한 상황에 불응하거나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역대 달라이 라마의 평균 수명에서 그 해답은 간접적으로 찾을 수 있다. 성인이 되어 전세영동에서 달라이 라마로 전이될 때의 시기는 매우 중요하다. 만약 섭정과의 관계가 돈독하다면 그는 온전히 달라이 라마로 옹립되고 활불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독살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될 수 있다. 이는 5대나 13대 달라이 라마처럼 강력한 정치적 카리스마를 확립하지 않고서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6대나 8대 달라이 라마처럼 감성적인 측면이 특별히 강했던 달라이 라마는 정치적 색채를 구축하기 힘들었다. 그만큼 섭정의 지위와 권력은 막강했고 그를 따르는 세력은 방대했다.


이런 티베트의 궁정 생리를 감안할 때 8대 달라이 라마는 나름 현명하게 자신의 보위를 유지하려 했다. 섭정에게 모든 권한을 물려주고 자신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뒤로 물러난 것이다. 9대 달라이 라마가 10세에, 10대, 11대, 12대 달라이 라마가 각각 21세, 18세, 20세에 요절한 것에 비하면 그는 역대 달라이 라마 중에서 비교적 장수의 삶을 살았다. 그는 47세에 승하했다.


이들의 죽음이 정치적 암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견해는 오래전부터 대두되어왔다. 대략 1세기 반에 걸치는 1750년에서 1895년 사이에 달라이 라마가 실제로 교권과 신권을 같이 행사할 수 있었던 기간은 단지 10년 미만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당시 달라이 라마의 지위와 통치권이 매우 불안했음을 시사해준다. 외부와의 소통을 담당하고 대외적 사무를 총괄했던 섭정은 사실상 어린 영동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향후 신격화된 달라이 라마의 형성과 완성에 이르기까지 영향이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활불제도가 탄생한 이래로 티베트의 섭정은 보이지 않는 실질적 권력자였던 것이다.

 

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