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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주감암주(州勘庵主)

기자명 법보신문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을 때 주인의 삶이 가능하다

기독교는 신이 삶 판단하지만
불교는 스스로 당당한 삶 주인


타인 평가에 일희일비 하는 건
나뭇잎같은 수동적 삶에 불과


인간은 다른 매개가 없어도
당당한 삶의 주체 될 수 있어

 

 

▲ 그림=김승연 화백

 

 

조주(趙州)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암자 주인은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주는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라고 말하고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다시 조주가 어느 암자 주인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물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그곳 암자 주인도 역시 주먹을 들었다. 그러자 조주는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나”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절을 하였다.

무문관(無門關) 11칙 / 주감암주(州勘庵主)

 

 

1. 불교·기독교는 동서양 사유 대표

 

사람이 사는 일에 어떻게 동양과 서양이 다르겠습니까. 그렇지만 동양과 서양은 다르기는 다릅니다. 상이한 언어와 생활환경, 그리고 오랜 전통은 많은 차이점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치 동일한 꽃이라도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과 색, 그리고 향내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흔히 동양이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라면 서양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인상일 뿐입니다. 왜냐고요. 서양의 사유 전통도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특성이 있는 것처럼 동양의 사유 전통도 서양에 못지않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만 하더라도 인명(因明, hetu-vidyā)이라는 논리학의 전통이 있습니다. 인명이라는 말은 ‘이유나 근거[因]’를 ‘해명한다[明]’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물론 서양 논리학과는 디테일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불교의 인명학은 동양의 사유에서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유가 가능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유나 근거를 따지면서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숙고한다는 것은 논리학적 사유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이 구별되는 가장 극적인 지점은 어디일까요. 이런 의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 사유와 기독교 사유의 차이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불교와 기독교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순히 두 전통이 각각 상이한 사유 형식을 대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두 전통이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전혀 다른, 때로는 이질적이기까지 한 이해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생전에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원죄를 갖고 있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남겨진 일은 자신의 삶을 검열하며 사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기독교의 인간은 항상 절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전전긍긍하며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죄를 심판하는 것은 피고인 자신이 아니라 재판관인 것처럼,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절대자이기 때문이지요. 절대자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 혹은 절대자의 인정을 받으려 갈망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인간의 내면을 규정하는 핵심입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나 그의 추종자 호네트(Axel Honneth, 1949출생)는 ‘인정(Anerkennung)’의 논리를 통해 기독교적 인간을 세속화시킵니다. “나는 당연히 인정 행위 속에서 존재하며, 더 이상 매개 없는 현존재가 아니다.” ‘예나 시대의 실재철학(Jenaer Realphilosophie)’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헤겔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 아닌 무엇인가의 인정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적 인간이 신이 자신을 인정할 때에만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었다면, 헤겔이나 호네트의 인간은 타인이 자신을 인정할 때에만 자신을 인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이 타인으로 바뀌었을 뿐, 인정의 논리에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요.


2. 인정 주체 따라 불교 기독교 구별

 

헤겔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매개 없는 현존재가 아니다.” 여기서 매개(mediation)라는 말은 사다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땅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사다리를 통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매개이지요. 눈치가 빠르신 분은 여기서 매개가 절대자나 타인, 아니면 그들의 인정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셨을 겁니다. 하긴 일상적인 경험을 되돌아보면 헤겔의 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혹은 학교에서 상장을 받거나 혹은 회사에서 표상을 받았을 때, 우리는 자신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흡족함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인간은 무엇인가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요. 인정을 받을 때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헤겔이나 호네트의 말이 옳다면, 불행히도 인정이 철회되는 순간 우리에게는 존재 이유가 사라지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못생겼다고 누군가 손가락질하거나 아니면 무능력하다고 누군가 비하한다면, 존재 이유가 사라진 우리는 자살해야 하는 것일까요. 결국 속뜻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들의 논리는 인정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992년 출간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호네트의 저서 제목, ‘인정투쟁(Kampf un Anerkennung)’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정을 두고 벌이는 인간의 투쟁을 당연하다는 듯이 붙여진 제목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인정을 받을 때에야 상관이 없지만, 인정을 받지 못할 때는 자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지를 함축하니까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자살과도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폭풍우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당당한 산과 같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실 타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순간,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수동적인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칭찬을 들으면 사는 맛이 나고, 비난을 들으면 죽을 것만 같을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사유를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사유로부터 구별하도록 만드는 대목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기독교, 혹은 헤겔과 호네트와는 달리 불교는 “인간은 매개 없이도 당당한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쳤던 싯다르타나 매일 아침마다 스스로를 “주인공(主人公)”이라고 불렀던 서암(瑞巖) 스님이 이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3. 성인도 망념을 가지면 광인이 돼

 

이제 ‘무문관(無門關)’의 11번째 관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이 관문에는 조주(趙州, 778~897) 스님이 우리에게 당혹감을 던지며 깨달음으로 이끌려고 하고 있습니다. 11번째 관문에는 조주 이외에 무명의 스님 두 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조주가 첫 번째 스님의 암자를 찾았을 때, 그 스님은 주먹을 들어 조주에게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먹을 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먹감자’입니다. 타인을 비하할 때 동서양 구별 없이 쓰는 일종의 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름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던 조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암자에서 수행하고 있던 무명 스님이 주먹감자를 날렸으니, 어떻게 기분이 좋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조주도 그 스님을 바로 비하했던 겁니다.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 한 마디로 말해 자신처럼 큰 사람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타인이 가하는 모욕에도 당당한 조주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조주의 당당함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아쉬운 점이 흰 눈발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선연하기만 합니다. 조주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을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 통쾌한 복수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의 내면에 나름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아차!’하는 순간, 조주는 인정의 욕망에 떨어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서경(書經)’에도 나오지 않던가요. “성인도 망념을 가지면 광인이 되고, 광인도 망념을 이기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고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조주는 깨달은 사람답게 금방 실수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두 번째 무명 스님을 만날 때 분명히 드러납니다.


두 번째 스님도 조주에게 첫 번째 스님과 미리 짠 것처럼 ‘주먹감자’를 날립니다. 이미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조주입니다. 두 번째 스님의 모욕에 맞서 조주는 상대방보다 크다는 허영을 부리기보다 상대방이 정말로 자신보다 크다고 긍정해버리고 맙니다.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나!” 한 마디로 말해 상대방 스님이 자유자재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주는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타인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는 주인공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타인에게 모욕당했을 때의 불쾌감이 없다면, 이것은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집니다.

 

▲강신주
조주가 두 번째 스님에게 절을 했을 때, 그 스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니 어떻게 해야만 했을까요. 이제 패는 두 번째 스님에게 던져진 것입니다. 자신을 인정해주었다고 기뻐하는 순간, 두 번째 스님도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마 다시 ‘주먹감자’를 이전보다 더 험상궂은 얼굴로 날리거나 아니면 자신을 시험하려는 조주의 뺨을 후려갈겼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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