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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한산성 장경사

기자명 법보신문

굽이진 산성따라 굴곡진 역사 말끔히 씻어낸 가슴 넓은 도량

조선 인조 때 축성에 동원됐던
충청 출신 승군 주둔지로 창건
대웅전보다 요사가 컸던 이유
산성 내 사찰은 사실상 수용소
병자호란 후 승번제 생겨 면천

 

1975년 원인 모를 화마로 소실
옛 사진 토대로 복원해 놓으니
국유지라며 거액 변상금 부과
천신만고 끝 소유권 되찾아와

 

의승군 추모 무차회 봉행으로
400여 년 아픈 역사 씻어내고
평화 깃든 품 넓은 도량 발원

 

 

▲1975년 발생한 원인모를 화마로 소실되었던 장경사는 1958년 찍은 전경 사진을 토대로 복원됐다. 아픈 역사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정갈하고 예쁜 도량이다.

 

 

남한산성(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가는 길은 젖어 있었다. 일찍 장맛비가 왔다. 산성의 출구였던 동문(東門)이 현대인들에게 길을 내주고 길 밖에 앉아있다. 동문 근처에 장경사(주지 경우 스님)가 있다. 장경사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가면 길이 갑자기 가파르다. 키 큰 나무들은 비를 품고 대신 녹음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망월사와 장경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곧게 오르면 망월사요, 굽어지면 장경사였다. 굽은 언덕길을 오르고 다시 내리막길에 접어들면 근육질의 일주문이 나타났다. 비오는 날의 일주문은 근엄하다. 조심조심 내려가니 장경사가 나타났다. 경내에 안개가 은은했다.


남한산성이 있기에 장경사가 있었다.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에 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벽암 대사가 이회 장군과 함께 승군을 동원해서 2년 만에 축성했다. 이때 승군들이 머물도록 지은 절 가운데 하나가 장경사이다. 모두 9개의 승영 사찰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있었던 개원사에는 팔도도총섭에 임명된 벽암 스님이 머물며 축성을 지휘했다. 지휘본부였던 셈이다. 성안의 새로 지은 사찰은 그래서 변변한 창건설화를 지닐 수 없었다. 지세를 살펴 명당에 지을 수도 없었다. 오로지 인간이 아닌 성을 위해, 성과 가까운 곳에 지었다.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다시 4개의 절(개원, 국청, 망월, 장경사)이 세워졌는데 그중에서 장경사만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목탁 대신 삽과 칼을 들어야 했던 승군들, 이들을 위해 절은 대웅전보다 요사채가 커야했다. 팔도에서 뽑혀온 승려들은 모두 젊었을 것이다. 비록 천민이었지만 불교의 내일을 짊어진 재목이었을 것이다. 본부격인 개원사를 제외한 8개의 절에는 8도 출신의 승군들을 도별로 나누어 수용했다고 한다. 장경사는 충청도 출신 승려들이 머물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수덕사, 법주사, 동학사, 관촉사, 마곡사…. 이런 절들에서 징집당해 왔을 것이다. 절집에서는 이런저런 논의 끝에 승군을 내놓았을 것이다. 떠나보내는 절집 식구들은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넙죽 절하는 승군을 큰스님은 똑바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떠나가는 승군은 자못 씩씩하게 일주문을 나섰지만 산모퉁이를 돌아 혼자였을 때는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장경사 요사채. 옛 사진대로 복원한 요사채는 대웅전 보다 크다. 승군 주둔 역사의 결과다.

 


조선시대 국책사업에는 걸핏하면 승려들을 동원했다. 불(佛) 위에 유(儒)가 있었다. 충효를 섬겼던 유생들은 불자들을 짓밟았다. 지으라면 짓고, 부수라면 부숴야했다. 산성 내 사찰은 사실상 집단 수용소였다. 배는 고프고 일은 위험했다. 죽거나 다치는 승려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공기를 맞추라는 엄명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산성 서북쪽은 벽암대사가, 동남쪽은 이회가 지휘했다. 벽암대사는 기한 내 완공했지만 이회는 그러지 못했다. 거기에 공사비용을 착복했다는 누명까지 쓰고 이회는 서장대에서 참수 당했다. 남한산성 축성이 얼마나 치열하고 엄중했는지 알 수 있다. 산성에 시신을 화장하는 연기가 그치지 않을 정도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동료 승군이 죽어나가도 천도재마저 지내주지 못했을 것이다. 말이 승군이었지 그들은 성 안의 노예였다. 팔도에서 모여든 스님들의 땀과 눈물로 남한산성은 축성됐다.


남한산성은 슬픈 성이다. 병자호란의 눈물은 아직도 역사 속에서 마르지 않고 있다. 남한산성을 새로 쌓은 후 10년 만에 왕이 성에 들었다. 청나라가 침략하자 궁궐을 빠져나왔다. 종묘사직이 남한산성에 있었다. 청나라 병사 12만이 성을 에워쌌다. 성 안의 병사는 1만3000이었다. 성 안에 갇힌 왕과 신하와 백성들은 참담했다. ‘중정남한지’는 이렇게 전한다.

 

‘1636년 12월24일 새벽 망궐례가 있었다. 왕이 도성을 향해 망배(望拜)했다. 눈비가 내려 성첩 지키는 군졸들이 흠뻑 젖었다. 왕이 말했다.


“군민이 다 죽겠구나.”


왕이 세자와 함께 행궁 뜰에 엎드렸다. 분향 4배하고 거적 위에서 빌었다.


“외로운 성에서 믿는 것은 오직 하늘뿐입니다. 한데 이렇듯 눈비가 내리니 모두 얼어 죽을 것 같소이다. 제 한 몸은 아깝지 않지만 백관만성(百官萬姓)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부디 잠시라도 개여 군민들을 살려주소서.”


왕이 엎드려 한동안 울었다. 대신들도 목 놓아 울었다. 왕이 고개를 드니 턱에까지 흐른 눈물이 얼어 있었다.’


‘청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왔다. 이날 바람이 사나웠다. 광진(광나루)과 삼전도, 헌릉 세 길은 온통 적병으로 들어찼다. 큰 눈이 내렸건만 들판에는 흰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장졸들이 산 위에서 이를 바라보며 싸울 뜻을 잃었다. 행궁 남쪽 나무 위에 까치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사람들이 길조라 이르니, 성 중에 믿는 것이라고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오죽하면 까치 한 마리를 믿었겠는가. 정사에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승군들은 열심히 싸웠을 것이다. 군량미를 조달해오고, 성곽을 보수하고, 무기를 날랐을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승려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45일을 버티고 왕이 서문을 나섰다.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며 왕이 울었다. 곤룡포 대신 융복(戎服)을 입었다. 한강 동쪽 기슭에 9층 높이의 수항단(受降檀)이 세워졌다. 조선 왕은 신하의 예를 올렸다. 조선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굴욕이었다.

 

 

▲산자락을 따라 굽이도는 남한산성이 예쁘다. 하지만 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이 분명하다.

 


남한산성을 성곽 따라 걸어본 사람은 안다. 성곽과 성 안 풍경은 전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정갈하고 예쁘다. 물론 세월에 마모된 탓도 있지만 남한산성은 원천적으로 종묘사직을 지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성 안에 있을 것은 모두 있지만 성 자체가 작다. 8km 남짓한 성곽은 그 안의 행궁만큼이나 왜소하다.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는 항변이 오히려 더 슬프다. 그 옛날 삼국시대에는 그 안에 임금이 능히 몸을 피했겠지만, 조선시대 병자년의 호란을 막아내기에는 너무도 작았다.


인조는 남한산성을 잊지 못했다. 그 안에서 지낸 45일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비록 항복의 쓰라림은 있었지만, 그 겨울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챙겼다. 누가 제안을 했는지는 몰라도 승군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시했다. 산성 내에 번승(番僧)을 두도록 해서 면천(免賤)의 은전을 내렸다. 성 안의 사찰들은 나름 절집 면모를 갖췄다.

 

절마다 호국의 기개가 스며들었고, 무용담도 쌓였다. 그러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이 사라졌다. 250년 동안 이어오던 남한산성의 승번제(관군과 함께 산성에서 근무했던 승군)도 폐지되었다. 다시 불길한 기운이 산성을 휘감았다.


1907년 8월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 속에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대한제국군 장교들은 총과 칼을 빼앗겼다. 장병들의 견장이 뜯겨나갔다. 병사들은 목 놓아 울었다. 이에 황실 경호를 맡고 있던 최정예부대가 서울 한복판에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마지막 병사들은 정오를 넘기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바로 그날, 남한산성에도 왜병들이 들이닥쳤다. 곧장 사찰로 난입한 왜병들은 무기고와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

 

사찰들이 불에 탔다. 겨우 장경사만이 남았다. 왜 장경사만 남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무기고나 화약고가 장경사 내에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은 장경사가 1975년 다시 불에 탔다. 역시 화인은 알 수 없다. 그런데 다행히 1958년에 찍은 장경사 전경 사진이 있었다. 이를 토대로 대웅전과 요사채를 복원했다.


지난 2011년 2월 경우 스님이 주지로 부임했다. 겨울이라 주변 풍경이 다소 황량했다. 그런데 봄이 오자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나무와 꽃이 웃고 새들이 날아들었다. 모든 것이 기특했다. 그런데 부임 첫해 한국자산관리공사가 1억4000만원이 넘는 국유재산 변상금을 부과했다. 장경사의 대웅전을 비롯한 헌등대, 9층 석탑과 경내 대부분이 국유지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기가 막혔다. 스님들이 쌓은 성 안에서, 승군이 주둔하던 전통사찰에서 변상금을 낼 수는 없었다. 스님은 소유권 이전 소송을 서둘렀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장경사는 1965년부터 사찰 건축물을 건립해 종교행위를 이어온 만큼 20년이 지난 1985년 4월 취득시효가 완성됐다”며 “국가는 해당토지에 대해 소유권이전등기절차를 이행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2심에 이어 대법에서도 장경사의 손을 들어줬다.

 

 

▲2011년 주지로 부임한 경우 스님은 국가소유로 남아있던 장경사의 소유권을 되찾아왔다.

 

 

‘소유권이전등기청구’ 소송은 지난 4월 마무리됐다. 부처님 가피였다.


또 스님은 남한산성 축성의 주체였던 의승군과 승영사찰 등 산성 내 불교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문화제를 열었다. 문화제의 핵심행사는 ‘의승군 추모 수륙무차대법회’였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조계종 종회의장 보선 스님을 비롯해 사부대중 500여명이 동참했다. 하늘과 땅,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 사성과 육범의 모든 존재가 서로 차별 없이 평등하게 법식을 나누는 자리였다. 경우 스님은 올해도 수륙무차대법회를 열 예정이다. 그렇게 해서 남한산성에 스며있는 아픈 사연들을 씻어내고, 평화를 불러들이고 싶다.


장경사 대웅전의 부처님은 오늘도 산성을 바라보고 있다. 산성 아래는 절벽이고 또 그 아래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성을 쌓아야 안심했던 사람들, 성 때문에 죽고 죽여야 했던 사람들은 모두 성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다시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장경사는 그들을 위해 여전히 법당보다 요사채가 크고 넓다. 장경사 경내에 서 있으면 더 없이 편하다. 그리고 요사채에서 한 숨 자고 싶어진다.


정갈하고 예뻐서 더 슬픈 남한산성, 그 속에 장경사가 있다. 

 

본지 고문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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