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7번 방의 선물’-3가지 법(法)에 대한 영화

기자명 정장진

진흙 같은 현실 속에서 피는 연꽃이 아름답다

2013년 한 해 동안 2억명의 관람객들이 영화관을 찾았다고 한다. 사회학자라면 한국 사회의 변동을 살피는데 귀중한 자료로서 연구해 볼만 한 수치다. 영화 ‘7번 방의 선물’은 1300만명 이상이 관람을 했으니 2013년의 영화들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 속에는 무언가가 있다. 2012년의 화제작이었던 ‘광해’나 지금 상영 중인 개봉 즉시 300만명 이상이 찾은 ‘변호인’에는 사뭇 진지한 정치적 함의들이 숨어있듯이.

‘7번 방의 선물’에는 어떤 민심이 들어있을까? 이 물음에 답을 하려면, 영화가 불교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불교적 관점에서 봐야만 한다. 왜냐하면 ‘7번 방’은 넓은 의미의 법(法)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우선 6살 아이의 지능을 갖고 있는 주인공 바보 아빠는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법 적용을 받아 사형을 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법의 부당한 적용 이외에 전혀 다른 법의 존재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법을 석가세존이 말한 법, 즉 불법(佛法)으로 보고 싶다. 가령, 바보지만 자신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딸을 위해 누명을 쓰고 목숨을 바치는 부정(父情) 같은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법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세상의 거의 모든 아빠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하지만 영화에서 아비의 희생을 통해 표현된 부처님의 법은 ‘모든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살신하여라’라는 식의 직설적인 교설을 통하지 않고 부처님이 말씀하실 때처럼 비유적으로 그 뜻을 헤아리도록 묘사된다. 여기에 영화 ‘7번 방’의 매력이 숨어있으며, 1300만이 영화관으로 몰려간 까닭도 바로 이 은은한 설법을 연상시키는 영화 미학에 있다. 이 영화 미학이 영화의 법인 것이다.

때론 법보다 주먹이 앞서고, 또 윤리적으로 봐도 법은 최하의 것이긴 해도 법은 준수되어야 한다. 반면 불교에서 말하는 법은 “그 자체의 성품을 간직하여 변하지 않고 궤범(軌範)이 되어서 사람이 사물에 대하여 일정한 이해를 낳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 법은 그 자체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항상 규범이 되어 사물에 대한 이해를 발생시켜 주는 궁극의 이치로서, 임지자성(任持自性) 궤성물해(軌生物解)이다.

그러니까, 바보 아빠 용구가 어린 딸 예승을 위해 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은 불교식으로 보면 “그 자체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항상 규범이 되어 사물에 대한 이해를 발생시켜 주는” 법이 구현된 것이며 따라서 1300만의 관객들은 부지불식간에 수보리가 되어 “사물에 대한 이해”를 얻어 가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영화를 보면서, 때론 눈물도 흘려가면서 관객들은 잠시 동안이나마 득도를 한 셈인데, 성질 사납기로 유명했던 수보리가 설법을 듣고 해공제일(解空第一)의 선사가 된 것과 유사하다 할 것이다. 이 불법은 그러나 6살 지능의 바보 아빠를 통해 구현됨으로써 불법임을 드러낸다.

감옥 벗어나지 못한 채
철조망에 걸려야만했던
‘노란 풍선’이 곧 화두

‘7번 방’의 진정한 선물
더러운 현실 맞서는 용기

▲ 희망을 상징한 노란가방. 화인웍스 제공

세일러문 가방,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갖고 싶어하는 가방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가방의 색깔이다. 가방의 노란 색은 풍선의 노란색이 되고, 글자를 못 읽는 감방장이 예승에게 더듬더듬 읽어주던 동화책의 제목도 ‘노랑 나비의 모험’이다. 노란 색은 병아리의 색이며 유치원의 색이다.

하지만 색이 다가 아니다. 풍선은 기구(氣球)가 되어 부녀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가 감옥소 벽을 넘는다. 그런데 이 기구를 타고 감옥소를 넘는 장면은 이미 감방 벽에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 연결되며 변주되는 에피소드나 장면들을 유심히 봐야 한다. 왜냐하면 해석해야 할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는 부처님의 법은 이 에피소드와 장면들이 연결되는 그물 같은 망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화두는 영화의 줄거리나 관객들의 눈물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 주인공을 태운 열기구는 현실이란 교도소 담장을 넘지 못했다. 화인웍스 제공

열기구를 타고 감옥소 벽을 넘는다고?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관객들은 이상하게도 이 장면에서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고 받아들인다. 망루에 서서 한 손에 총을 들고 보초를 서던 초병도 총을 쏘기는커녕 날아오르는 기구를 보고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라며 손을 흔든다. 어찌 된 일인가?

관객들은 이미 화두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총을 쏘는 대신 손을 흔들어 보인 초병을 비롯해 모든 이들은 용구와 예승을 태운 기구가 감옥소 철조망에 걸릴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열기구보다 앞서 먼저 철조망에 걸렸던 노란 풍선을 통해 알고 있었다.

영화 ‘7번 방’에는 이렇게 해서 언제든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는 법이 있고, 나쁜 머리로 무죄를 입증하는 진술서를 읽고 또 읽으며 외웠건만 마지막 순간,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몸을 형장에 세우는 바보 아빠를 통해 구현되는 불법(佛法)이 있으며 진흙에서 피는 연꽃처럼 감옥 너머로 날아오르는 노란 풍선을 중심으로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어 주는 영화의 법이 있는 것이다. 이 3가지 법은 서로 중첩되며 관객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켰다가 득도를 하게 하기도 하고 영화 미학의 본질을 구현시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 세 가지 법은 현실에서도 영화에서처럼 함께 존재하며 중첩되어 작용한다. 풍선은 화두일 뿐, 터지거나 담을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수보리라면 이를 깨달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감옥 영화에서는 탈옥이 주제다. 그러나 ‘7번 방’은 거꾸로 감옥에 들어오는 이야기이다. 어린 딸 예승은 어떻게 빵(감옥)에 들어왔는가? 빵 상자 속에 숨어서 들어왔다. 성탄절 위문 공연 때 수감자들에게 주려고 교회에서 갖고 온 빵 상자 속에 들어간 예승은 합창단원으로 길고 하얀 옷을 입고 빵 상자 속에 들어가 아빠를 만난다.

예승은 상자 속에 든 선물이자, 한 마리 노랑나비인 것이다. 관객들은 노랑나비의 모험을 읽고 있는 것이다. 노랑나비는 빵을 변화시킨다. 감방 벽의 나체 사진도 세일러문으로 변하고, 사기꾼도 조폭도, 문서위조범도 모두 이웃집 아저씨로 변한다. 심지어 교도소장도 변하고,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며 교도소에 불을 지른 흉악범도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 경찰청장이다. 영화의 줄거리 전개에 있어 이 악한은 변하면 안 되는 인물이다. 예승이 또래의 어린 딸을 잃은 경찰청장마저 변하면, 영화는 그야말로 권선징악 신파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간 신파조 분위기가 나는 이 영화에서 경찰청장마저 착한 이웃집 아저씨로 변하면 1300만이 아니라 130만도 안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안 변하는 인물이 경찰청장이다. 영화 줄거리를 위해 변하면 안 되는 악당,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을 만들어 낸 악귀들은 영화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변하지 않는다. 이들은 변하면 안 되는 인물들인 것이다.

기구가 담을 넘지 말아야 하듯이, 악당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나 있는 법이다. 이것이 불법(佛法)이다. 영화 ‘7번 방’의 진정한 화두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영화 ‘7번 방’의 한계도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이 한계는 거의 모든 영화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그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미미한 유사성을 통해 서로 연결되며 만들어 내는 촘촘한 그물 같은 망을 통해 암시만 할 뿐이다. 영화는 예술일 뿐 종교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알았다. 영화에서 이웃집 아저씨로 변하면 영화를 망치게 하는 인물들인 악한들이 현실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러운 현실인 것이다. 현실은 더러운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이 깨달음만 갖고 영화관을 나서지는 않았다. 더러운 현실을 인정했지만 더러운 현실을 더럽다고 말하는 영화는 본 것이다. 영화는 바로 이 언어인 것이다. 해탈은 없다. 있는 것은 오직 감옥, 더러운 현실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7번 방이었지만, 다음에는 8번 방, 9번 방, 10번 방으로 선물은 계속 들어와야만 할 것이다.

▲ 감옥 벽에 그려진 열기구.

노란 풍선이 기구가 되고 벽에 그려진 기구가 진짜 기구가 되어 두 부녀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영화는 이렇게 영화 미학의 법칙을 따라가며 봐야 한다. 이미 관객들은 다들 그렇게 봤다. 하지만 한 가지 관객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용구가 예승과 함께 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다가 철조망에 걸려 멈추었을 때, 용구는 딸 예승에게 말한다. “예승아, 잊지마, 오늘을, 그리고 아빠를…….” 이 장면은 유심히 봐야 할 장면이다. 이 말을 할 때 용구는 6살 지능의 지진아가 아니라 잠시 30대 중반의 어엿한 아빠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큰 머리에 앞머리를 내려 바보 특유의 얼굴을 하고 있던 용구는 석양빛에 물든 하늘을 보며 딸에게 이 말을 건넬 때 불어오는 바람에 가르마를 넘기며 어엿한 30대 중반의 성인이 되어 달라진 목소리로 달라진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아빠가 정말로 바보였다면, 철조망에 걸린 줄을 온 힘을 다해 당겼을 것이다.

아빠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날아오른 하늘 그 너머의 세계는 자신이 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우선 영화가 망가졌을 것이고, 교도소장은 예승을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초병은 총을 쏘아 노란 풍선을 터뜨려 버렸을 것이다.

수보리도 영화를 보지 못 했을 것이다. 풍선은 철조망에 걸려야만 했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27호 / 2014년 1월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