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덕산탁발(德山托鉢)
32. 덕산탁발(德山托鉢)
  • 법보신문
  • 승인 2013.09.0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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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이후에 이타까지 나아가야 참다운 깨달음이다

방편은 눈높이 가르침
깨달음 이룬 사람에겐
중생을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무 남아있어

 

어느 날 덕산(德山) 화상이 발우를 들고 방장실을 내려갔다. 이때 설봉(雪峰) 스님이 “노스님!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나요?”라고 묻자, 덕산 화상은 바로 방장실로 되돌아갔다. 설봉 스님은 암두(巖頭) 스님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암두 스님은 말했다. “위대한 덕산 스님이 아직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末後句]’을 알지 못하는구나!” 덕산 화상은 이 이야기를 듣고 시자(侍者)를 시켜 암두 스님을 불러오라고 했다. 덕산 화상은 암두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암두 스님은 아무도 안 들리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자, 덕산 스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덕산 화상이 법좌(法座)에 올랐는데, 정말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암두 스님은 승당 앞에 이르러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이제 노스님이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무문관(無門關) 13칙 / 덕산탁발(德山托鉢)

 

 

▲ 그림=김승연 화백

 


1. 불교자비는 방편으로 드러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불교는 자비(慈悲, maitri-karuṇa)를 슬로건으로 합니다. 보통 자비는 불쌍한 사람에게 베푸는 연민이나 동정의 뜻으로 쓰이지만, 산스크리트어를 살펴보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됩니다. 우정을 뜻하는 마이트리(maitri)라는 말과 연민을 뜻하는 카루나(karuṇa)로 구성된 합성어가 바로 자비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이트리, 즉 우정 혹은 동료애라는 의미 아닐까요. 자비라는 말에는 근본적으로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라는 수직성보다는 동등한 두 사람이라는 수평성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비록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그도 우리와 동등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지금 누군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어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이번에는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행할 때 우리는 어떤 우월감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비에서 중요한 것은 마이트리의 정신이기 때문이지요.


불교에서 자비의 정신이 어디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까요. 아마 방편(方便, Upāya)이란 개념에서 일 겁니다. 불행히도 방편이란 개념은 지금에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급한 불을 끄는 식으로 일을 할 때 우리는 임시방편이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렇지만 불교에서 방편은 전혀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 그들을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바로 방편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방편은 획일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눈높이 가르침인 셈이지요.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면, 남자를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과 여자를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교수와 초등학생은 다릅니다. 당연히 두 사람에게는 적용되는 가르침의 방법은 달라야만 합니다.


방편은 눈높이의 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겁니다. 타자를 제대로 읽으려는 감수성도 없으면서, 어떻게 타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최소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을 겁니다. 하나는 깨달음의 경지에 스스로 이르러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타자, 즉 제자의 수준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원효가 말한 것처럼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현하고 있는 사람, 즉 부처라고 할 수 있지요.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이로움을 실천했기에 ‘자리’이고, 자신이 이른 깨달음에 타인도 이르게끔 돕는다는 점에서 ‘이타’인 셈이지요. 그래서 방편에 정통한 사람은 정상에 오르려는 사람들을 능숙하게 돕는 노련한 산악 가이드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 같네요.


2. 불교는 내적 위계만을 인정한다

 

능숙한 산악 가이드는 이미 정상에 올랐던 적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하고, 동시에 자신이 정상으로 이끌려고 하는 사람의 정신과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일 가이드하고 있는 사람이 의지가 빈약하다면, 그는 거짓말조차 기꺼이 할 수도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정상에 이르려면 2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그는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능숙한 가이드는 말합니다. “30분 정도만 더 오르면 정상입니다.” 이게 바로 방편입니다. 그나저나 ‘무문관(無門關)’의 열세 번째 관문은 야단법석입니다. 덕산(德山, 780~865) 스님이 식사 때도 아닌데 발우를 들고 공양간에 가려고 하지를 않나, 그것을 본 제자 설봉(雪峰, 822~908) 스님은 스승을 타박하지를 않나, 또 다른 제자 암두(巖頭, 828~887) 스님은 스승 덕산 스님의 경지를 평가하지를 않나, 정말 아래 위가 붕괴되어 버린 형국이 열세 번째 관문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스승과 제자라는 위계 구조를 강조하는 다른 사유전통에서는 혀를 끌끌 찰 수도 있는 풍경일 겁니다. 이렇게 스승을 무시하는 제자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외적인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내적인 권위만을 강조하는 불교 전통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일 겁니다. 임제의 말대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야” 스스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불교에서나 가능한 일이지요. 덕산은 분명 스스로 주인공으로 서는 데 성공한 스님입니다. 주인공의 삶은 다른 일체의 것들을 조연으로 보는 삶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종소리와 북소리가 울려야 밥을 먹겠습니까. 배가 고프면 먹고 배가 부르면 쉴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배가 고파서 덕산은 발우를 들고 공양간으로 향했던 겁니다. 꺼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방장실을 차지하고 있는 큰 스님이라는 허울 정도는 가볍게 훌훌 벗어던진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도 북도 울리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시나요?”라는 제자 설봉 스님의 이야기에 덕산이 방장실로 돌아간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공양간에 아직 식사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스승의 경지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봉 스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이 마치 노망이 든 노인네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설봉 스님이 자신의 고민을 자신의 사제 암두 스님에게 토로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사형의 고민을 듣자마자 암두 스님은 탄식합니다. “위대한 덕산 스님이 아직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末後句]’을 알지 못하는구나!” 설봉과 암두, 두 제자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들은 덕산은 암두를 방장실로 불러들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자유로운 경지를 몰라주는 제자들에게 무척이나 속이 상했나 봅니다.


3. 선가에서 말후구는 이타행

 

암두 스님이 들어오자 덕산은 서운한 낯빛으로 물어봅니다. “그대는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바로 암두 스님은 스승의 귀에 무엇인가를 비밀스럽게 속삭입니다. 아마도 설봉 스님에게 이야기했던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 즉 말후구(末後句)였을 겁니다. 덕산 스님은 제자 암두 스님에게서 제대로 한 방 먹은 겁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했던가요. 이처럼 때로는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기도 하는 법입니다. 어쨌든 놀랍게도 그 다음 날 덕산 스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던 자연스러움 대신에 은산철벽(銀山鐵壁)처럼 제자들을 압도하는 위엄이 법당을 서늘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이 모습을 본 암두 스님은 박장대소할 정도로 기뻐했습니다. “이제 노스님이 궁극적인 한 마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기뻐할 일이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어쩌지 못하리라.”


암두라는 제자가 스승 덕산의 귀에 속삭였던 ‘말후구’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영위하는 데 성공했던 덕산에게 부족했던 한 가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할 수만 있다면, 이미 우리는 왁자지껄한 열세 번째 관문도 통과했을 겁니다. 말후구, 그것은 바로 ‘이타(利他)’의 길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덕산 스님은 마침내 자리(自利)에 성공했지만, 이타(利他)의 경지에는 나가지 못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 덕산 스님은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자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야하는 스승의 길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던 겁니다. 스스로 깨달음에 이른 것에 순간적으로 취했던 탓일까요. 바로 이 점을 암두 스님은 지적했던 겁니다. “스님! 혼자서 자유를 만끽하시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사찰 안의 제자들은 어찌 하시려고 그러시나요.”


‘말후(末後)’라는 표현에서 말(末)은 ‘끝’이나 ‘정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산으로 따지면 정상에 오른 겁니다. 그렇지만 자신만 정상에 올라서야 되겠습니까. 삶의 정상에 오르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제자들과 중생들을 정상에 오르도록 도와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그에게 남겨진 겁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정상[末]에 오른 다음[後], 그는 타인을 정상에 이끄는 자비를 실천해야만 합니다. ‘말후구’, 그것은 바로 방편입니다. 제자들이 깨우침에 이를 때까지 덕산 스님은 법당에서 위엄을 갖춘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반드시 넘어야만 스스로 주인이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은산철벽이 되어야만 합니다.
 

▲강신주

 “나를 넘으면 너희들도 나처럼 자유로워지리라!” 물론 방장실을 몰래 들여다보면, 여전히 덕산 스님은 졸리면 자고 속이 더부룩하면 시원하게 방귀를 뀌고 있을 겁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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