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반지 쿠시나가르 - 하
8. 열반지 쿠시나가르 - 하
  • 남수연 기자
  • 승인 2013.03.20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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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택한 열반 장소는 가난한 이들의 곁이었다

부처님 법체 다비했던
다비장 람바르스투파
둥근탑 손 닿는 곳엔
온통 불자들 올린 금박

 

 

▲ 쿠시나가르의 살라나무 아래서 열반에 든 부처님의 법체는 사람들의 애도 속에 이운돼 1.5km 가량 떨어진 이곳에서 다비됐다. 그 자리를 기념해 조성된 전탑이 람바르스투파다. 

 

 

좀처럼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해가 떴는데도 사방이 여전히 희뿌옇다. 열반당을 나와 구름 속을 산책하듯 쿠시나가르의 거리를 걸어 다비장으로 향한다. 아직 이른 시간 때문인지 길가는 한산하다. 별다른 집이나 건물도 없어 비교적 깨끗해 보이는 쿠시나가르의 거리는 평온하다 못해 적막해 보인다. 그저 작고 평범한 인도의 시골마을, 쿠시나가르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런 모습이다. 그 때문인지 열반당을 나선 이후 일행 모두 말이 없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열반, 그 역사의 가르침이 지금 이 순간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음이다. 모두들 가슴 속 품어 안은 그 가르침과 대화하는 듯 묵묵히 걸음을 옮긴다.


멀고 고단한 길을 마다않고 성지를 찾아오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장소,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2500여 년 전의 그 날을 함께 숨 쉬게 된다. 신화나 전설과도 같이 느껴지던 일이 바로 이곳에서 펼쳐졌음을 느끼며 고개 끄덕이게 된다. 인간 붓다를 우리는 비로소 그려보게 된다. 비록 이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일지라도 그 환희와 가르침은 아주 오래 가슴에 남는다.


열반당에서 1.5km, 느린 걸음으로도 20여분 남짓이면 다비장에 다다른다. 람바르스투파로 불리는 이곳은 부처님의 법체가 다비된 장소다. 법체를 화장하기 위해 쌓아올렸던 장작더미처럼 흙벽돌로 쌓아올린 커다랗고 둥근 스투파가 그 자리를 기념하고 있다. 스투파의 기단,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은 온통 금빛으로 반짝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양한 금박이다.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듯 일행은 스투파를 오른쪽으로 돌며 석가모니불을 합송했다.


살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법체를 이곳까지 이운해 오는 동안 소박한 쿠시나가르의 사람들은 깃발과 일산을 받쳐 들고 슬픈 음악을 연주했다. 거리는 깨끗이 청소되었고 백성들은 꽃을 뿌리고 향을 피우며 부처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무릎까지 쌓이는 꽃잎을 헤치며’ 거리를 지나온 법체는 이곳에서 마지막 불길 속에 사라져갔다. 물론 이적도 있었다. 마하가섭이 도착할 때까지 장작더미에는 불이 붙지 않았고 마하가섭이 도착한 후에는 법체를 모신 철곽이 열리더니 부처님께서 두발을 내미셔 마하가섭의 마지막 예배를 받으셨다. 그리고 장작더미에는 저절로 불이 붙어 하늘을 삼킬 듯 치솟아 올랐다. 법체를 모신 철곽과 황금마저 남김없이 녹아 사라질 만큼 거세던 불길이 사라진 자리, 불길에도 타지 않은 영롱한 사리가 남았다. 사람들은 다비를 수습해 공회당에 모시고 칠일 동안 공양 올렸다. 모든 것이 엄숙하고 법답게 진행됐다.


하지만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다비식이 진행되고 사리에 공양 올리는 동안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들은 이웃나라 대표들이 속속 쿠시나가르로 모여들었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 밧지연합의 릿차비족, 카필라바스투의 샤카족, 알리카파의 불리족, 라마촌의 콜리야족, 웨타비파의 바라문들, 그리고 파와의 말라족이 사리 분배를 요구했다.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 탑을 세우고 공양하고자 하는 마음은 모두 같았지만 속세에서 양보란 어떤 경우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눌 수 없다, 무력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각국의 등등한 기세가 한 순간 쿠시나가르의 공회당을 휘감았다. 사리분배 논쟁은 다행히 아자타샤트루왕의 사신인 지혜로운 도나의 중재로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사리는 여덟 등분으로 분배되었고 각국에 사리탑이 세워졌다.

 

가난하고 작은 도시에서
열반에 드신 붓다의 뜻은
보이는 겉모습에 얽매여
분별하지 말라는 가르침

 

 

 ▲ 왼쪽부터) 열반당 앞에서 만난 가난한 인도 어린이의 미소가 꽃처럼 맑고 순수하다. 람바르스투파 앞에 마련된 향로에는 이른 아침부터 향과 꽃 공양이 가득하다. 람바르스투파를 참배하는 불자들 가운데는 금박으로 탑을 장엄하는 이들도 많다.

 


바로 이곳 람바르스투파에서 그 모든 이적과 역사가 벌어졌다. 탑을 돌며 또 다시 의문이 떠오른다. 부처님께서는 왜 이곳에서 열반에 드셨을까. 이 작고 궁벽한 시골마을에서.


“이곳을 작은 도시의 황량한 숲이라 말하지 말라. 먼 옛날 마하수다사나 왕이 다스리던 시절 도읍이었던 이곳은 동서로 12유순 남북으로 7유순에 이르는 큰 도시였단다. 쿠시와티로 불렸던 이곳에는 물자가 넘쳐나고 백성들이 가득했으며 밤낮 오가는 우마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단다. 진귀한 새들이 노래하는 숲 사이에 갖가지 보배로 장식한 화려한 누각이 있었고, 금모래가 깔린 맑고 깨끗한 연못에 연꽃이 만발했단다. 아난다, 이곳은 결코 궁벽한 도시도 황량한 곳도 아니란다.”


대도시에서 열반에 드시라는 아난다 존자의 청에 대한 부처님의 답이다.


부처님의 눈에 이곳은 궁벽한 도시도 황량한 곳도 아니다. 깨달음을 이루신 분,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분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순차적인 구분이 아닐 것이다. 크고 작음, 많고 적음, 풍요롭고 가난함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비교하고 가늠해 열반의 장소를 고르는 것은 결코 부처님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니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쿠시나가르에 고여있다.


열반당에서부터 일행을 졸졸 쫓아오며 연꽃과 염주 등 잡다한 물건을 내미는 아이들, 땟물 줄줄 흐르는 저 아이들도 부처님께서 이곳을 열반의 장소로 삼으신 이유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가난하고 옹색한 이들 곁에서 열반에 드시는 것. 평생 길에서 잠들고 눈뜨신 부처님, 분소의를 걸치고 발우 하나만을 지닌 채 걸식하신 부처님이 마지막까지 머물고자 하신 곳은 바로 저 가난한 이들의 곁이었는지도 모른다. 권력을 갖은 이들, 많은 재산을 갖은 이들의 화려한 장엄대신 슬픔에 젖은 쿠시나가르 사람들이 올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받으며 그들의 삶을 축복해주는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밤을 보내셨다. 마지막까지도 그들의 손을 붙잡고 계셨던 부처님께 이곳 쿠시나가르는 ‘결코 궁벽한 도시도 황량한 곳도’ 아니었을 터다.


좀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만일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기르나 밧지연합의 수도 바이살리처럼 강성한 나라에서 열반에 드셨다면, 그래서 그곳 어딘가에서 다비했다면 사리분배는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강대국이 힘을 앞세워 사리분배를 거부했다면 아마도 여러 나라가 뒤엉킨 큰 전쟁이 일어나거나 가장 힘센 나라에서 사리를 독점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 숙연한 장소에 조문객으로 온 강대국의 대표들이 사리분배를 이유로 힘자랑을 하는 것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사리분배가 평화롭게 끝난 것 또한 쿠시나가르가 작은 시골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분소의·발우 하나만 갖고
평생 가르침 펴신 부처님
생애 마지막 늦은 밤까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셔

 

 

▲ 부처님의 다비장인 람바르스투파 앞에서 한 스님이 오래도록 절을 하고 있다. 맨 바닥에 머리 조아린 스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을 마치고 일어서는 스님의 눈시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곱씹을수록 부처님의 열반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언급하시자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해 마음 조급하던 아난다 존자가 묘수를 떠올렸다. 신통력을 이용해 열반을 미루시라 간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되물으셨다.


“내가 더 살기를 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 갈망, 헤어지지 않으려는 갈망이 아닌가? 만약 내가 지금 그대들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대와 승가에 커다란 해악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만일 내가 수명을 연장한다면 그 이유는 반드시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로 하여금 집착과 미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조장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 말로 바로 그대들이 집착과 미움을 벗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될 때가 아닌가.”(‘혁명가 붓다’ 중에서)


부처님의 거절은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 한 사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이익. 열반 또한 그 선택의 하나였다. 부처님께서 춘다의 공양을 받고 병을 얻자 춘다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열반이 춘다 때문이라는 책임론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단언하셨다. 성도하셨을 때 최초로 올린 공양과 반열반에 드실 때 마지막 올린 공양의 공덕이 같다고 말이다. 싯다르타의 성도, 부처님의 출연으로 인류가 얻은 이익과 부처님의 열반으로 얻은 이익 또한 같음이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법’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지 80년, 깨달음을 이루신 후 45년의 세월, 인간 붓다는 그렇게 사셨고 열반으로 그 가르침은 온전히 인류의 것이 되었다.


이 위대한 스승, 그 분의 마지막 가르침이 서려있는 곳. 무릎이 닳도록 예배한들 부족할 뿐이다. 곳곳에서 순례객들이 바닥에 몸을 던져 경배한다. 흙 묻은 이마로 고개 들어 탑을 우러르는 불자들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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