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각어언(離却語言)
33. 이각어언(離却語言)
  • 법보신문
  • 승인 2013.09.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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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립문자는 남을 흉내 내지 않은 본래면목의 말

시는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
깨달은 사람의 말은 시가 돼


물은 그 자체로 형태 없지만
그릇 따라 여러 모습 드러내


말과 침묵 문자 메이지 말고
자기 말을 하는 것이 깨달음

 

어느 스님이 물었다. “말과 침묵은 각각 ‘이(離)’와 ‘미(微)’를 침해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와 미에 통하여 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풍혈(風穴) 화상이 말했다. “오랫동안 강남 춘삼월의 일을 추억하였네. 자고새가 우는 그곳에 수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 향기로웠네.”

 무문관(無門關) 24칙 / 이각어언(離却語言)

 

 

▲그림=김승연 화백

 


1. 깨달은 사람의 말은 시가 된다

 

오도송(悟道頌)을 아시나요. 깨달음에 이른 순간, 위대한 선사들이 남기는 시(詩)를 말합니다. 논리적인 분이라면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종이 깨달음의 순간을 언어로 포착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경전만이 아니라 시도 분명 문자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오도송도 결국은 불립문자가 아니라 ‘입문자(立文字)’, 즉 문자를 세운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반론은 오도송과 같은 ‘시’가 가진 특이성을 간과했기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시는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모두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요. 김수영의 시는 한용운의 시와 다르고, 한용운의 시는 기형도의 시와 다른 겁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깨달음과 시는 묘하게 공명하게 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곧 부처가 되었다는 것, 결국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영위하게 되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에 이른 순간,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른 순간, 선사들이 남긴 말은 글자 그대로 바로 ‘시’가 될 수밖에 없지요.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은 바로 ‘시’이니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깨달음에 이르렀으니 멋지게 오도송을 남겨야 한다고 해서 오도송이란 시가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진정한 자기가 되었으니까,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주인공으로 느끼고 표현할 수 있으니까, 깨달음에 이른 사람의 말은 그리고 문자는 바로 ‘시’가 된다고 해야 합니다. 그럼 여기서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오도송을 한 번 읽어볼까요.

 

남아 대장부는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어야 하는데(男兒到處是故鄕),
아직도 몇 사람은 오래도록 손님의 시름 속에 머물러 있네(幾人長在客愁中).
단말마의 할(喝) 소리가 울려 퍼지며 온 세상을 열어젖히니(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날아다니는구나(雪裏桃花片片飛).

 

1917년 12월 3일 밤 10시 설악산 오세암에서 한용운에게 일어났던 깨달음입니다. 한용운의 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오세암에서 참선에 몰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첫 행과 두 번째 행에는 참선하고 있을 때의 한용운의 내면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 행을 통해 우리는 한용운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진실되다”, 그러니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표방했던 임제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두 번째 행에서 드러납니다. 임제처럼 주인이 되려고 했지만 당시 한용운 아직도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손님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심지어 아직도 몇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향수까지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한용운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겁니다.

 

2. 말을 해도 문제 침묵해도 문제

 

주인이 되려고 참선에 들기는 했지만, 한용운은 주인은커녕 오히려 상념에 빠지면서 몇몇 그리운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고적한 설악산 한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던 오세암에는 예상치 못한 단말마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바람이 불어서인지 무엇인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건 동산 스님의 몽둥이찜질이나 임제 스님의 사자후와 같은 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모든 상념을 끊고 오세암의 주인, 즉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한용운은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에 이른 겁니다. 깨달음의 순간과 그 풍경을 노래하는 세 번째 연과 네 번째 연을 보세요. 물론 12월이니 복숭아꽃이 필 리 만무합니다. 복숭아꽃은 춘삼월에 피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한용운이 보고 있던 휘날리는 복숭아꽃은 달빛을 머금고 있는 눈송이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춘삼월을 물들이는 복숭아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상념을 자아냈던 몇몇 사람들이 그의 뇌리에서 완전히 떠나고 있는 내면 풍경일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회로가 길기도 했습니다. 그건 이번에 우리가 통과해야만 하는 ‘무문관(無門關)’의 스물네 번째 관문이 그렇게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난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이제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이 스물네 번째 관문은 타인의 문자에 빠져 있던 제자가 풍혈(風穴, 896~973) 화상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됩니다. “말과 침묵은 각각 ‘이(離)’와 ‘미(微)’를 침해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와 미에 통하여 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과 침묵은 각각 이와 미를 침해한다(語默涉離微)’라는 명제는 제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승조(僧肇, 384~414)의 이야기입니다. ‘보장론(寶藏論)’에서 승조는 부처의 마음을 이(離)와 미(微)라는 두 개념으로 설명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개념은 깨달음에 이른 마음을 규정하는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승조는 이(離)를 무상(無相)으로, 미(微)를 ‘상즉무상(相卽無相)’이라고 정의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고개가 갸우뚱거리실 겁니다.


물을 비유로 들면 승조의 생각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그릇에도 담기지 않는 물은 어떤 모양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無相, animit ta)’입니다. 원래 상(相, nimitta)이란 말은 모양이나 형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무상이란 특정한 모양이나 형태가 없다는 의미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부처의 자유로운 마음은 규정하는 개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승조는 부처의 마음을 ‘이(離)’라고 규정했던 겁니다. ‘이(離)’는 ‘떠났다’, 혹은 ‘벗어났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모양이 없는 물도 특정 그릇에 담기면 그릇 모양에 따라 모양이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경우라고 해도 특정 그릇에 담긴 물의 모양이나 형태는 물 자체의 모양이나 형태는 아니지요. 원래 물에는 모양이나 형태가 없으니까요. 승조가 ‘상즉무상(相卽無相)’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릇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물에는 모양이 없다는 겁니다. 승조가 ‘미(微)’라고 이 상태를 규정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미(微)’은 ‘숨겨 있다’, 혹은 ‘은미하다’는 뜻이니까요.


3. 꽃을 만나면 그저 꽃에 담길 뿐

 

물은 그 자체로는 모든 형태에서 ‘벗어나[離]’ 있지만, 특정 그릇을 만나면 그 자유스러운 성질을 ‘숨길[微]’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스스로 자유롭지만 중생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 맞는 눈높이 교육을 실천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제 풍혈 화상의 제자가 던진 질문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공감이 가시나요. “말과 침묵은 각각 ‘이(離)’와 ‘미(微)’를 침해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와 미에 통하여 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타자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물이 특정 그릇에 담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은 무상(無相)으로 정의되는 ‘이(離)’의 마음 상태를 침해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침묵한다는 것은 물이 특정 그릇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침묵은 타인에게 맞는 눈높이 가르침, 즉 ‘미(微)’의 마음 상태를 침해한다는 겁니다. 이제 제자의 속앓이가 분명해지셨나요. 말을 해도 문제고 침묵해도 문제라면, 타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승조의 이론을 지적으로 이해하려다 제자는 난관에 봉착한 겁니다.


바로 이 순간 풍혈 화상은 뜬금없이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읊조립니다. “오랫동안 강남 춘삼월의 일을 추억하였네. 자고새가 우는 그곳에 수많은 꽃들이 활짝 피어 향기로웠네.” 풍혈 화상은 지금 남의 문자에 집착하는 주석가나 이론가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면목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을 갖추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시인은 꽃을 보면 꽃에 마음을 가득 담고, 노을을 보면 노을에 마음을 가득 담습니다. 꽃이나 노을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승조가 말한 것처럼 ‘상즉무상(相卽無相)’의 마음이지요. 비록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시인의 마음은 자유롭기만 합니다. 꽃을 만나니 꽃에 담기고 노을을 만나니 노을에 담길 뿐입니다. 세모 그릇에 담기면 세모가 되고 네모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는 자유로운 물처럼 말입니다. 이제 풍혈 화상이 두보의 시를 뜬금없이 제자에게 던진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지금 풍혈 화상은 우리에게 침묵이니 말이니 하면서 문자의 손님이 되지 말고, 자신의 본래면목을 토로하는 문자의 주인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인과 부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사합니다. 자신이니까 쓸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시인이라면, 자신의 본래면목으로 말을 하는 것이 부처니까요.


물론 모든 시인이 부처는 아니지만, 부처는 반드시 시인이라는 단서는 하나 달아야 할 것 같네요. 어쨌든 이제 ‘불립문자’라는 선불교의 슬로건도 단순히 언어와 문자를 부정했다는 식으로 오해하지는 마세요. ‘불립문자’라는 말에 들어있는 문자란 타인의 문자를 상징하는 겁니다. 스승의 말을 읊조리면 스승이 될 수 없고, 부모의 말을 답습하면 아이 수준을 벗어날 수 없고, 부처를 흉내 내면 부처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불립문자’는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읊조리지 말라는 명령이었던 셈입니다.

 

▲강신주

이것은 물론 자신의 말을, 자신의 본래면목에서 느끼고 판단한 말을 제대로 터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멋진 일 아닌가요. 깨달음에 이른 순간, 우리는 오도송을 던지는 시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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