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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장식품

기자명 법보신문

과장된 모습은 거짓의 크기를 말한다

장신구로 자기 표현할 땐
본래 모습에 착각 생겨나
실천 없는 말과 행동 역시
삶을 공허하게 만드는 일


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마음과 태도를 지니는 것이 우리 삶에 좋습니다”라고 자주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도 정말로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게 잘 안돼요”라며 하소연을 하곤 한다. 참으로 원하기는 하는데, 생활에서 잘 안 되는 것이 많은 우리는, 진실한 사람인가 거짓된 사람인가. 정행품 경문을 보자.


“영락구슬 등의 장신구를 착용할 때면, 중생들이 거짓 장식품을 떼어버리고 진실한 곳에 도달하기를 발원해야 한다.”


‘영락구슬… 착용할 때면’에서 영락의 영(瓔)은 목에 거는 장신구이고 락(珞)은 몸이나 옷에 장식하는 장신구다.

 

과거에 비해 현대에는 모양 좋은 장신구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 과학 기술과 교통의 발달로 재료를 구하기도 쉽고 가공하기도 쉬우며 먼 곳까지 운반하기도 쉽다. 좋은 재료의 보석을 이용한 값비싼 장신구에서부터 싼 재료로 만든 값싸고 모양 좋은 장신구도 많이 있다. 장신구를 이용해 자기 모습을 표현할 때는 본래의 모습보다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 위에 옷과 장신구를 이용해 표현한 이미지는 우리를 과장되게 표현하곤 한다. 과장된 표현과 본래의 모습 중 우리는 어느 것에 친밀감을 느끼는가.


진실한 모습과 과장된 모습사이에는 사실에 대한 착각이 들어선다. 착각을 일으키는 크기가 거짓의 크기가 된다.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옷이나 장신구만이 아니다. 우리의 말과 실천력 사이에 틈이 있을 수 있다. 그 틈의 크기가 역시 거짓의 크기가 된다. 우리는 말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장식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말로 표현한 만큼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말로 표현된 우리자신은 유능하거나 자비로워서 대단히 훌륭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 실천력은 평범한 수준에 머물고 있을 수 있다. 평범한 우리를 평범함을 넘어 과장해서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거짓을 낳는다. 이런 행동을 반복해서 행하면 어리석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요즘 어린이들은 ‘열공’ 중이다. 유치원시절부터 학원을 전전하며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경쟁적인 학습열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인가 아니면 부모가 좋아하는 것인가. 아이의 자존심 때문인가 부모의 자존심 때문인가. 내 아이가 내 생명의 연장이며 내 자존의 연장이니 아이를 통한 대리 경쟁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자식을 많이 낳는 예전에도 그랬는데 자식이 하나나 둘밖에 없는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복(有福) 배우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모두가 소중할 것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습관은 배움의 기초 가운데 기초가 된다.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가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은 진실한 것인가 거짓된 것인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술이 좋은 이유가 많기도 하다.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운을 없애주는 데도 술이 좋고, 용기를 갖게 하는 데도 술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술이 도움이 된다고 하니, 술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에게 술 마시는 습관을 물어보니, 요즘에는 잘 취하고 가끔 실수도 한다고 한다. 다음날 해놓은 약속은 잘 지키는지 물어보니, 간혹 술을 많이 마시면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한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자신이 해놓은 약속이, 지킬 수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는 가변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약속을 해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면 그는 그 순간 진실한 사람인가 거짓된 사람인가.


‘중생들이 거짓 장식품을 떼어버리고’에서 ‘거짓 장식품’은 우리의 삶 속에 너무도 많이 들어와 있다. 거짓 장식품의 이점을 누리다가 우리가 진실한 삶과 거리를 점점 멀리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진실하지 않아서 이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를 향하여 진실을 가장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마련이니까. 어느 날 우리가 거짓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의 삶은 공허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진실하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어주었을 지도 모른다. 결과야 항상 나중에 나타나지만, 우리는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진실한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진실한 곳에 도달하기를 발원해야한다’에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수준과 우리 마음의 정성 정도에 따라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달라진다. 말을 기준으로 볼 것인가 마음을 기준으로 볼 것인가.

 

▲도암 스님

말과 행동 가운데 무엇을 기준으로 볼 것인가. 일시적이어서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들은 진실한 것인가 거짓된 것인가. 양자 물리학적인 입장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 모두는 일시적이고 무상한 것이다. ‘금강경’에 “모든 존재하는 모습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다”라고 한 구절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 애증의 집착을 내려놓고 몸과 말과 생각의 행위를 일치시켜, 거짓이 만든 삶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한다.

 

도암 스님 송광사 강주 doam1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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