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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호인’-옷깃만 스쳐도 인연

기자명 정장진

국밥으로 맺어진 인연이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다

▲ 송 변호사와 국밥 아지매 그리고 죄인 신분이 된 아들과 면회.

영화 ‘변호인’이 벌써 1000만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그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도 수출되어 뉴욕, LA, 토론토, 벤쿠버 등 주요 도시에서 상영 예정이라고 한다. 이 추세라면 1300만에서 턱걸이를 하던 기존 대박 영화의 상한선 기준이 1500만으로 올라갈 것이 확실하다며 언론에서는 벌써 약간 호들갑 섞인 예상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전체 관람객 통계가 어떻게 나오든, 모든 수치에 언제나 한 명을 더해야 할 것이다. 뉴스를 보니 봉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지 앞에 수북이 쌓인 국화꽃 사이로 누군가 영화 ‘변호인’ 티켓 한 장을 놓고 갔다고 한다. “당신의 이야기, 영화 ‘변호인’ 보시라”고.

서점에서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 영화 속에서 용공서적으로 낙인찍혔던 책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는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신학기를 앞둔 대학가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로 촉발된 대자보 열풍에 이어 역사책 읽기 붐이 일어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사학과들이 이번 기회를 잘 살려 ‘영화로 보는 현대사’나 ‘영화 속의 근현대사 바로 보기’ 등 교양 과목을 개설해 수강 신청 대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러고 보면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멀리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감탄스럽기만 하다. 역사 공부하라고, 그것도 중등교육 과정에서 역사를 필수 과목으로 하라고 지시를 하신 분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수능시험에 역사를 필수과목으로 넣으면 딱 끝나는 일이에요.” 어쩌면 그렇게 말도 간단하게 잘 하시고, 정확하신지……. 혹시 영화를 만들기도 전에 사전에 국가기관들을 동원해 정보를 입수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번에는 좋은 일에 썼으니 할 말은 없지만…….

불법고문 부림사건 변호한
노 전 대통령 일화 소재로
‘국밥 한그릇’ 인연의 영화

“국가권력은 국민”대사보다
절절했던 외침 “변호사님아”

영화 포스터를 보면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이 숟가락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그림을 조금 자세히 보면 송우석이 들고 있는 숟가락 끝에 작은 고기 한 점이 살짝 걸쳐져 있다. 또 조금 부풀어 오른 송우석의 양 볼을 보건대 입 안에는 한 입 가득 국밥이 들어있는 것만 같다.

영화 ‘변호인’은 국밥 영화다. 육법전서를 모두 책방에 내다 팔고 사법고시 때려 친 송우석,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듣는다. 병원비를 대신 낸 장모의 손에 떼밀려 거리로 나선 송우석은 외상으로 밥 먹던 국밥집을 찾아 소주잔 기울이며 식사를 한다. 국밥집 아지매는 지나가는 말투로 그동안 밀린 외상값 좀 갚으라고 한다.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송우석이 꺼낸 돈은 고작 500원. 송우석은 외상값은커녕 그날 먹은 밥값도 내지 못하고 그 길로 국밥집을 나와 육법전서를 판 책방으로 달려간다. 다시 고시공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7년 후, 변호사가 된 송우석은 자신이 막노동을 할 때에 지은 아파트 10층으로 이사를 하고 밥값 떼어 먹고 도망친 그 국밥집으로 온 가족이 외식을 간다.

▲ 인연은 굶주림과 국밥 한 그릇에서 시작됐다. 국밥 아지매와 송 변호사의 재회 장면. 배급사 NEW 제공

만일 부산 바닥에서 돈 꽤나 만지게 된 송우석이 국밥집을 다시 찾지 않았다면……. 아내가 출산을 하던 그날 밤 돈도 안내고 도망친 국밥 한 그릇이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되어 노무현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오다가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불가에서 나온 속담으로, 인간이 살면서 부딪치는 사소한 만남이라도 전생의 인연에서 비롯된다는 뜻인데, 그만큼 살면서 겪게 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국밥 영화인 ‘변호인’을 보면 국밥보다는 못하지만 짜장면도 여러 번 나름대로 의미를 띤 채 등장한다. 서민들 음식인 국밥과 짜장면이 영화의 속살을 지배하고 있는 셈인데, 영화 후반부에서 정보원의 눈을 속이기 위해 송변이 짜장면 배달원과 옷을 바꿔 입고 성당으로 의무장교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짜장면은 영화의 반전을 도모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양심선언을 한 이 의무 장교는 재판 도중 헌병에게 잡혀가고 만다.

영화 ‘변호인’은 1980년대 초반 등기, 세금 전문 변호사가 단골 국밥집 아들이 억울하게 용공조작사건에 휘말리자 변호를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로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다. ‘부림사건’은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으로 부산의 학림(부림)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부림사건’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당시 이 사건은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최병국 검사가 지휘했으며 김광일, 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무료 변론을 맡았던 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아마도 각 대학의 사학과에서 개설하는 ‘영화로 보는 한국 현대사’ 같은 강좌에서는 위와 같은 객관적 사실을 다룰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강좌에서 얻을 수 없는 한층 깊고 가슴 저린 감동을 전하고 있다. 특히 후반부 공판 과정에서 고문 경찰(곽도원의 연기는 송강호를 넘어설 정도다!)이 감히 “국가가 무엇인지 알아?”라고 반말로 궤변을 늘어놓을 때 이에 항변하던 송변이 헌법 1조 2항을 언급하는 장면에서는 관객들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그러나 그 무지한 일개 고문 경찰이 던진 “국가가 무엇인지 알아”라는 질문이나 그에 송변이 헌법을 인용해가며 반박하는 장면보다 더 감동을 주는 장면은 다름 아니라 국밥 아지매가 완전히 어법이 틀린 호칭으로 송변에게 애원하는 장면이다. 국밥 아지매(이영애 분)는 지갑을 꺼내 돈 자랑하던 송변을 소금을 뿌려가며 내쫓았지만, 다급한 나머지 송변에게 매달린다. “변호사님아, 변호사님아, 나 좀 살려도…….”

▲ 아들을 구해달라고 청하는 국밥 아지매.

“변호사님아”라는 말은 문법적으로는 틀린 축에 드는 표현이다. 존칭도 아니고 하대를 하는 것도 아닌 이 애매한 호칭은 그러나 오직 국밥 아지매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호칭이다. 막내 동생뻘인 송변, 자신의 국밥을 먹고 변호사가 된 한 나이 어린 사내에게, 그러나 아들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변호사이기에, 매달릴 데라곤 송변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온 호칭인 “변호사님아”는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밥 아지매가 송변에게 매달린 진정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수보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국밥 아지매 관점에서 본 국가란 무엇일까? 헌법 1조 2항일까? 국밥 아지매 관점에서 본 역사란 무엇일까?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현재와 과거의 대화일까? “변호사님아, 내는 그런 거 모른다. 우리 아들만 살려도, 제발…….”

변호사가 되고 돈 많이 벌어 집과 요트까지 장만한 송변은 봉투를 준비해서 그 옛날 밥값을 내지 않고 도망쳤던 국밥집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국밥 아지매는 한사코 송변이 내미는 봉투를 받지 않는다. 그러자 송변은 아지매에게 말한다. “한 번 안아 보겠심더…….” 두 사람은 마치 모자처럼, 혹은 오누이처럼 서로를 끌어안는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의 옷깃이 그 연으로 다시 만났고 이제 서로 깊이 끌어안고 서로의 등을 어루만진다. 스쳐 지나간 옷깃의 인연이 이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고리가 된 것이다. 고문 경감에게 전해 주고 싶다. 국가는 국밥으로 맺어진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스쳐가던 옷깃을 서로 부여잡고 올이 엉켜 붙도록 함께 서로 비벼대며 살아가는, 헌법, 형법, 보안법 그 이상의 연기법의 세계라고.

국밥으로 맺어진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스쳐 지나갈 수도 있던 옷깃을 올이 엉켜 붙도록 서로 끌어안고 비벼대며 함께 살아내야 하는 연, 이를 불가에서는 십이연기(十二緣起)로 다시 나누어 정리하는 연기설(緣起說)이라고 부른다.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현상은 무수한 인(因, 이유)과 연(緣, 조건)이 씨줄과 날줄로 상호 교직되어 일어남으로, 독립되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 이 연기설의 핵심이다.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 즉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양서협동조합독서토론회사건이 없었다면, 학림사건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부림사건도 없었을 것이며 또 그랬다면 부마민주항쟁도 없었을 것이고 박정희도 김재규의 손에 죽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길어서 조금 생략하면, 그랬다면 박근혜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댓글 없이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거고 그랬다면 영화 ‘변호인’은 어용 작품이라는 누명을 쓰고 말았을 것이고 처음부터 기획조차 못 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누락도 없이 맞아 떨어지는 이 인과의 연기에 우리는 청와대 연기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모든 것이 청와대에서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설의 관점에서 보면, 국밥과 짜장면은 이번 영화만이 아니라 다음 영화에서도 또 나올 것이 확실한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두고 먹은 대로 쌀 것이다. 청와대는 앞으로도 ‘변호인’같은 영화를 양산해 낼 엄청난 소재를 뿌리고 있지 않은가. ‘댓글녀가 살아가는 법’, ‘혼외자의 설움’, ‘국철은 달리고 싶다’ 등등. 한류 만세! 영화 소재를 많이, 많이 하사하시는 청와대 만세!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31호 / 2014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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