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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회련 스님의 환속한 스승

기자명 성재헌

묵은 은혜도 잊지 않는게 제자의 도리

▲ 일러스트=이승윤

찰라의 순간을 담은 필름들이 수없이 모여 한편의 영화를 만들듯 삶은 불연속의 단편들이 엮어내는 빛깔과 소리의 향연이다. 그 흐름 속에서 항상 지속되는 ‘무엇’은 없다. 이것이 실상(實相)이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파악하고 진심으로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변화하는 자’를 상정하고는 ‘무엇’이 과거에는 어떠했고 현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이라 꿈꾸면서 살아간다.

거기에 더해 인간의 기억은 결코 냉정하지도 못하다. 한편의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을 골라 포스터를 만들듯, 사람들은 자신을 또 타인을 특정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또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현재가 마음에 들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처럼 과거를 망각하기가 쉽고, 과거가 마음에 들면 “내가 왕년에~” 타령으로 현재를 부정하려 애쓰기가 쉽다.

도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나’를 화려하게 치장하려는 습성은 ‘너’와 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인간 심사는 너무도 흔한 풍경이라 탓할 만한 꺼리도 못된다. 묵은 은혜는 끝내 잊지 않고 지난 허물은 말끔히 잊었던 선현(先賢)들의 행리가 그래서 더욱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임간록(林間錄)’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대각 회련(大覺懷璉, 1007~1090)선사는 도(道)와 덕(德)이 고매하여 인종(仁宗) 황제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온 천하가 그 풍모를 흠모하였다. 스님은 호화로운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거절하고 백여 명 정도가 모여 사는 정인선사(淨因禪寺)를 거처로 삼았다.

그때 속복을 걸친 한 노인이 찾아왔다. 서현사(棲賢寺)의 효순 노부(曉舜老夫)선사였다. 고을 관리에게 승복을 빼앗긴 그는 의지할 곳이 없어 회련을 찾아온 것이었다. 회련은 효순을 자신의 침실로 모시고 자신은 곁에 딸린 쪽방에서 지냈다. 그렇게 제자로서 예의를 지키며 모셨는데 그 태도가 너무도 공손하였다. 왕과 귀족이 회련을 찾아왔다가 이를 목격하고는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회련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제가 젊은 시절 효순 스님께 도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이제 모습과 복장이 다르다하여 제가 딴 마음을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다들 탄복하였다. 또 인종(仁宗)은 이 사실을 알고 효순에게 다시 삭발하게 한 후 예전처럼 서현사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불조통기(佛祖統紀)’에 따르면 “송나라 인종이 황우(皇祐) 2년(1050)에 조칙을 내려 회련(懷璉)을 좌가(左街)에 임명하고 정인선사(淨因禪寺)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황궁으로 들어간 회련은 화성전(化成殿) 법좌에 올라 우가승록(右街僧錄) 지림(智林) 등과 문답하고 임금의 물음에 답하였으며, 임금이 이를 칭찬해 대각(大覺)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효순 노부(曉舜老夫)선사는 동산 효총(洞山曉聰)선사의 제자이다. 그가 환속 당한 내력은 ‘선림보훈합주(禪林寶訓合註)’에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여산(廬山) 서현사(棲賢寺)에 머물 때, 괴도(槐都)의 관리인 남강(南康) 군수가 서예품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효순은 상주물(常住物)로 정을 맺고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것을 참지 못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의 참소로 군수에게 문책당해 환속하여 속복을 입게 되었다.”

남강(南康) 관청 앞에는 오래된 홰나무[槐]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강을 괴도(槐都)라 칭하였다. “군수가 서예품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했는데, 효순 스님에게 휘호를 요구했는지 절이 소유하고 있던 필첩을 요구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고래로 명찰에는 명사들이 참방하고 남긴 필적이 많았으니, 아마도 후자 쪽이 가깝지 않을까 싶다. 효순은 절의 소유물을 사사로이 정분을 쌓는 데 사용하고, 그렇게 쌓은 정분으로 주지자리를 연명하는 걸 수치로 여겼나보다.

하지만 이해득실 따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결정하는 범부가 그런 깊은 속내를 헤아려줄 리 없다. 군수는 효순을 괘씸하게 여겼고, 군수의 심사를 눈치 챈 모리배들이 효순을 모함하였고, 군수는 이때다 싶어 효순을 환속시켜버렸다.

그래서 갈 곳이 없어진 효순이 서울로 회련을 찾아갔던 것이다. 회련선사는 늑담 회징(泐潭懷澄)의 법제자이다. 효순 노부(曉舜老夫)선사는 그가 젊은 시절 편력했던 수많은 스승 가운데 한분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회련은 왕후장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추레한 속인을 자기 침실에 모시고 조석으로 문안을 여쭈었다니, 체면을 따지고 득실을 저울질하는 보통사람은 흉내도 못 낼 일이다. 게다가 매일 황제의 부름을 받고 내전을 드나들면서도 효순의 일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니, 그것도 놀랄 일이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친소(親疎)에 따라 말을 보태고, 힘을 보태는 보통사람이었다면 효순의 구명을 위해 황제의 힘을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회련은 효순에게 제자의 도리를 다할 뿐이었고, 효순 역시 회련에게 억울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다행히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러 정인선사(淨因禪寺)를 방문했던 가왕(嘉王) 덕분에 소식은 대궐까지 전해졌다. ‘종문무고(宗門武庫)’에 따르면, 소식을 들은 인종은 효순 스님을 편전(便殿)으로 불렀고, 직접 만나보고는 “위대한 도풍을 간직한 산림의 진짜 달사(達士)”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채 위에 “효순에게 내리니, 옛날처럼 승려가 되게 하고 특별히 다시 서현사의 주지로 명한다”고 써주었으며, 자색가사와 은발우를 하사하였다.

산문에서 쫓겨난다는 건 승려에게 치욕이다. 게다가 효순 스님이 서현사 주지에서 파면되었을 때, 가마를 메고 가던 두 장정이 나한사(羅漢寺) 앞에 이르러 “이미 우리 선원의 장로가 아니니 멀리 갈 것 없다”며 가마를 버리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서운함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현사로 다시 부임하게 된 효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미리 사람을 보내 두 장정을 위로한 것이었다.

“자네들도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심해라.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리고 서현사에 도착해서는 법당에 올라 이렇게 노래하였다고 한다.

까닭 없이 참소입어 쫓겨났던 몸
반년 남짓 세월 속인으로 살았네.
오늘 삼협의 절집으로 다시 돌아오니
기뻐할 자 몇이고 노여워할 자 몇일까.

영욕(榮辱)을 잊은 자에게 회한이란 있을 수 없다. 효순 스님은 아마 노래 끝에 싱긋이 웃었을 것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34호 / 2014년 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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