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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은 왜 친척들을 사찰노비로 삼았나

  • 교학
  • 입력 2013.06.14 14:14
  • 댓글 0

이자랑 동국대 박사 고찰
삼보에 대한 깊은 신앙 표현
아쇼카·양무제 등 영향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며 나라의 기틀을 세웠던 신라 법흥왕(? ~ 540).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왜 자신의 친척들을 사찰의 노비로 삼았을까?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는 동국대 인문한국연구단이 6월7일 동국대 충무로영상센터에서 개최한 제2회 HK아젠다 연구성과 발표회에서 ‘신라 사원노비의 발생과 사신(捨身)’ 문제를 다뤘다.


이 교수는 ‘삼국유사’ 권3에 나오는 ‘법흥왕이 궁중의 친척들을 내놓아 사찰 노비로 삼았다’ ‘태종왕 때 재상 김양도가 불법을 믿었는데 그의 두 딸인 화보와 연보를 사신(捨身)하여 사찰노비로 삼았다’는 기록에 주목했다. 이를 계기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던 불교의 본래 입장에서 어떻게 ‘사찰노비’가 불교 역사 속에서 수용됐으며, 신라에서는 어떻게 변용됐는가를 폭넓게 고찰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초기 불교교단에는 비구의 인력을 돕던 정인(淨人) 등은 있었지만 평등이라는 불교이념과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계율적 입장에 따라 노비는 없었다. 그러나 교단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사원노비의 수용이라는 현상이 인도와 스리랑카에 등장하게 됐다. 노동력이 필요한 교단에 노비를 보시하는 것이 큰 공덕을 수반하는 행위로 점차 간주됐고 동시에 노비를 해방시키는 것도 큰 공덕으로 여겨지게 됐다. 인력확보라는 사찰의 현실적 필요성과 평등이라는 불교교리와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독특한 제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맹아는 ‘아육왕경’을 통해 확인되며 스리랑카에서는 더욱 명확해졌다. 아쇼카왕의 절친한 친구였던 스리랑카의 왕 데와남삐야띳싸가 왕의 지위를 바치고 스스로 보리수의 지킴이가 되겠다고 선언한 이후 자신이나 가족을 교단의 노비로 바친 뒤 돈을 주고 다시 사들이는 형태의 사신(捨身)이 보편화됐다는 것. 스리랑카의 이러한 문화가 중국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북위시대 양무제는 스스로를 사찰의 노비로 바친 뒤 신하들이 거대한 액수의 속전을 바치며 황제를 다시 사오는 방식의 사신행위를 3~4회나 행했던 것이다.


이 교수는 법흥왕이 친척들을, 신심 깊은 김양도가 두 딸을 사찰노비로 바친 것도 스리랑카와 중국의 사신 관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법흥왕이 사찰에 바쳐진 이들을 금전 등 지불을 통해 다시 원상태로 복귀시키지 않았던 점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법흥왕이 아쇼카왕이나 양무제를 뛰어넘어 출가로서 이상적인 삶을 마무리했던 전륜성왕을 롤모델로 삼아 자신도 직접 출가를 단행했던 점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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