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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옥봉(李玉峯)이 운강(雲江)에게 준 시

입춘이 지났다. 생동하는 대지의 힘찬 기운이 꿈틀댄다. 모두가 대길(大吉)의 나날이 될 것이 틀림없다. 겨우내 웅크리고 서있던 은행나무들도 잎새가 피어나려면 시간이 조금 더 있어야 하겠지만 벌써 뿜어내는 에너지는 봄의 에너지이다.

남편을 지극히 연모한
여인의 애절함이 담겨
가슴을 저미는 사랑도
사막의 신기루에 불과

한시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도 빼어난 한시를 남겨놓고있는 여성들이 많다. 중국 동파거사의 누이동생인 소소매는 오빠들 못지않은 명문장가 이기도 했다. 이번에 읽을 시는 조선시대의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여인이 한동안 소식이 뜸한 남편 운강(雲江)에게 보내준 시이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요즈음 안부가 어떠신지 여쭙니다.
달빛 스며드는 깁사 창가에서
저의 안타까움은 깊어만 갑니다.
만약 꿈 속의 혼이 돌아다님에
자취가 남는다면
당신 문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겁니다.

더러 강의할 기회가 있을 때 이 시를 소개하면서 듣는 분들에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법당앞의 돌길이 모래가 되도록 꿈속에서도 자주 법당에 가시지요?”

대부분의 경우 ‘와’하고 웃는다. 오래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대학 후배 한 사람은 이 시의 뒤쪽 두 구절을 활용해서 데이트에 성공했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스마트폰이 대세인 시대이다. 아마 조선시대에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운강 문 앞의 돌길이 모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옥봉의 스마트폰 자판이 부서지는 모래처럼 망가졌으리라.

속리산 법주사 근처에도 이 시의 뒷구절 2행이 시비로 세워져있다고 어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시를 애틋함으로 읽을 것인지 과장법이라고 치부할 것인지는 순전히 독자님들의 몫이다. 그래도 얼마나 그리웠으면 꿈속에서 스토커처럼 문 앞을 서성거렸을까. 운강은 꿈속에서 옥봉의 문앞을 다녀가기나 한 것일까.

갈애(渴愛)이다. 불가에서는 사막에서 신기루를 발견하고 죽을뚱살뚱 뛰어가는 사슴으로 비유한다. 사슴(鹿)이 사막(土) 위를 전속력으로 달려갈 때 일어나는 것이 먼지(塵)이다. 우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세먼지가 사실은 저 사슴들이 뛰어다니는 바람에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塵 )은 번뇌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객관대상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 6진(六塵)은 감각기관인 6근과 만나서 식(識)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막의 먼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 생각 속에서 한 생각 망념을 따라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먼지이다. 생각의 먼지가 머릿속에서 한쪽을 점령해버리면 어떤 일을 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생각의 먼지 속을 돌아다니게 된다.

필자의 경우 적어도 50여 년동안 쌓여있던 통증의 먼지가 몸 곳곳에서 빼져나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통증의 먼지는 생각의 먼지와 한 라인으로 직통연결되어있다. 시는 사실은 통증의 먼지와 생각의 먼지를 가라앉혀주고 털어내주기도 하는 특효약이다.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는 그러하다. 시를 읽노라면 그 지은이의 통증이 느껴지기도 하고 삼매가 느껴지기도 하고 그 시인의 기쁨과 슬픔이 정제되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는 마주 대할 수 없는 찰나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나의 생각은 지금 어디를 거닐고 있는가. 나의 생각의 발길은 어느 돌맹이를 모래로 만들고 있는가. 생각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보일락말락하는 것을 잠시라도 들여다 볼 일이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32호 / 2014년 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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